잊혀진 시간의 풍경들
밤 12시, 세상이 쉼을 얻는 시간. 요양병원의 복도는 고요함을 넘어 적막함마저 감돈다. 첫 야간 근무에 호기심과 긴장이 뒤섞인 마음으로 노인들의 병실을 향해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형광등이 흐릿하게 빛나는 복도를 지나며 각 방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203호실의 문을 살며시 열자 침대에 누운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며 이불의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계셨다. 치매 진단을 받은 지 4년이 지났지만, 최근 들어 급격히 상태가 나빠진 김순자할머니였다.
"어르신, 이제 주무셔요."
낮잠도 거의 주무시지 않았는데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에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졌다. 대답 대신 그저 허공을 바라보는 눈빛이 돌아왔다. 옆 침대의 노인은 어느 한 곳을 응시하며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계셨다.
"어르신, 누가 있어요?"
"저기 남자가 있어..."
"남자가 뭐라고 해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이어졌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빈 벽만이 있을 뿐.
무엇이 이들에게 잠자는 권리마저 빼앗아 갔을까. 치매는 정말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저주인 것일까.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방을 나와 복도를 따라 걷다 청년병동을 지나게 되었다. 스무 살의 한 청년이 오토바이 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어 입원해 있었다. 밤이 깊었지만 그는 여전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언제 잘 거니?"
"늦게 자요."
"일찍 자야지."
말을 건네며 나왔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한창 세상을 향해 달려 나갈 나이에 병상에 누워 대소변조차 스스로 할 수 없는 현실. 그가 밤을 지새우는 것이 이해되었다. 세상과의 유일한 연결고리가 그 작은 화면 속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치매라는 질병은 얼마나 잔인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해체해 나가는가. 처음에는 사소한 일상의 망각으로 시작된다. 안경을 어디에 두었는지, 방금 먹은 점심 메뉴가 무엇이었는지를 잊어버리는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증상은 더욱 깊어진다.
김호식 할아버지는 6개월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이름과 가족들을 기억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날이 더 많아졌다. 평생을 함께한 아내를 다른 환자와 혼동하기도 하고, 50년 전 고향에서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하기도 했다.
치매는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초기에는 단기 기억 상실과 판단력 저하가 주된 증상이다. 중기에 접어들면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고, 성격이 변하며, 환각이나 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말기에 이르면 기본적인 신체 기능까지 잃게 된다. 먹고, 씻고, 옷을 입는 단순한 활동조차 도움 없이는 불가능해진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아의 상실이다. 김호식 할아버지는 전직 교장 선생님이었다. 평생 학생들을 가르치며 존경받던 그가 이제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때로는 자신을 학생으로 착각하여 숙제를 해야 한다며 안절부절못하기도 한다.
낮과 밤이 뒤바뀌어 밤새 배회하고 낮에는 졸게 된다. 이런 생체리듬의 교란은 환자뿐 아니라 간병인에게도 큰 부담이 된다. 김호식 할아버지는 밤마다 이불의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중얼거린다.
치매 환자의 뇌를 들여다보면 베타 아밀로이드라는 단백질이 뇌세포 사이에 쌓여 신경전달물질의 흐름을 방해한다. 마치 도로 위에 거대한 장애물이 놓여 모든 교통이 마비되는 것과 같다. 이 과정에서 뇌세포가 죽고, 뇌의 부피가 줄어든다. 현대 의학은 이 과정을 늦출 수는 있어도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럼에도 치매 환자들에게는 특별한 순간이 있다. 김호식 할아버지도 가끔 맑은 정신을 되찾는 순간이 있었다. 그럴 때면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고 괴로워했다.
어느 깊은 밤, 할아버지의 침대 옆에 앉아 있을 때였다. 갑자기 또렷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건네셨다.
"선생님, 내가 미쳐가는 것 같아요. 내 머릿속이 안개 낀 것처럼 뿌옇게 변해가요. 사람들 얼굴도 기억이 안 나고... 내 아들딸이 누군지도 헷갈려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세요?"
눈물이 그의 주름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평생 책을 읽고 가르쳤던 사람이 이제는 신문 한 줄 못 읽어요.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를 때가 있어요. 내 몸 안에 갇혀서 점점 사라져가는 느낌이에요."
