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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석 Oct 24. 2024

레드 콤플렉스 10화

붉은 옷만 입는 아이(1)

길이 있다. 붉은 길이다. 내 몸은 길을 걷고 있다. 실체가 느껴지지 않는 가로수들이 양  옆에 흐릿하게 늘어선 가운데, 나는 걷는다. 아니, 그것은 걷는다기보다 차라리 부유에 가까운 움직임이다. 붉은 지면과 그 위의 공간이 맞물리는 자리에서 내 몸은 미끄러지듯 길 끝을 향해 흐른다. 


그러다, 바람이 분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센 바람이다. 실체가 느껴지지 않던 가로수가 내 눈감은 세계의 바깥에서 무서운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거의 부서지듯 잎사귀를 부딪는 가로수. 귓불을 에듯 거친 바람에, 길에 평행하게 세운 몸이 앞으로 기운다. 심장이 뛰고, 다리가 휘청한다. 겨우 바람이 잠잠해지고, 나는 힘겹게 눈을 뜬다. 내 몸은 여전히 길 위에 있다. 조심스럽게, 걷는다-라기보다 미끄러지듯 길 끝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붉은 길이 아니다. 세계가 뒤집히기라도 한 것처럼, 붉은 길이 새하얘졌다. 가로수의 잎사귀로 생각되는 무언가가 길 위에 가득 쌓였다. 발자국을 새기듯 깊고, 또한 무겁게, 내 몸은 흰 길을 헤치며 나아간다. 


아직 아침이라 부르기에는 이른 시각, 잠에서 깨어났다. 쪽창이라 해도 좋을 만큼 작은 창으로 아무것도 넘어오지 않았다. 빛도, 소리도 먼 세계의 것처럼 아련해, 사위는 캄캄하고, 적막했다. 뭔가 알 수 없이 심사가 뒤숭숭해지는 꿈이었다. 어떤 사건도, 특별한 배경도, 내가 아닌 다른 등장인물도 없었다. 그저 나는 길 위를 걸으며 무력하게 흰빛으로 변하는 붉은 바닥을 바라보기만 했다. 


꿈에서 깨고 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아직 쉬 다가오지 못하는 아침처럼 잠은 내게서 멀게 느껴졌다. 갑자기 흰빛으로 뒤집힌 길 위에서 처음 눈을 뜬, 꿈 속의 그 기분이었다. 초조하고, 불안했다. 아직 걸음도 떼지 못한 길의 끝이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눅눅한 연기가 캄캄하고 적막한 공간을 그야말로 눅눅한 모양새로 가로질렀다. 담배 한 대를 미처 다 태우기도 전에 필터와 함께 씹어댄 아랫입술이 아릿했다.


몇 시간을 뜬 눈으로 누워있다가 결국 집을 나왔다. 조금 이른 시각이었다. 겨울잠을 자듯 집안에 틀어박혀 두어 달의 시간을 보내는 사이, 냉정하고 강한 바람은 조금 기세를 풀어 다시 제 모습을 찾고 있었다. 축구를 그만두던 그 무렵의 느낌으로 바람이 불고, 햇볕이 내렸다. 아직 따스하지는 않지만 온화하게 느껴지는 아침볕이 겨울의 끄트머리에 쌓인 눈 더미 위로 내려앉았다. 흰 길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눈이 부실 정도로 산뜻하고, 찬란한 빛이었다. 어디선가 실체 없는 가로수들이 쉴 새 없이 잎사귀를 부딪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가로수들의 실체는 빛의 나무였던 것일까. 뽀드득거리는 빛 조각들을 밟으며, 나는 걸었다. 꿈을 깬 뒤에 그랬던 것과는 달리 전혀 외롭거나 막막하지 않았다. 차라리 조금은 상쾌하고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시간은 많았다. 세계가 허락한 시간이었다. 세계가 허락한 시간 동안 세계의 길을 걷는다. 조금 낯설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기도 했다. 세계의 궤도에 이상 없이 안착했다는 사실이 실감 나는 것 같았다. 세계가 불허한 시간 동안, 땅 밑으로 숨어들어 세계와 상관없는 행로를 걷던 그때가 어느새 까마득한 옛날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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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세계에 들어서게 되었을 때,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의 인상이 그 세계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경우가 있다. 내 경우에는 창기가 그랬다. 녀석은 직업 반에서의 첫날, 내가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었다. 


