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트 바이 피치 볼(2)
버스 안에서 한 번 더 성이에게 괜찮은지 물었다. 굳은 표정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던 녀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목이 말랐다. 목마르지 않아? 내가 물었지만, 이번에는 고개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버스 계단에 부딪친 왼쪽 다리를 들어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몇 번 쓰다듬었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성이를 따라 걸었다. 녀석의 집까지 따라갈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느 지점에서 돌아서야할지 몰랐고, 어떤 말과 함께 돌아서야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아무튼 걸었다. 녀석이 뚜벅뚜벅 걷는 뒤를 터벅터벅 따랐다. 조금 지루했고, 심심했다. 큰 길을 조금 걷다가 안쪽으로 빠지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골목길은 초입부터 인적이 드물었다. 아직 개점 전의 호프집과 숨죽인 듯 문을 닫고 있는 구멍가게 두어 개가 간판을 내건 그곳은 조용하기만 했다.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자 이제는 아예 간판 단 건물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문을 굳게 잠근 대문이 드문드문 박힌 붉은 담장만이 쉼 없이 이어졌다. 생명체라고는 딱 우리 둘 뿐인 삭막한 미로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너울을 그리며, 바람이 불어와 볼을 스치며 지나갔다. 가볍고 짧은 바람이었다. 그런데 바람의 너울이 끝나는 지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바람의 끝에 매달린 묵직한 무언가가 귓불에 걸려 귓바퀴를 타고 귓구멍으로 흘러들었다. 자음과 모음이 빡빡하게 엉킨, 소리였다.
“야, 돌아이!”
경수, 그러니까 전국구의 짱이라는 녀석이었다. 전에 녀석의 목소리를 들은 적은 없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나는 잠시 어깨를 움찔했다. 그리고 천천히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면서, 나는 성이가 나보다 훨씬 빠르고 익숙한 동작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그의 표정은 그 익숙한 동작만큼이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익숙함, 일상적, 자연스러움이라는 단어들이 갖는 이미지를 무색하게 만들만큼 그 표정은 확실히 불편하고, 불안하고, 우울하기도 했다.
“나 부른 거냐?”
성이 녀석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말했다. 녀석이 그 표정으로 무엇이든 어떤 반응을 잇는 모습은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
“아, 돌아이가 둘이구나. 깜빡했다. 근데 넌 됐다. 우린 네 꼬붕한테 관심 있는 거니까 넌 웬만하면 빠져라.”
입술을 비죽이며 경수가 비웃었다. 숙성기간이 20년도 채 되지 않은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말이지 재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만큼 익숙하고,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웠다는 얘기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성이와 녀석의 관계를 가늠했다. 익숙하고,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두 사람의 표정만으로도 나는 성이의 지난 시간이 어땠을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정말 재수 없었겠구나. 그러고 어떻게 살았니.
“무슨 일인데? 나도 좀 알자.”
녀석의 비웃는 표정 뒤로 이어진 나머지 네 명의 키득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녀석을 따라 입술을 비죽였다. 그리고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마치 그것을 신호로 삼기라도 한 듯 경수를 비롯한 전국구 녀석들도 내 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와 녀석들 사이가 좁혀져갔다. 붉은 벽으로 둘러싸인 일방통행의 미로 속에서 마주친 다섯 마리의 까만 쥐와 두 마리의 하얀 쥐 사이에 긴장이 돌았다. 찍찍찍, 찍찍찍. 저희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위협의 소리를 흘리며 서서히 다가서는 쥐새끼들.
거의 얼굴이 마주칠 정도로 사이가 좁혀졌을 때에야 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서로를 노려봤다. 경수가 숨을 가다듬을 때마다 녀석의 재수 없는 입김이 내 얼굴로 훅 와 닿았다. 그러다 녀석이 유난히 강하고, 긴 날숨을 내뱉었다. 순간 그 숨이 거칠게 눈에 닿는 바람에 나는 나도 모르게 두 눈을 감으며 얼굴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경수의 어깨가 내 어깨를 밀쳤다.
