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트 바이 피치 볼(3)
얼마 후, 결국 팔에 힘이 빠진 것인지 내 몸은 전국구 애들에게 이끌려 경수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러자 두 명의 전국구는 내 몸에서 손을 떼고 경수에게 다가갔다. 다른 한 명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경수에게 달려드려는 나를 제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명의 힘으로는 흥분한 나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경수를 보살피던 두 명 중 한 명이 수시로 몸을 돌려 나를 막아내야 했다. 컥컥 거리며 헛구역질을 하다 결국에는 속을 게워내기 시작한 경수와 그런 녀석에게 계속 달려드는 나를 계속해서 번갈아 상대해야했던 녀석은 어느새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경수를 제하고도 전국구는 네 명이었는데,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경수 쪽으로 달려들기 위해 한 녀석과 실랑이하는 와중에 흘깃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보고 말았다. 나머지 한 명의 전국구가 성이에게 바짓가랑이를 잡힌 채로 녀석의 등허리를 밟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성이가 그 사이 다른 녀석에게 맞고 있었다는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전국구 애들에게 나름대로 ‘대항’이란 걸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녀석의 그런 모습이 눈물겹다기보다 대견하게 느껴졌다. 누가 봐도 죽어라고 맞고 있는 쪽은 분명 녀석인데도 자꾸 그런 기분이 들었다.
대견한 성이를 구하기 위해 표적을 경수에서 성이를 밟고 있는 그 녀석으로 돌렸다. 갑자기 방향을 바꿔 달려가는 바람에 나를 제지하던 녀석은 순간 나를 놓쳐버렸다. 곧장 몸을 날려 성이를 밟고 있는 녀석을 밀쳐냈다.
그가 성이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땅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상태에서 나를 발견하고는 잔뜩 식겁한 표정으로 급히 몸을 일으켜 혼자 골목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따라 나머지 세 명의 전국구도 겨우 경수를 부축하며 골목 밖을 향해 도망쳤다.
그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자 슬슬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쫓는 대신 성이에게 다가갔다. 얼굴이 만신창이가 다 된 성이는 바닥에 큰 대자로 뻗어있었다.
“이겼다.”
피식 웃음소리와 함께 녀석의 입에서 여린 소리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글쎄, 이걸 이긴 거라고 할 수 있을까. 엉망이 된 녀석의 얼굴과 그제야 온 몸에 퍼지기 시작한 통증을 살피며 생각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이건 ‘히트 바이 피치 볼’ 같은 게 아닐까. 자신 있게 이겼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렇다고 진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도망친 건 전국구 녀석들이었고, 우리는 살아서 1루로 진루했다.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타석으로 쳐 주지도 않는, 타율에도 보탬이 안 되는 데드볼 따위라지만 우리에게는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괜찮냐?”
내가 물었다. 그러나 성이는 내 말에는 대답도 않고 계속해서 피식, 피식 하는 소리로 웃고만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도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겼다고 생각하자. 히트 바이 피치 볼이든, 안타든 살아나갔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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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해가 낮게 가라앉아 놀이터의 벤치에는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길쭉길쭉한 나무의 그림자 하나를 사이좋게 깔고 앉은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이제 막 테두리가 흐릿하니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해를 바라봤다.
“언제부터 맞고 다닌 거야? 하루 이틀 된 게 아닌 것 같던데.”
내가 물었다. 아무래도 녀석과 경수의 그 너무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표정과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부터. 직업반 오기 전에도 같은 학교였거든.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그때부터였어. 우리 집이 좀 살어. 거기다 나는 싸움도 못하지, 괴롭히고 돈 뜯기 딱 좋은 놈이었지, 뭐.”
성이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나도 녀석을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품이 전염된다는 얘기는 들어봤는데, 한숨도 전염성이 있는 걸까. 그 말에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지만, 한숨이 나올 정도는 아닌 것 같았는데.
아무튼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 우리는 다시 아무 말 없이 하늘만 바라봤다. 하루 종일 정체도 없이 머릿속을 떠돌던 어떤 말 한 마디가 가슴에 답답하게 박혀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내 한숨은 성이 녀석의 얘기 때문이 아니라, 내 가슴에 박힌 그 정체모를 말 한마디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거 너 할래?”
