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에 남은 것
태양은 진작 저물었지만 머문 자리엔 아직 열이 남아 있었다. 다 타버린다고 해서 쉽게 사라질 열이 아니다. 네가 내게 주었던 온기를 애써 가슴에 묶어둔 채, 스스로를 괴롭히면서도 아직 식지 않았음을 직시했다. 오늘 본 태양이 지고 나면 밤에도 낮의 열기를 품은 채 내일의 태양을 기다리는 것이 사람이다. 우리는 그렇게 매 순간 남은 잔열로 살아가고 있다.
이별은 묘하다. 떠나는 순간보다 남겨진 시간이 더 길고, 잊었다는 착각 속에서는 오히려 더 또렷해지고 만다. 나는 너를 잊은 줄 알았지만 사실은 너를 잊으려 애쓰던 나를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람에겐 각자의 그릇이 있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인연의 그릇 또한 있겠지. 한 사람이 품을 수 있는 인연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넘어서고, 무게를 버티다 보면 가장 먼저 무너져 내리는 건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스스로를 향해 원망을 쏟아붓고, 가장 먼저 나를 탓한다. 괴롭지만 쉽다. 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나를 희생하는 것은.
분명히 그릇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한계조차도 영원하지 않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면 흙은 다시 부드러워지고, 금도장을 덧입힐 수도 있다. 내가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내려놓는가에 따라 그릇의 형태는 달라진다. 그렇게 조금씩 변형되는 그릇 속에서 사람은 사랑을 배우고 이별을 견디며 자라난다.
떠난 인연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다른 모양의 내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원래의 내 모습을 찾아가려 애썼지만 그조차도 그를 만나기 이전의 내 모습으로 완벽하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가 떠난 후의 나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다. 다시 돌아온다 해도 이미 바뀌어버린 나의 그릇은 그를 다시 담을 수 없다. 붙잡을수록 더 어긋나고, 어긋날수록 상처만 깊어진다. 돌아봤을 때는 이미 더 이상 이어 붙일 수 없을 만큼 산산이 부서진 조각난 사랑이었다. 그간 내 연약함을 감추고 있던 건 습관이었고, 상처를 늦추고 있었다 믿은 것은 알량한 익숙함이었다. 혼자 남은 나야말로 내가 감당해야 할 유일한 현실이자 진짜 나의 얼굴이었다.
그는 나를 사랑했으나, 그의 세계 안에서 나는 결국 타인이었다.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랑했다고도 할 수 없는, 그런 반쯤 열린 문 같은 불분명한 관계. 들어갈 수는 있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지만 함께 있지는 않은, 닿을 듯 말듯한 거리의 끝.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까지가 이별인지. 나는 사랑을 잃은 건지, 사랑했던 나를 잃은 건지. 내 마음의 유효기간이 다 할 때까지 막연하게 기다리다 나는 뒤늦게야 너를 떠나보냄과 동시에 그때의 나도 같이 떠나보냈다는 것을 알았다. 실은 그 문이 열리고 있던 것이 아니라 서서히 닫혀가고 있던 문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이별은 언제나 장례와 닮아있다.
수많은 이별이 있다. 마음이 식어버려 질질 끌다 겨우 끝내는 이별. 싸우고 깨지고 다시 붙고 매달리며, 조금씩 모양이 흐트러지다 결국은 더 이상 이어 붙일 수 없을 만큼 부서져버린 이별. 서로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손을 놓을 수밖에 없는 이별. 여러 번의 만남과 이별을 거쳐 하나를 배웠다. 사랑은 감정이지만, 관계는 그와 다르다는 것. 관계에는 언제나 현실과 조건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사랑은 상대와 나 자신을 동일시하는 일이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완전히 내려놓을 수 없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닥쳐도 나는 나를 책임지고 견뎌내야만 한다. 나를 포기한다는 것은 나를 버린다는 말이고, 그래서 결국 나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너와 내가 했던 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연애라는 관계 속에서 이어진,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진심으로 좋아했던 남이었을 뿐이다.
감정만으로는 순간을 살 수 있어도 시간을 버티진 못한다. 사랑의 길이가 그 사랑의 깊이를 말해주진 않듯이, 그렇게 이어진 관계는 작은 바람에도 쉽게 꺼진다. 그 안에서 우리가 내린 모든 선택은 꺼져가는 불씨를 잠시 살리는 연료에 불과했다. 괴로운 건 애써 살린 불씨가 완전히 꺼져버렸을 때다. 불이 붙었던 순간은 과거로 남아 기억 속에서만 자리한다. 기억은 내가 지운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잊으려 하면 할수록 더 깊게, 더 선명하게 살아나는 것이 기억이다.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제는 그 그리움까지 함께 안고 가는 일이다. 사랑은 앗아갈 수 있어도 이별은 앗아갈 수 없겠지. 때문에 너를 그리워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으로만 남았다. 말이 되지 못한 마음들,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을 속으로 삼켰다. 삼킬 때마다 속이 쓰라리고, 울렁거린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나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안이라면, 남는 건 고통이 아니라 고통을 견딘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견디고 나면 이전의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언젠가 배워야 할 것들을 먼저 그를 통해 배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언제나 무언가를 남기고 떠나고, 그 남은 것들은 대개 슬픔의 형태로 찾아온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슬퍼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믿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 모든 믿음은 배신의 가능성 위에서 피어나기에 의심은 결국 내가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게 상처를 피해도 다른 형태로 고통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끝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슬픔을 동반한다. 상실을 감수하고도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그러한 용기를 가진 사랑에서 태어나는 슬픔은 아름답다. 그래서 이별이 두렵다고 나는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