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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그대,조금만 늦게 떠나준다면

철거덕 거리는 1인용 침대에서 노인은 홀로 먼 길을 떠났다

by 시가 별빛으로 눕다 Mar 11. 2025


 겨울보다 차가운 숨결

늦은 가을, 햇빛마저 차갑게 느껴지는 오후였다. 만성병동 423호실에 들어서자 생의 마지막 무렵 특유의 무거운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소독약 냄새와 죽음의 예감이 뒤섞인 이 침묵은 너무나 익숙했다.

침대에 누운 김만수 할아버지는 몸에 달고 있던 모든 것들이 병원에서 옮겨 오면서 다 떨어져 나갔다 편하실까 이제 마지막 순간만을 남기고 있다.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고, 예전에 건장했다던 그 몸은 이제 이불 아래 희미한 굴곡으로만 존재했다. 손도 발도 움직임이 없다 가끔 신음 소리만 새어 나온다

요양원의 임종은 언제나 이런 모습이었다. 병실 유리창에 맺힌 서리처럼 차가운 기운, 거의 멈추다시피 한 시계,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신음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복도에서는 간호사들의 가벼운 대화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살아있는 자들은 여전히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선생님..."

옆 침대의 노인이 희미한 목소리로 불렀다. 송기철 할아버지였다.

"저분 어제부터 많이 안 좋아지셨어요. 새벽에 일어났는데 찬바람이 불더라고. 문도 안 열었는데..."

두려움이 섞인 그 목소리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요양원에 오래 계신 분들은 안다. 누군가 떠나갈 때의 그 특별한 기운을.

만수 할아버지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한때는 세 아들 딸에게 온 재산을 쏟아붓고, 손주들 학비까지 댔다는 이 노인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일주일째 면회 한 번 없었다. 그가 아들 민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몇 번이나 들었다.


봄바람 따라 훨훨 날아 가다

노인의 붉었던 얼굴빛은 이제 창백한 백지와 같았다. 주름진 이마 위로 흐르는 식은땀. 한때는 아이들을 안아주던 그 손이 이제는 힘없이 침대 위에 놓여있다. 오십 칠 년을 함께 살았다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이제 그도 떠나려 한다.

침대 옆 낡은 사진첩에는 세 자녀와 함께 찍은 옛날 사진이 꽂혀 있었다. 자식들을 등에 업고 웃던 젊은 시절의 모습. 그때는 얼마나 힘이 넘쳤을까. 막내딸 대학 졸업식에서 자랑스레 찍은 사진 옆에는, 손주들과 함께한 생일 파티 모습도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자식 위해서라면 산도 옮기셨어요."

한 달 전, 큰아들이 병문안 왔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오늘, 노인의 마지막 순간에 그 자식들은 어디에 있을까? 서울에서, 부산에서, 미국에서... 각자의 삶에 바쁜 그들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노인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린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걸까?

"순... 자... 야..."

아내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 오십 칠 년을 함께 살았던 박순자 여사. 삼 년 전 먼저 하늘나라로 간 그녀를 찾는 것일까?

아니면,

"민... 호... 야..."

장남의 이름도 들리는 듯했다. 평생 자식들을 위해 살았던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식을 찾고 있었다.

노인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 눈물이 주름진 뺨을 타고 베개를 적신다. 온 몸으로 세상을 버텨내던 사람이 마지막을 홀로 맞이하는 처절함에 내 가슴도 무너져 내렸다.

가쁜 숨소리. 손끝의 파란 빛. 마지막 숨을 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너무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의 두 손을 잡았다. 차갑고 거친 손. 평생 농사일로 굳은살이 박힌 그 손이 이제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아버님, 괜찮아요. 이제 편히 가셔도 돼요."

귓가에 속삭이자 노인의 눈빛이 잠시 또렷해졌다. 그 눈에는 두려움과 황망함, 그리고 깊은 외로움이 가득했다. 평생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아내와 함께 모든 고난을 이겨냈지만, 막상 죽음의 문턱에서는 홀로 서 있었다.

손은 어느새 핸드폰을 찾고 있었다. 자식들에게 전화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노인의 숨소리가 점점 희미해졌고, 가슴의 오르내림도 미세해졌다.

"많이 사랑하셨어요. 자식들도 아버님을 사랑해요."

거짓말이었다. 물론 자식들도 아버지를 사랑했겠지만, 정작 필요한 순간에 곁에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평생을 바쳐 키운 자식들에게 마지막 인사조차 못 하고 떠나는 노인의 모습이 너무 애처로웠다.

노인의 손이 살짝 움직인다. 내 손을 꽉 쥐는 듯했다가, 이내 힘이 빠져나갔다. 노인의 눈에서 마지막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남은 자의 아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은 언제나 아프다 언제나 슬프다 언제나 가슴이 아프고 목이 메인다.

응급실에서는 급박하게 진행되는 죽음이 있었다면, 요양원에서는 이렇게 서서히 찾아오는 죽음이 있다.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홀로 맞이하는 죽음만큼 슬픈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노인의 맥박이 완전히 멈추자 눈을 감겨드렸다. 이제는 편안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저 세상에서는 예순 해 함께한 아내를 만나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숨소리가 멎은 방 안에서 혼자 눈물을 닦았다. 인간으로서 이 슬픔을 어찌 참을 수 있을까.

도표에 사망 시간을 기록하고, 의사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도. 늦었지만, 아버지의 마지막을 알려야 했다.

"아버님이 방금 돌아가셨습니다. 정말 편안하게 가셨어요."

또 거짓말이다. 편안하지 않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마지막까지 자식들을 찾던 입술의 떨림이, 그의 마지막이 결코 편안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울음소리.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곧 미안해졌다. 그들도 각자의 삶을 살아가느라 바빴을 테니. 하지만 정말 그런 변명이 통할까? 평생을 바친 부모님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다면?

노인의 차가운 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될 테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직면하고 싶지 않은 진실.

그 사이 도착한 막내아들 태식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오열했다. "아버지, 미안해요. 조금만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다. 이제 아버지는 들을 수 없다.

 


세상을 향한 기도

노인의 시신이 장례식장으로 옮겨진 후, 텅 빈 방에 홀로 남았다. 곧 다른 환자가 이 침대를 쓰게 될 것이다.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이 공간에서,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사랑의 주님,
 오늘 당신 곁으로 돌아간 이 영혼을 평안히 맞아주소서.
 평생을 자식과 가족을 위해 살았던 이 분에게
 천국의 안식을 허락하여 주소서.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내와 다시 만나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하지 못한 모든 말과 사랑을
 저 세상에서는 마음껏 나눌 수 있게 하소서.


주님,

 이 세상에 남겨진 우리에게도 지혜를 주소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 사랑하는 이의 곁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하소서.

우리 모두를 묶고 있는 욕심의 끈,
 이기심의 끈, 바쁨의 끈을 풀어주시고,
 진정한 사랑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주소서.


언젠가 우리 모두 맞이할 그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축복을 허락하소서.
 그리고 우리가 떠나는 길에는
 꽃길만 펼쳐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를 마치고 창밖을 바라보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마치 노인의 영혼이 저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너무 치열하게 살지 말자.
 너무 많이 담아두지 말자.
 너무 두 손 가득 잡지 말자.
 너무 많이 걷지도, 뛰지도 말자.

 조금만 두 손을 펴보자.
 조금만 천천히 속도를 늦춰보자.
 조금만 숟가락도 비워보자.

그리고 지금 나와 인연을 맺은 이들을 뜨겁게 사랑하자.
 마지막 순간, 이별의 시간이 길지 않기 위해서.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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