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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석 Oct 24. 2024

레드 콤플렉스 11화

붉은 옷만 입는 아이(2)

다시 고개를 돌려 가방을 뒤졌다. 가방 구석 깊숙한 곳에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1.5V짜리 배터리 세트가 처박혀 있었다. 말없이 워크맨의 배터리를 갈아 끼웠다. 녀석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민망해서라도 자리를 뜨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었다. 


“너는 왜 빨간 옷만 입고 다녀?”


그러나 예상과 달리, 녀석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오히려 답변도 받지 못한 첫 번째 질문은 가볍게 거두고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이런 엉뚱한 상황과 어색한 관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시답잖은 질문에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생각해보니까, 빨간 티셔츠가 많긴 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고.


“빨간색 이스트 백에 빨간 티셔츠는 좀 촌스럽지 않아?” 

“무슨 상관이야?”

“화내지 마. 장난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고, 그냥 좀 궁금해서. 이상하게 넌 거의 빨간 옷만 입고 있는 것 같더라.”

“할 일 없냐? 별 이상한 소리를 하네.”

“이상한 소리가 아니야. 나 말고 다른 애들도 그래. 쟤는 꼭 빨간 옷만 입고 다니더라.”

“누가 그래?”

“다.”

“희한하네. 다른 애들은 나한테 관심도 없는 줄 알았는데.”

“관심이 없다기보다, 가까이 오지 못하긴 하지. 그렇다고 네 얘기를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야.”


별로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내 얘기를 한다는 소리는 조금 언짢게 느껴졌다. 하지만 더 거슬리는 건 쉴 새 없이 말을 걸어오는 이 녀석. 그래서 나는 아무 말 없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처음에는 네가 빨간 옷을 자주 입으니까, 그 모습이 기억에 남아서 너만 보면 빨간색 떠올린 건지도 모르지. 근데 가만히 보니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야.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옷을 입은 너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아예 없는 사람처럼.”


뭐지, 이 미친놈은? 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재생 버튼을 누르고 눈을 감았다. 잠시 세계와의 분리가 필요했다. 이어폰을 타고 Delight의 전주가 시작됐다. 그런데 녀석은 여전히 입을 닫지 않았다. 녀석의 건방진 목소리가 슬금슬금 이어폰으로 끼어들며 나의 Delight를 끊어댔다. 게다가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뒤에서 나에 관한 얘기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언짢은데, 뜬금없이 불쑥 내 옆으로 다가와서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주제에 끊임없이 나에 대해 지껄여대는 녀석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미쳤냐? 뭐냐, 너? 네가 나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아? 좋은 말로 할 때, 할 일 없으면 그냥 네 자리 가서 잠이나 자. 괜히 가만히 있는 사람 짜증 나게 하지 말고.”


귀에 꽂은 이어폰을 거칠게 뽑아내며 소리쳤다. 일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다. 아이들이 내 쪽으로 흘깃 시선을 던지거나 부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누구도 대놓고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흘깃 시선을 던지던 아이들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곧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 상황이 난감했고, 조금 불편했다. 


그러나 나를 정말 불편하게 한 건 아이들의 반응이 아니었다. 그새 겁먹은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는 여전히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이 녀석이었다. 이쯤 되면 놀라든, 짜증이 나든 슬슬 자리를 뜨는 게 정상일 텐데 녀석은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안 가냐?”


내가 물었다. 그러나 녀석은 대답이 없었다. 


“대체 나한테 왜 그래?”


이번에는  목소리에서 조금 화를 걷어내고 다시 물었다. 그제야 녀석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눈에는 눈물이 고여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불안하게 흔들렸다.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왜?”

“너는 전국구 애들도 못 건드리잖아.”

“그래서 나보고 나서서 걔들 좀 막아달라고?”

“나서달라는 게 아니야. 그냥 너랑 친해지고 싶어. 너랑 친해지면 걔들도 전처럼 나한테 함부로 하진 못할 테니까.”


아무리 세간의 편견과 달리 많은 아이들이 제법 열심히 살아가는 세계라지만, 일부는 또 일반적인 세간의 편견처럼 거칠고, 불량한 녀석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 녀석들은 과에 상관없이 아예 한 무리가 되어 학교 전체를 휩쓸고 다녔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들을 전국구라고 불렀다. 그들은 쉬는 시간마다 몰려다니며 괜히 애들한테 시비를 걸기도 했고, 가끔은 돈을 뜯기도 했다. 대한민국 고교생의 사회에서는 어디를 가든 있는 그런 놈들이었다. 


성이는 목소리가 여리고, 몸도 가냘프게 생긴 것이 한 눈에도 좀 유약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그는 전국구의 주 타깃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애들이 다 있는 교실 안에서도 보란 듯이 주먹에 가슴을 맞고, 머리통을 쥐어 박혔다.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거의 정해진 주기에 맞춰 상납하듯 돈을 뜯기기도 한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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