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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물 한 모금, 생명의 빛

요양원의 저녁 식탁에서

by 시가 별빛으로 눕다 Mar 09. 2025

식탁 위로 내려앉은 침묵

저녁 5시, 요양원의 식당은 평소처럼 분주했습니다. 쟁반을 나르는 소리, 수저를 준비하는 소리, 휠체어를 움직이는 소리가 뒤섞여 특유의 리듬을 만들어냈습니다. 저는 식사 보조를 맡은 어르신들의 자리로 서둘러 이동했습니다.

김 할아버지의 휠체어를 테이블 앞으로 밀어드리며 눈인사를 건넸습니다. 치매로 인해 말씀은 어눌하셨지만, 눈빛만큼은 늘 반짝였던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녁, 할아버지의 눈은 초점을 잃은 채 식탁 위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사고 예방을 위해 대부분의 시간 두 손이 부드러운 천으로 묶여 있는 할아버지는 식사시간에만 한 손이 자유로웠습니다. 저는 평소대로 할아버지의 오른손 묶음을 풀어드리고, 젖혀진 상체를 조심스레 일으켜 식탁 앞에 바로 앉혀드렸습니다.

"할아버지, 저녁 시간이에요. 오늘은 갈비찜이랍니다."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건넸지만, 할아버지는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저 식탁에 상체를 기댄 채 꼼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깊이 주무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간혹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할아버지, 일어나세요. 식사하셔야죠."

어깨를 가볍게 흔들어보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습니다. 다른 어르신들도 식사를 시작하셔야 했기에, 잠시 할아버지를 그대로 두고 다른 분들을 챙겼습니다. 아마 조금 있으면 깨어나시겠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배식 카트가 도착하고, 식당은 더욱 분주해졌습니다. 다시 김 할아버지께 다가갔을 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식탁에 엎드린 채 미동도 없으셨습니다. 이제 단순한 깊은 잠이 아님을 직감했습니다.

"김 할아버지가 의식이 없어요!"

제 외침에 동료들이 재빨리 모여들었습니다. 누군가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어깨를 흔들었고, 다른 이는 뺨을 가볍게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습니다.

생명의 끈을 붙잡은 순간들

근무 중이던 간호사가 재빨리 혈압과 혈당을 측정했습니다. 혈당 수치가 위험할 정도로 낮았습니다. 저혈당 쇼크 상태였습니다.

"119에 신고해요, 지금 당장!"

간호사의 지시에 한 명이 전화기를 들었고, 다른 한 명은 응급 처치를 위한 물품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주방으로 달려가 따뜻한 물에 설탕을 녹인 설탕물을 준비했습니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조금만 참으세요."

할아버지의 입을 살짝 벌리고 설탕물을 조금씩 흘려 넣었습니다. 대부분은 흘러내렸지만, 조금이라도 들어가길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시간은 마치 늘어난 고무줄처럼 느리게 흘렀습니다.

그 순간, 할아버지의 입에서 희미한 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영... 호야..."

정적 속에서 들려온 그 이름은 할아버지의 아들 이름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의식이 희미하게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눈은 감겨 있었고, 몸은 여전히 힘이 없었습니다.

"영호야... 아버지가... 미안하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할아버지는 아들을 찾고 계셨습니다. 그 목소리는 너무 약해 가까이 있는 저희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에는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가득했습니다.

"학비... 제대로 못 대줘서... 대학 못 보내서..."

단편적인 말들이 흘러나왔습니다. 의식의 경계에서 할아버지는 평생 안고 살았던 미안함을 토해내고 계셨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할아버지에게 저희는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직 그리운 아들만이 눈앞에 있었을 테니까요.

"결혼식... 가보지도 못했네... 손주 얼굴도..."

말끝이 흐려지며 할아버지는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때 119 구급대원들이 도착했습니다.