교실 문 앞이었다. 누군가 급하게 교실 안으로 뛰어들다가 내 몸에 부딪혔다. 그는 주춤하던 몸을 돌려 짧게 사과하고는 다시 서둘러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조금 어려 보이는 얼굴에 옷차림이 수수하던 아이였다. 녀석은 몸이 교실 안으로 들어서자 그제야 잠시 두 발을 완전히 멈춰 심호흡한 후 차분히 걷기 시작했다. 아직 지각은 아니었다. 직업 반인 데다가 첫날이기도 하니까, 쪽지 시험 같은 게 있을 리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녀석이 왜 그렇게 서두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그 모습에 조금 긴장하게 됐다. 서두른다. 분주하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인상이었다. 내게 그 인상은 너무도 강렬해서, 마치 이 세계를 살아갈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룰처럼 느껴졌다. 


창기 녀석은 그 뒤로도 매일 비슷한 시각 학교에 왔다. 그리고 꼭 그렇게 다급하게 교실로 뛰어 들어왔다. 등교 때만 그런 게 아니었다. 매점에 갈 때도,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낼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늘 재빨리 그 일을 끝내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다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별로 급한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그는 늘 서둘렀고, 조급해했다. 원래 성격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가 그렇게 생활하기 시작한 것은 직업 반에 오기로 한 이후였다고 한다. 그는 직업 반으로 진로를 결정한 뒤로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저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자신의 길을 찾은 것뿐이었지만, 사람들은 누구도 그렇게 봐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작은 일에도 열심히,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스스로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듯했다. 


어머니는 말했다. 제발 싸움만은 하지 마라. 직업 반이라니까, 아무래도 문제아들이 많을 거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축구를 하면서, 나는 싸움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축구, 축구, 축구. 그게 지난 내 인생의 전부였다. 나름대로 성실한 생활이었다. 둘레 27인치에 무게는 450그램도 안 되는 작은 공에 모든 것을 걸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는 일도 거의 없었다. 


네. 그래서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머니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나 역시 조금 걱정스럽기는 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마음을 다잡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어쩌면 축구를 할 때보다 더 많은 어려움이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그곳에서의 첫날, 나는 어머니와 내가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 


사실 창기 녀석이 조금 유별난 편이긴 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른 아이들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다들 분주했고, 부지런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일반 학교 아이들 못지않게 열심히 공부했고, 어떤 면에서는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활기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먼바다로 떠내려온 섬과 같은 아이들이 무기력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던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사람은 나 하나뿐인 것 같았다. 어떤 이들에게서는 과감히 특별한 길을 선택한 자들만의 자부심 같은 것도 느껴졌다. 치열하고, 열정적이며, 진지하고, 성실한 이들이었다. 그것은 마치 축구공을 마주한 성실한 축구인과 같은 모습이었다. 


