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옷만 입는 아이(3)
친해지고 싶다는 녀석의 말에 ‘왜?’라고 물으며, 어차피 ‘넌 참 좋은 녀석이야’라든가 ‘넌 왠지 나랑 잘 맞을 것 같아’ 따위의 인간적인 얘기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나야 원래 그런 것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그냥 이 뜬금없는 녀석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나 궁금하긴 했다. 그런데 녀석의 대답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지나치다 싶을 만큼 솔직했다.
너무 대놓고 목적을 밝히는 모습에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또한 그래서 더 무시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불안해 보이는 눈빛은 이미 물기가 맺히기 시작했고, ‘전국구’라는 단어에 악센트를 넣은 목소리에서 반드시 그 단어만큼은 전하고 말겠다는 의지 같은 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냉담하고 신경질 적인 반응을 보이는 ‘따’에게 끝까지 굴하지 않고 말을 잇는 태도까지.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나는 엿들을 수 있었다. 도와줘, 제발. 정말 귀찮았지만,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너는 왜 전국구 애들이 나를 못 건드리는지 아니?”
내가 물었다.
“너는 운동을 했잖아.”
성이의 대답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운동을 해서라. 어쩌면 그 말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일지 모르겠다. 보통 운동을 했던 애들이 싸움을 잘 하는 것도 사실이니까.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모든 아이들이 직업 반에 오기 직전의 내가 어땠는지 잘 알고 있었다. 축구를 그만둔 이후 날마다 학교를 탈출한 사이코. 학교 설립 이래 최초로 담임의 모진 실험을 끝까지 견뎌낸 마루타. 대충 그 정도에서 약간 과장된 스토리, 그리고 당시 나를 보며 혀를 내두르던 아이들의 시선이 덧씌워진 이미지. 그게 아이들이 알고 있는 나였다. 아마도 같은 학교 출신의 누군가가 소문의 진원지일 터였다.
대놓고 사이코나 마루타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여기서도 내 별명이 마루타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어쨌든 아이들은 그 때문에 가급적 나하고는 관계를 맺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라. 축구계에서 쫓겨나 인생 막장으로 치달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은 마루타를. 그는 규범을 우습게 여겼고, 인간이 맞을 수 없는 매를 아무 말 없이 견뎌냈다. 내가 그 매를 맞을 때, 어떤 녀석이 말했다. 이제 그만 하라고. 이건 자해라고. 과연 그 녀석만 그렇게 생각했을까. 심지어 내 목적이 그 매를 맞는 것 자체인 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누군가는 ‘정말 죽고 싶은 건지도 모르잖아’라고 말했단다.
아이들이 보기에 나는 그런 놈이었다. 인생 막장에 무엇도 거칠 게 없는 놈. 미래를 걱정하는 소리에도, 제 몸에 대한 위협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완전히 돌아버린 새끼. 게다가 운동선수 출신이었으니, 잘못 건들었다가는 정말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은 내가 직업 반에 오게 된 것도 내 선택이 아니라, 어떻게든 나를 제거하기 위한 학교의 조치였을 뿐이라고 알고 있었다. 창기하고는 차원이 다른 미친놈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전국구 애들도 내 주변에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말이 전국구지, 어쨌든 녀석들은 본교에 가면 명함도 못 내밀 애들일 게 뻔했다. 정말 막나가고, 위험한 애들은 직업 반에 오지도 않는다. 학교의 규율을 피할 이유도, 미래에 대비해야할 이유도 느끼지 못하니까. 그런 전국구 애들이 함부로 나를 건들 리 없었다. 무서워서든, 더러워서든.
“내가 돌아이라서 그런 거야. 너 다른 친구 없냐? 어지간하면 다른 친구한테 부탁해라. 나랑 가깝게 지내다가 너도 따 된다.”
“안 그래도 따야, 나. 전국구 애들한테 찍힌 것 때문에 애들도 불똥 튈까봐 나하고는 가까워지려고 하지 않아.”
조리 과에 따가 나 말고 또 있었다니. 그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었다. 따와 따끼리는 통하는 걸까. 본인도 따라는 말 한 마디에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석의 구조 요청이 쉽게 지나쳐지지 않았다.
“그래, 알았다. 너 편할 대로 해. 근데 많은 건 바라지 마라.”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녀석의 얼굴을 보지는 않았다. 대신 워크맨을 이어폰으로 감아 가방에 집어넣었다. 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음악을 들을 수도 없었지만, 내 대답이 다만 귀찮아서 상황을 피하려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진심임을 느끼게 할 만한 시그널이 필요해 보였다.
“고마워.”
그가 두 손으로 내 오른 팔을 잡으며 말했다. 인파가 많은 거리에서 엄마의 팔에 달라붙듯 매달리는 어린 아이 같았다.
그날 이후, 성이와 나는 동료가 되었다. 확실히 그건 친구라기보다는 동료에 가까운 사이였다. 사실 그렇게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으므로.
쉬는 시간이면 성이가 내 옆에 와 앉았다. 평소처럼 내가 음악을 듣고 있을 때면 그는 그냥 내 옆에서 책을 읽거나 제 워크맨을 꺼내 음악을 들었다. 운이 좋아 내가 아직 워크맨을 켜지 않았을 때에는 몇 마디 말을 걸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Delight가 담긴 테이프를 맨 앞으로 돌리며 간단히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처음에는 녀석이 귀찮기도 했다. 누군가와 목적 없는 대화를 하는 게 오랜만이어서 어색하기도 했던 데다가, Delight를 듣는 시간을 방해받는 게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일에는 금세 익숙해졌다. 점점 워크맨을 꺼내는 대신 그의 말을 듣는 일이 잦아졌고, 간혹 내가 먼저 말을 거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다 언젠가 내가 내 옆자리에 앉은 그에게 ‘왔어?’라고 물어주었을 때, 그는 말했다. 고마워. 그를 만나 두 번째 듣는 ‘고마워’였다. 그래서 나는 대답해주었다. 미친 놈. 그리고 웃었다.
나와 같이 지내게 된 이후로도 성이가 전국구 애들에게 돈을 뜯기고 다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그런 일에 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러나 쉬는 시간마다 우리는 같이 있었으므로, 적어도 보란 듯이 교실에서 전국구 애들에게 가벼운 구타를 당하는 일은 없어졌다. 성이의 표정도 점점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 녀석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다행이구나. 적어도 더 이상 녀석의 겁먹은 표정과 눈물이 고여 불안한 눈빛은 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