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의 끝에서
모든 꽃은 피어나는 순간부터 지기 시작한다. 들판의 들꽃도, 하늘의 불꽃도 제각기 다르게 피어나 빛났지만 서로의 끝은 거울을 마주한 듯 닮아 있었다. 사람의 생도 그렇다. 꽃잎을 화려하게 펼치고 있는 순간은 생각보다 너무 짧다. 손끝에 닿기도 전에 스쳐가 버리는 봄처럼, 아무리 붙잡아도 흩어지는 빛처럼, 그렇게 금세 사라져 버릴 것을 알기에 자꾸만 더 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한 번 더, 조금만 더, 다시. 나는 계속해서 흐르고 있지만 기억은 자꾸만 과거에 머물고 싶어진다.
꽃은 결국 시든다. 피어나던 순간의 찬란함이 무색하게도 사라져 버린다. 시든 꽃을 꽃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다. 처리하기 귀찮은 쓰레기가 될 뿐이다. 버려지고, 잊혀지고. 꽃잎이 버티지 못하고 한 장, 두 장 스러질 때면 슬픔보다 두려움이 느껴진다. 사실 나도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여서. 난 아직 제대로 피지도 못한 것 같은데 저 꽃처럼 당장이라도 시들어버릴까 봐. 피어나는 순간은 멀리 있는 죽음보다 서서히 시들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 더 두려운 법이다. 스물둘, 스물셋, 스물다섯. 숫자가 늘어날수록 자꾸 그 시곗바늘이 나를 찌른다. 이제 우리도 나이 먹었지. 늙기 싫다. 난 서른이 되면 죽을 거야. 농담 속에 느껴지는 불안, 공포. 반 오십이라는 말에는 늙었다와 늦었다가 따라온다. 누군가는 간절히 원하는 숫자일 것이다. 하지만 지는 꽃은 피어난 꽃을 이해해도, 피어난 꽃은 지는 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까 서른. 이 서른이라는 단어는 공포에 가까운 것이다. 변해가는 껍데기를 보는 것이 괴롭고, 가진 숫자만큼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애쓰지만 생각보다 더 빨리 숨이 가빠오는 것에 괴로움을 느낀다.
핀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의 인생은 무엇으로 피고 지는지가 결정되는 것일까. 지는 것은 죽음, 혹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것이라면, 핀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젊음, 성공, 혹은 사회가 말하는 무언가를 이루는 일일까. 우리는 피어난 순간부터 계속해서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지만 그 순간을 피어 있음이라 부르지 못한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언제나 손끝에서 흩어진다. 과거는 이미 굳어버린 기억.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계속해서 형태를 바꾸며 흔들리고 있는 것. 하지만 지금, 지금이라는 것은 없다. 지금은 멈춰 있지 못한다. 그래서 매 순간 늦었다고 믿어버린다. 이미 지나가 버렸다고, 다시 시작하기엔 무리라고. 그러는 사이에 계절은 바뀌어 간다. 피어 있는 순간조차 지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순간의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한 채, 늘 다음 계절의 문턱에 서 있을 뿐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젊음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피어 있는 자신을 스스로 바라볼 줄 아는 일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사라지는 찰나 속에 머무르는 일이다. 멈추어 있는 완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사라지는 그 흐름 자체. 그래서 삶이란 피어남의 결과가 아니라 피어오르는 과정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꽃이 피는 일보다 피어가는 시간이 아름답듯, 우리가 사는 일도 그러하다.
시계는 나를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언제부터인가 시곗바늘의 그림자에 쫓기며 살아왔다. 세상의 기준으로 세어지는 숫자 속에 머물며, 남이 만든 시간 안에서 나를 정의하고, 그들이 부르는 이름으로 나를 불렀다. 아직도 우정의 깊이보다 나이의 근접함으로 관계를 가늠하는 세상. 거울 앞에 선 나는 주름보다 더 깊은 허상을 보았다. 시간이라는 허상.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단 한 번도 젊었던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회가 정한 계절의 기준을 좇느라 정작 그 계절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으니까. 젊음을 즐기라는 말에 젊음을 소비했고, 그 찰나를 붙잡으려다 오히려 잃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늘 미래를 그리며 지금을 비워낸다. 무엇을 위해 현재를 유예하고 내 젊음을 예약해 두었던 걸까. 그렇게 미뤄둔 오늘들이 나중에 나에게 무엇이 되어 돌아오기에. 사실 내가 가장 그리워한 것은 언제나 지금이었다. 여름 속에서 여름을 그리워하고, 젊음 속에서 젊음을 기다렸다. 언제나 지금을 살지 못한 채, 아직 오지 않은 계절에 나를 맡긴 채로.