그 순간만큼은 할아버지의 눈에 또렷한 자의식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이 더욱 가슴 아팠다. 자신이 잊혀져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의 고통이란 얼마나 클까.
"내가 살아온 날들이 모두 지워지고 있어요. 내 인생이... 사라져가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할아버지의 눈빛은 다시 흐려졌다. 맑은 정신의 순간은 번개처럼 잠깐이었고, 다시 혼돈의 안개 속으로 돌아가셨다.
현대 의학은 치매의 진행을 늦출 수 있는 약물을 개발했지만, 근본적인 치료법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치매 예방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장 효과적인 예방법은 활발한 신체 활동이다. 유산소 운동은 뇌의 혈류를 개선하고 새로운 신경 연결을 촉진한다. 주 3회, 30분 이상의 걷기만으로도 치매 위험을 20% 이상 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식이요법도 중요하다. 지중해식 식단, 즉 올리브 오일, 생선, 견과류, 채소와 과일이 풍부한 식단은 뇌 건강에 도움이 된다. 반면 가공식품, 설탕, 포화지방이 많은 서구식 식단은 인지 기능 저하와 관련이 있다.
인지적 자극 역시 필수적이다. 새로운 언어 배우기, 악기 연주, 퍼즐 풀기 같은 활동은 뇌의 '인지 예비력'을 높인다. 이는 뇌가 손상되더라도 그 기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보호 장치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예방법은 사회적 연결이다. 고립된 노인들은 그렇지 않은 노인들보다 치매 발병 위험이 64% 더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친구들과 교류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지역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트레스 관리와 충분한 수면도 뇌 건강에 필수적이다.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뇌세포를 죽이고, 수면 부족은 뇌에서 독소를 제거하는 과정을 방해한다.
이 모든 요소를 종합해보면, 치매 예방은 단순히 하나의 생활 습관이 아니라 총체적인 삶의 방식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활동적이고,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하며, 지적으로 자극받고, 사회적으로 연결된 삶. 이것이 뇌 건강을 지키는 열쇠다.
복도를 걸으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한쪽에는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들이, 다른 한쪽에는 몸의 자유를 잃은 젊은이들이 있었다. 두 병동 사이를 오가며 인간의 취약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목격했다.
청년병동에서 마주친 30세의 청년은 응급구조사로 일하다 교통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밤중에 물을 마시려다 바닥에 엎질러 미안하다며 연신 사과했다. 그의 예의 바른 태도와 맑은 눈빛이 가슴을 후벼팠다. 이런 청년에게 일어난 일이 공평한 세상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달도 정복하고 화성도 탐사하는 시대에, 치매는 아직 정복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감기처럼 며칠 약을 먹으면 나아지는 치료법이 나올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보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치매는 단순한 기억 상실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정체성, 존엄성, 그리고 삶 전체를 서서히 지워나가는 잔인한 질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매 환자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그들은 우리에게 현재의 순간을 소중히 여길 것을,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를 깊이 할 것을, 그리고 기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가르친다. 그것은 바로 '존재'의, 그리고 '현존'의, 그리고 '사랑'의 가치다.
김호식 할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을 잊어도, 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도, 여전히 음악을 들으면 미소 짓고, 따뜻한 손길에 안정을 찾는다. 기억은 사라져도 감정은 남는다. 존재의 가치는 지식이나 기억이 아닌, 그 순간의 진정성에 있다.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처럼, 이곳에 계신 모든 이들에게 희망이라는 기운이 다가오길 바라며 마음을 다졌다. 청년에게는 희망의, 노인에게는 위안의 등불이 되고 싶었다.
조금만 더 기다린다면 잃어버린 세월이, 잘려나간 팔다리가 돌아올까? 다시 떠오르는 태양은 무심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 무심한 태양 아래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서로에게 허락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치매, 당신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것. 그것은 아마도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법, 기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진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의 가치일 것이다.
언젠가는 너와 함께하겠지, 지금은 헤어져 있어도. 니가 보고 싶어도 참고 있을 뿐이지.
언젠간 다시 만날 테니까.
그리고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치매와 싸우며, 예방하며,
무엇보다 환자들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