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면서 다른사람 못살게 안했는데.....
소독약 냄새 가득한 요양원 끝 방. 오늘도 307호실 문을 열자 가녀린 한숨이 먼저 달려든다. 형광등 불빛이 무자비하게 드러내는 얼굴 위 팽팽한 주름살, 그 틈에 흐르는 눈물의 자국. 벽에 켜진 텔레비전 소리에 묻혀 작아진 노인의 목소리가 방 안을 맴돈다.
"내가 살면서 사람 하나 못살게 하지 않았는디... 이렇게 묶여 사는 게 내 팔자란 말이여?"
옅은 파란 병원복 사이로 드러난 앙상한 팔뚝에는 끈자국이 선명하다. 피부가 접힌 자국마다 붉게 부어오른 흔적들. 한때는 자식을 안아주던 그 손이, 이제는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침대 난간에 묶여있다. 단 한 번, 침대에서 내려오다 넘어져 다쳤다는 이유로.
노인은 오늘도 손목의 끈을 풀려 안간힘을 쓴다. 가냘픈 손가락으로 끈매듭을 한 올 한 올 풀어보려 애쓰다가 이내 지친 기색으로 손을 내려놓는다. 그러다 문득 감시카메라를 바라보며 애원하듯 손짓한다.
"나, 집에 가야 하는디... 우리 두철이가 기다릴 거여. 어제도 왔다 갔다던데..."
눈을 바라보면 이미 오래전 현실과 이별한 빛이 감돈다. 두철이... 십 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의 이름이다.
매일 오전 8시, 나는 이 끔찍한 현실을 마주한다. 요양보호사 배지를 가슴에 단 채, 307호 할머니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이 하루 중 가장 무거운 시간이다. 어젯밤에도 또 끈을 풀어 침대에서 내려오시려다 넘어지신 할머니. 규정상 어쩔 수 없이 더 단단히 묶어야 했다.
"아가씨, 내가 살면서 남한테 몹쓸짓 안했어. 그런데 왜 이렇게 벌을 받는지 모르겠어..."
할머니의 말씀에 대답할 말을 잃는다. 그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드리며 눈물을 참는다. 아침 식사를 떠먹여 드리는데, 할머니는 숟가락의 절반을 내게 건네신다.
"같이 먹어요. 많아서 혼자 못 먹겠어."
한없이 고우신 마음. 묶인 손과 발로도 건네는 사랑이 내 가슴을 후벼 판다. 나는 무슨 자격으로 이분의 자유를 빼앗고 있는가. '안전'이라는 이름의 구속이 얼마나 잔인한지,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오후에 잠시 할머니의 끈을 풀어드리고 휠체어에 앉혀 창가로 모셨다. 규정 위반이지만, 적어도 햇살은 느끼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창문 너머 하늘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에는 잠시 맑은 기억이 돌아온 듯했다.
"우리 두철이 어릴 적에 저기 산에 진달래 보러 많이 갔었지. 한 번은 비가 와서..."
문득 맑은 정신으로 과거를 회상하시다가도, 이내 다시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돌아가신다.
"두철아... 두철아... 엄마 좀 데려가라..."
그 순간, 복도에서 원장님의 발소리가 들렸다. 허둥지둥 할머니를 다시 침대로 모시고 끈을 매었다. 할머니는 내 눈을 바라보며 애원했다.
"제발... 조금만... 조금만 풀어주면 안 돼?"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나왔다.
퇴근길, 버스 창문에 기대어 할머니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나만은 저렇게 되지 않을 거야.'
누구나 한 번쯤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요양원에서 5년을 일하며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그 길을 걷게 된다. 다만 속도와 방식의 차이일 뿐. 오늘 맑은 정신으로 산책하던 사람이 내일은 자신의 이름을 잊기도 한다. 일 분 후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인데, 우리는 왜 그토록 영원히 건강할 것처럼 착각하는 걸까.
망각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뇌를 자극하는 퍼즐? 끊임없는 독서? 건강한 식단? 규칙적인 운동? 아마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것이다.
사랑.
지금 이 순간,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것. 아마도 그것이 우리를 망각으로부터 지키는 가장 강력한 방패일 것이다. 내가 본 모든 치매 환자 중, 사랑하는 이의 손길이 닿으면 잠시나마 현실로 돌아오는 기적을 목격했다. 307호 할머니도 가끔 손자가 방문하는 날이면 놀라울 정도로 또렷한 정신으로 대화를 나누신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나눠야 한다. 이웃을 향한 작은 친절부터, 가족을 향한 깊은 헌신까지.
이 시간에도 굶주림에 울고 있는 아이들을 향한 사랑도 필요하다 한 끼 밥을 위해 등이 굽은 채 폐지 줍는 노인의 손을 잡아주는 것도 세상 끝자락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 서 있는 누군가의 외로운 밤을 감싸 안아주는 것도 사랑이다
당신과 내가 진실된 사랑을 나눌 때, 망각의 강물은 서서히 마를 것이다. 깊은 밤이 우리를 데려가도, 그곳에서 사랑과 미움을 가려낼 수 있다면. 이 밤, 나의 바구니 중에 사랑으로 가득 차길, 미움은 텅 비어 있길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내 어리석은 이성은 또다시 투닥거리며 미움의 바구니를 채우겠지. 그래도 믿는다. 저 높은 밤하늘에 떠 있는 별 하나처럼, 작은 사랑 하나가 307호 할머니의 밤을, 그리고 우리 모두의 밤을 따스하게 감싸줄 것이라고.
오늘 퇴근길, 나는 결심했다. 내일은 규정을 어기더라도 할머니를 휠체어에 더 오래 모시고, 봄바람을 느끼게 해드리리라. 그것이 내가 드릴 수 있는 작은 사랑의 시작점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묶여 있는지도 모른다. 그 끈을 풀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것을, 307호 할머니가 가르쳐 주셨다.
주님,
오늘 저를 묶고 있는 모든 끈들을 보셨나이다.
두려움이라는 끈, 불안이라는 끈, 이기심이라는 끈,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끈,
편견이라는 끈이 저의 손과 발, 그리고 마음을 옭아매고 있습니다.
주님,
제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게 만드는 무관심의 끈을 풀어주소서.
'규정'과 '관례'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냉정함의 끈을 끊어주소서.
307호 할머니처럼 제 영혼이 갇혀있는 병실에서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제 안의 작은 사랑이 큰 강물이 되어 주변의 목마른 영혼들에게 흘러갈 수 있게 하소서.
묶인 자의 끈을 풀어주는 손길이 되게 하시고
갇힌 자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게 하소서.
망각의 강을 건너야 할 때가 오면 제 영혼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게 하소서.
주님,
저를 묶은 모든 끈으로부터의 자유,
그 자유를 통해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사랑,
그 사랑을 통해 세상에 전할 수 있는 희망을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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