구급대원들은 신속하게 할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각종 의료 장비가 동원되었고, 산소 마스크가 할아버지의 얼굴에 씌워졌습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약 1~2분이 흘렀을까, 기적처럼 할아버지가 가느다란 눈을 떴습니다.

"어... 어디요?"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가냘팠지만, 그 한마디에 식당에 있던 모든 이의 굳은 표정이 풀어졌습니다. 구급대원의 여러 검사 결과 활력징후는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창백했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고, 탁해졌던 눈빛도 맑아졌습니다.

까만 하늘에 갑자기 빛이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조용히 마무리된 소동

구급대원들은 병원 이송을 권했지만, 의식이 완전히 돌아온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병원은 싫어... 여기가 좋아..."

결국 할아버지는 병원에 가지 않고 다시 당신의 침대로 돌아가셨습니다. 설탕물과 응급 처치로 위기는 넘겼지만, 저는 마음 한편이 무거웠습니다. 병원에 가서 링겔이라도 맞으시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들에게 연락이라도 드려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저의 바람일 뿐이었습니다. 기관의 방침상 입소자의 상태가 안정되면 가족에게 즉시 연락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할아버지도 연락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괜히 걱정만 시킨다... 바쁜데 신경 쓰게 하지 마..."

그렇게 그날의 소동은 조용히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했습니다. 만약 집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어땠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을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경험 많은 선배들은 노련하게 움직였고, 그 덕분에 할아버지는 살아나신 것입니다.

간호사는 아마도 저혈당으로 인한 의식 저하였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뇨약을 복용하는 노인분들에게는 종종 발생할 수 있는 응급상황이라고요. 다행히 빠른 대처로 위험한 상황은 넘겼지만, 할아버지의 마음속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설탕물과 인생의 역설

그날 이후로 저는 종종 김 할아버지의 방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처음에는 경계하시던 할아버지도 차츰 마음을 열어주셨습니다. 할아버지는 평생 공장에서 일하며 세 자녀를 키웠고, 장남 영호 씨는 대학에 가고 싶어 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지금은 잘 살아... 회사에 다니고... 손주도 둘이나 있어..."

말씀은 담담했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미안함과 그리움이 서려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찾아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저는 그날 사용했던 설탕물을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 설탕을 멀리하라고 배웁니다. 여러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요. 하지만 그날, 그 설탕물이 한 생명을 구했습니다. 세상에 필요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인생과도 같습니다. 내가 죽도록 미워하는 사람은 나에게 다시 일어나야 하는 동기를 부여해 주고,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꿈이라는 희망을 안겨 줍니다. 미움도 사랑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없어서는 안 되는 두 바퀴와 같은 것입니다.

요양원에서 일하며 저는 많은 노인분들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합니다. 그들의 눈빛에서, 그들의 한숨에서, 그들의 침묵에서 저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늙는다는 것, 그리워한다는 것, 기다린다는 것, 미안해한다는 것의 의미를.


 감사의 순간들

김 할아버지는 그로부터 6개월 후,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임종 직전, 오랜만에 세 자녀가 모두 할아버지 곁을 지켰고, 그중에서도 장남 영호 씨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오랫동안 무언가를 속삭였습니다. 할아버지의 눈에서는 작은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 얼굴에는 오랜 짐을 내려놓은 듯한 평안함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요양원에서 일하며 많은 '마지막'들을 목격합니다. 마지막 식사, 마지막 웃음, 마지막 대화, 마지막 숨결. 그리고 그 순간들이 저에게 가르쳐준 가장 큰 교훈은 바로 '감사'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

요양원의 저녁 식탁에서 일어났던 그 작은 사건은, 제게 인생의 소중함과 관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때로는 한 모금의 설탕물처럼 단순한 것에 의해 지켜지기도 하고, 때로는 오랜 그리움처럼 복잡한 감정 속에서 의미를 찾기도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오늘 하루 주어진 모든 순간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의 주변에 있는 노인분들에게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들의 침묵 속에는 우리가 듣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으니까요.

당신의 모든 순간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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