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트 바이 피치 볼(1)
성이의 눈 주위에 멍이 들어있었다. 누가 그랬는지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뻔한 일이니까. 집에서 맞았을 리는 없었다. 녀석의 집은 분명 화목할 테니까. 나는 그의 성격에서 어렵지 않게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녀석은 밝은 아이였다. 그 밝음은 선천적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특별한 것이었으며, 또한 단 한 번도 훼손되지 않은 것처럼 순수한 것이었다.
멍이 든 성이는 유난히 말이 없었다. 상당히 침울해 보였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아침부터 그의 멍 자국이 눈에 거슬렸지만, 때문에 조금 당황한 나는 함부로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점심시간, 잠시 볕을 쬐러 나왔을 때였다. 나는 거의 흘깃거리듯 조심스럽게 그의 멍자국을 살피며 물었다.
“언제 그런 거야?”
“아침에.”
깡통에 담긴 포도 맛 환타를 홀짝이던 성이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요즘도 계속 당하고 다니는 거야?”
“아니. 한 동안 뜸 했는데, 오늘 아침엔 마침 같은 버스를 탔지 뭐야. 그놈들 오늘따라 학교는 왜 그리도 빨리 나왔는지, 시간이 좀 남아서 잠깐 좀 끌려갔다왔어. 그동안 기분이 나빴나 봐. 너 새끼, 요즘은 아는 척도 안 하더라? 친구한테 그러면 되냐, 이러던데. 그래도 다행이야. 코를 맞았으면 코뼈가 주저앉았을 지도 모르잖아. 멍드는 건 그래도 좀 낫지.”
성이는 빈 깡통을 거꾸로 들어 남은 환타 몇 방울을 알뜰하게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내 몫의 깡통은 아직 3분의 1 정도가 차 있어 심심한 손으로 빙글빙글 머리를 잡고 돌리면 묵직하게 내용물이 출렁거렸다. 햇볕이 참 따뜻하다 못해 이제는 덥기까지 하고, 목도 조금 말랐는데, 나는 이상하게 환타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계속해서 빙글빙글, 아직 다 비워지지 않은 깡통의 머리 부분을 오른손에 쥐고 천천히 휘저을 뿐이었다.
녀석은 맞는 것에 퍽 익숙한 사람 같은 말투였다. 그가 언제부터 맞기 시작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원래가 그런 놈일 수도 있었고, 이곳에 와서부터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현재의 녀석은 솔직히 좀 맞고 다닐만한 타입이긴 했다. 몸은 척 보기에도 약해 빠졌고, 목소리는 여리고, 그래서 전체적으로 좀 여성스럽고, 게다가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고.
나는 녀석이 도대체 왜 조리과에 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칼질은 초반의 나보다도 형편없었고, 무슨 일을 하든 관심도, 성의도 없었다. 그저 시간을 떼우기 위해 하루하루 버텨내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야말로 공부를 못하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온 놈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 세계에서 요구하는 것을 어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가 무시당하고, 업신여겨지는 상황을 정당화하는 결정적인 빌미가 됐다. 당장 나라도 동료의식이 아니었다면 굳이 녀석과 가깝게 지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집에 갈 때, 같이 갈까?”
나는 말했다. 사실은 너 바보 아니냐, 진짜 벗어나고 싶으면 이젠 좀 강하게 나갈 줄도 알아야 되는 거 아니냐, 원래 그렇게 맞고 다니는 타입이냐, 대충 그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건 동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라면 또 모를까.
“그래주면 고맙고.”
성이가 대답했다. 그에게서 듣는 세 번째 고맙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표정이 상기되지 않아서인지,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어서인지, 왠지 그의 말은 이전까지의 고맙다는 말과는 달리 무성의하게 들렸다.
내 제안은 갑작스럽고,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원래 우리의 관계는 오직 학교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었다. 학교 밖에서는 서로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그런 반응에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화가 났다거나, 실망스러웠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좀 의아했다.
잠시 말이 없던 성이는 이미 텅텅 빈 깡통을 다시 입가로 가져갔다. 나는 가만히 그에게 내 남은 환타를 내밀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이런 때 그의 빈 깡통을 낚아채며, ‘이거나 처먹어, 병신아’ 따위의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이를테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그냥 말없이 환타를 건네주느냐가 친구냐, 동료냐를 결정하는 기준은 아닐까.
“고마워.”
그가 빈 깡통을 내려놓고 내 환타를 받아들며 말했다. 이번의 ‘고마워’는 왠지 앞의 ‘고맙고’보다 훨씬 진실하게 느껴졌다.
그날의 우리는 하루 종일 말이 없었다. 어김없이 쉬는 시간이면 녀석은 내 근처로 다가왔지만, 나는 내 워크맨으로 Delight를 들었고, 녀석은 녀석의 워크맨으로 다른 음악을 들었다. 왠지 어색했다. 그러나 뭔가 꼭 해야 하는데 차마 하지 못하는 말 한 마디를 숨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는 학교가 파하고도 계속되었다. 성이는 말없이 가방을 챙겨들고, 길을 걸었다. 나는 네 발짝 떨어진 뒤에서 그를 따라 걸었다. 버스 정류장에 닿을 때까지, 우리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몇 번 버스야?”
버스를 기다리는 성이의 옆에서 내가 물었다.
“그냥 지금 들어오는 저거 타면 돼.”
마침 정류장으로 들어오는 버스를 보며 성이가 대답했다.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서기 위해 인도 쪽으로 서서히 방향을 틀었다. 성이는 버스가 오는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나도 녀석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곧 버스를 기다리던 몇 명의 사람들이 우리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는 정류장에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이르게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맨 앞에 서있던 성이가 버스의 계단으로 올라섰다. 그때 누군가 급히 나와 성이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나를 앞질러 버스의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던 성이가 그의 어깨에 거칠게 밀려 제법 큰 소리를 내며 차문에 부딪쳤다.
나는 깜짝 놀라 성이에게 다가가려했다. 그러나 미처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네 명의 아이들이 내 앞으로 끼어들어 버스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차문에 몸을 기댄 성이의 어깨를 한 명씩 가볍게 밀치며 계단을 올랐다. 전국구 녀석들이었다.
“학생들, 조심해.”
기사 아저씨가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놀람이나, 화 따위의 감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간단한 한 마디. 그게 다였다. 성이는 잠시 차 밖으로 나와 정강이를 만졌다. 계단이나 차문에 부딪쳐 조금 다친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괜찮아?”
“어.”
녀석은 바로 허리를 일으키며 짧게 대답했다. 우리가 차문 앞에 잠시 정체된 사이 뒤에 늘어서 있던 몇 명의 사람들이 차례로 버스에 올랐다. 한 두 명 정도가 버스에 오르며 흘깃 성이를 돌아봤지만,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버스에 타자 성이도 다시 버스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그를 따라 버스에 올랐다.
버스 요금 함에 돈을 넣는데, 기사 아저씨가 잠시 우리 쪽을 바라봤다. 잔뜩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우리 때문에 시간이 지체된 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버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매끄럽게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