“비켜.”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앞과 뒤, 흰 쥐의 세계와 까만 쥐의 세계, 내게는 너무도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그 두 공간 사이의 벽이 순식간에 붕괴되고 혼돈의 세계가 펼쳐졌다. 가슴이 뛰고, 머리에서 열기가 뿜어져나가는 것 같았으며, 손에 땀이 고였다. 나도 모르게 내 땀 고인 오른 손이 이제 막 옆을 비껴간 경수의 어깨를 잡아챘다.
녀석의 몸이 내 쪽으로 돌려졌다. 눈은 커져있었고, 인상은 일그러져있었다. ‘이제 시작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순간 숨이 멈춰졌다. 경수의 어깨를 잡아챈 손이 아직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공중에 떠 있었다. 그런데 공중에 떠 있는 손은 내 손만이 아니었다. 경수 녀석의 주먹이 돌아선 반동 그대로 숨을 멈춘 내 가슴으로 날아와 꽂혔다. 컥 소리와 함께 잠시 멈췄던 숨이 거칠게 목구멍을 후리며 튀어나왔고, 내 허리가 직각으로 굽어졌다.
그 다음에는 누군가 내 종아리를 세게 걷어찼고,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몇 개의 발길질과 주먹질이 내 몸을 덮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으므로, 나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몸을 웅크려 팔과 다리로 얼굴과 몸통을 겨우 방어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러다 문득 성이가 떠올랐다. 녀석은 어떻게 된 거지? 급히 녀석 쪽을 바라봤다. 녀석은 경수에게 뺨을 맞고 있었다. 한 대, 두 대, 세 대. 내가 본 것은 정확히 세 대였다. ‘짝, 짝, 짝’이라고 해야 할까, ‘쩍, 쩍, 쩍’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소리가 연이어 그의 왼쪽 볼에서 힘 있게 울려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전히 내 몸 위로 네 아이의 발길질과 주먹질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아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거의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성이를 향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경수 녀석을 향해 달려갔다. 네 명의 전국구 녀석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는지 미처 나를 제어하지 못했다. 내 몸은 단 네 걸음 만에 내가 낼 수 있는 최고 속력에 도달해 있었다. 그 속도 그대로 내 몸은 경수의 몸으로 날아들었다.
왼 팔로 정확하게 녀석의 목을 감싸 안은 채 강하게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충격이 컸는지 경수 녀석은 곧장 내게 반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흥분해있었고,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감각도 마비되어 있었다. ‘충격’이라는 물리학적 단어는 내 세계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 아플 리도 없었다. 오로지 멍한 진공 상태의 세계에서 모든 과학적 법칙을 무시하고, 내 몸은 거칠게 움직였다. 한 팔로는 계속해서 녀석의 목을 조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녀석의 머리를 잡아 계속해서 땅바닥에 찧어댔다.
그러는 사이 서서히 내 몸에도 감각이 돌아왔다. 약 1분 전 내 몸을 폭풍처럼 휩쓸었던 네 아이들의 주먹질과 발길질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거기에 누군가 내 몸을 사정없이 끌어당기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다시 전국구의 무차별 폭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 덕에 나는 더 이상 경수의 머리를 바닥에 찧을 수 없었다. 그러나 끝까지 녀석의 목을 감고 있는 팔 만큼은 풀지 않았다. 조금 전에는 악착같이 방어하던 얼굴도 이제는 무방비 상태가 되어 수차례 주먹을 받아내야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야, 저 돌아이 새끼 어떻게 좀 해봐. 씨발, 몰라, 저거 뭐야. 쿵, 쿵, 머리통이 울리는 중간 중간에 그렇게 전국구 녀석들이 당황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통쾌했다. 코가 아릿하다 못해 화끈거리고, 머리가 띵하고, 광대뼈가 쑤시는 대도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