청춘이라고 하면 무모한 짓도 좀 해보고, 엉망진창으로도 살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흔들림 속에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우리에게 작은 숫자들이 주어진다. 기준을 나에게 두면 10년 전부터 시작하나, 10년 뒤부터 시작하나, 어차피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삶의 무게는 달라지겠지만 나는 언젠가 휴지 조각이 되어버릴 것들에 내 꽃잎을 태우고 싶지 않다.
늦여름의 밤, 바다 가까운 모래사장 위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 하늘을 본 적이 있다. 이따금 목이 아파 잠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적은 있었지만 그렇게 천천히, 온전히 하늘을 바라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산이 없어 비를 맞으며 걷던 날, 비가 생각보다 따뜻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는 그저 스쳐 지나갔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찰나의 순간들이 뭐라고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기만 한다. 내가 좋아했던 노래, 시, 별 따위의 것들이. 문득, 나는 아마 이러한 것들을 좋아하려고 살아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빛을 향해 달리기보다 지금 이 빛 안에서 머무는 것. 나는 그저 노을에 스친 바람 끝의 꽃잎처럼, 저무는 하루의 끝자락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은 온기에 몸을 기댄 채 내가 좋아하는 것들 속에서 조금만 더 오래 머물고 싶었던 거였다.
나는 그래서 불꽃놀이를 좋아한다. 한여름, 이미 저버린 하늘이지만 그 위로 불붙은 나뭇가지들이 터져 오른다. 그 한순간의 빛이 세상의 모든 어둠을 잠시 잊게 만든다. 마치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을 해주는 것만 같다. 분명 타오르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뜨거움은 오래 남는다. 내 안에서, 아주 오래. 참 좋은 시절이다. 좋은 줄도 모르고 지나가는, 그래서 더 아까운 시절. 저 하늘 위에서 피어나는 불꽃도, 피어오르는 순간은 제각각이다. 더 높이 오르건, 더 화려하게 타오르건,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전부 아름다우니까. 그러니까 여름의 초입에서 해야 할 일은 남의 불꽃을 좇는 일이 아니라, 내가 어떤 색인지, 어떤 것들에 나를 태우는지를 찾는 일이다. 그렇게 스스로의 열기로 세상을 물들이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다.
그리고 여름의 문이 닫혀가던 그 무렵에야 느끼게 된 것이 있다. 불꽃은 사라지는 것이 끝이 아니라, 다음 불씨를 품기 위한 잠시의 멈춤이라는 것을. 타다 남은 재는 초라해 보일지라도 그 재 속에서도 또 다른 불씨는 자라나기 마련이다. 모든 것은 꺼지기 위해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피어나기 위해 한 번 꺼질 뿐이다. 청춘의 끝은 젊음의 종말이 아닌, 그 불씨를 품은 또 다른 계절의 시작. 우리는 시곗바늘 위의 숫자가 아니다. 시간은 원 안에서 돌지 않고 그 원 바깥으로 계속 자라난다. 멈추지 않고, 흐르고 또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 꽃도, 생도 마찬가지다. 지는 일은 사라짐이 아니라 순환이다. 여름의 불꽃이 사라지는 건 끝이 아니라 다음 여름을 위한 씨앗이 되는 일이다. 그러니 너무 아까워 불도 붙이지 못하고 손에 꼭 쥐고 있을 필요는 없다. 불꽃은 쥐는 것이 아니라 태우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뜨거움이 다한 뒤에도 잔열은 우리 안에서 계속 살아남아 다시 여름을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