성이가 갑자기 가방을 뒤지더니 스틱형 입술 보호제 하나를 꺼냈다. 맞아서 입술이 터진 사람에게 입술 보호제라니, 조금 황당했다. 나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든 채로 성이에게 물었다.
“안 그래도 입술 터져서 아파 죽겠는데 이걸로 뭐 하라고? 그리고 좀 있음 여름인데 너는 아직도 이런 거 챙기냐?”
“그런 거 아니야. 한 번 열어봐.”
녀석의 말에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는 입술 보호제 대신 디스 한 개비가 들어있었다. 녀석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의아했다.
“너 담배 폈냐?”
“가끔. 일주일에 한 두 개 정도? 이거 내가 아껴둔 거야. 너 피우고 싶음 펴.”
“됐다. 아껴놓은 거 너나 해라. 난 담배 끊었어. 이따 집에 가는 길에 음료수나 하나 사던가. 너 돈 많다며.”
나는 다시 성이에게 입술 보호제로 가장한 담배를 돌려주며 말했다. 녀석은 또 한 번 씩 웃으며 조심스럽게 그것을 가방 깊숙이 챙겨 넣었다. 잠시 후, 가방을 닫은 녀석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고마워.”
“뭐가?”
“나 때문에 싸워줘서. 정말 고마워.”
정. 말. 고. 마. 워. 느릿느릿 이어지는 그의 말이 먼 곳의 종소리처럼 부드럽고, 은은하게 귓가로 다가왔다. 내가 들어본 그의 ‘고맙다’는 말 중 가장 진심어린 목소리였다.
문득 가슴이 뭉클했다. 그 뭉클함은 엉망이 된 몸뚱이 전체에 깊숙이 퍼진 통증 따위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갑자기 전에는 한 번도 유심히 본 적 없는 붉은 해가 아름답게 느껴질 만큼. 나는 잠시 그의 고맙다는 말에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했다. 내가 느낀 이 뭉클함의 무게에 견줄만한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됐어. 친구끼리 낯간지럽게 무슨…….”
잠시 생각한 끝에 나는 말했다. 그 말을 하고나자 정말 우리는 친구사이가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 동안 늘 우리는 동료라고 인식했왔지만, 이번은 달랐다. 친구라는 단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신기했다. 도대체 왜지?
“여태까지 날 위해 싸워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성이가 말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왜 이제 그를 친구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동료는 내가 맞지 않도록 도와주는 사람이고, 친구는 내가 맞고 있을 때 같이 맞아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도 대신 맞아줘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든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내가 말하며 웃었다. 사실은 고맙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상관없는 세계에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처음으로 만난 친구에게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조금 쑥스러워서 관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가 고맙다고 말할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다. 여린 소리로라도 나를 따라 기분 좋은 듯 웃는 녀석을 보니 그 정도까지만 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면 나나 녀석이나 조금은 어색해져서 그렇게 기분 좋게 웃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잘 된 건지 모르겠다. 오늘 일로 아예 우리 같은 애들 관심 끊어주면 고맙겠지만, 괜히 또 악에 받쳐서 그 새끼들 더 지랄하면 어떻게 하냐?”
성이의 어깨를 짚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심각한 질문이긴 한데, 전혀 심각하다거나, 어렵다거나, 곤란하다거나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냥 기분이 좋은 탓이었을 거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성이도 나와 비슷한 느낌인 모양이었다. 여전히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하는 품이 전혀 그 얘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자 나도 아무렴 어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서히 하늘에 몸뚱이를 풀어내기 시작한 해도, 놀이터에 어떤 땐 고인 듯, 어떤 땐 흐르는 듯 얌전히 흔들리는 바람도 참 좋은 저녁이었다.
그날의 싸움을 계기로 성이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제발 싸움만은 하지 말아달라던 어머니와는 잠시 사이가 안 좋아졌다. 그러나 다행히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실기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갖게 되면서 우리의 불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학교생활은 조금 편해졌다. 우리의 걱정과는 달리 그날 이후 전국구 애들은 성이나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어쩌다 학교에서 마주치면 말없이 노려보며 잠시 신경전을 벌이기는 했지만, 충돌은 없었다. 무서워서인지 더러워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녀석들이 더 이상 우리랑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대신 다른 녀석들도 우리를 전에 비해 더 심하게 따돌리기 시작했다. 무서워서든 더러워서든 어쨌든 우리는 피해야하는 똥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달라질 건 없었다. 어차피 전부터 우리는 따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