예상보다는 확실히 좋은 환경이었다. 분명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제 모든 것은 온전히 내게 달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지점에서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그곳은 불량과 무기력으로 짓눌린 ‘직업 반의 세계’가 아니라 성실과 열정으로 채워진 ‘조리의 세계’였다. 물론 성실과 열정이라면 축구도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리의 세계는 축구의 세계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래도 축구를 시작할 때의 내게는 ‘누구보다 빠른 발’이라는 확실히 믿을만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빠른 발은 아무 필요가 없었다. 탁월한 미각, 숙달된 기술, 기초적인 요리 상식, 그마저도 아니라면 맛있는 음식에 관한 관심이나 애정 같은 다들 한두 개씩은 갖고 있을 만한 믿을 구석이 내게는 없었다.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해서 칼을 갖고 노는 세계가 공을 갖고 노는 세계와 같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뭐야, 이건 흡사 깁스하고 축구를 하는 꼴이잖아. 생각보다 마주한 상황은 막막했다. 망망대해. 아직도 알 수 없는 어딘가로 흘러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게 직업반에 처음 발을 내디딘 내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불안하고 걱정스러웠으며, 다음으로는 약간 다행스러웠고, 그 뒤로는 당혹스럽고 막막했다. 새 길을 시작한 아들이 걱정스러웠던 어머니는 그런 내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다. 덕분에 미묘하게 내 얼굴에 스치는 감정의 변화를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잘 돼가니?”

좀처럼 말이 없는 어머니가 결국 말을 걸었다. 


“어느 정도는요.”

나는 대답했다. 


“별로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어머니가 말했다. 이번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나는 어머니의 다음 말을 기다렸고, 어머니는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각자 할 말을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이 정리된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직 실습은 안 들어갔다며. 그나마 다행이지. 얼마간이라도 시간이 생긴 거잖아. 그 사이 집에서 칼질이라도 연습해. 담배도 끊고. 담배 피우면 입맛이 둔해진다더라. 필기시험 준비야, 그래봐야 어쨌든 공부하기 싫어서 온 애들,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니. 조금만 열심히 하면 못 따라잡을 것도 없을 거야.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거 없어.”


‘그래봐야 어쨌든 공부하기 싫어서 온 애들’이라는 얘기는 틀린 말 같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래도 힘이 되는 얘기였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정말로 날마다 퇴근길에 도막 난 무나 당근 따위를 집에 가져왔다. 그녀가 일하는 식당에서 남은 음식 재료들이었다. 칼질이라도 자주 연습해. 어머니는 내게 그것들을 건넬 때마다 말했고, 나는 그때마다 ‘고마워요’라고 대답했다. 정말 고맙고, 조금 미안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처음에는 당장 기초 다지기만 해도 빠듯해서 다른 녀석들에게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혼자 필기시험 문제집을 풀고, 외웠고, 실기 시간에는 정해진 시간 내에 수행과제를 끝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필기시험에 합격해서 쉬는 시간에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을 때, 나는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부터 따라붙은 마루타라는 별명 탓도 있겠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내가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 나는 자연스럽게 따가 되어 있었다. 조리 과의 유일한 따였다. 하다못해 뒤에서 미친놈 소리 듣는 창기 녀석도 밥을 같이 먹고, 말을 주고받는 사람 몇쯤은 있었다. 그렇다고 놀랍거나 분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상항이 그럴 만하다 싶기도 했고, 한 번 세계에서 버림받은 적도 있었던 나로서는 그다지 놀라운 경험도 아니었다. 다만 조금 아쉽기는 했다. 여기서는 잘해보고 싶었는데, 결국 같은 신세인 건가. 이제는 필기시험 문제집도 치워버린 텅 빈 책상을 바라보며, 몇 번 정도 생각했다. 


차분하게, 담담하게. 혓바닥으로 입천장을 툭, 툭, 튕기며 생각하는데, 의외로 담담한 기분이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 그리고 지금 취해야 하는 것들 사이의 우선순위를 생각했을 때, 그 정도의 아쉬움은 작은 주변 요소에 불과해 보였다. 이곳에서 다시 잘해봐야겠다는 의지는 순간의 관계와 감정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준비와 그 성과에 대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 뒤로도 나는 여전히 다른 아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제는 실기 시간에도 혼자 힘으로 어렵지 않게 제한 시간 내에 과제를 완성할 수 있었다. 


필기시험을 통과했을 때, 어머니는 말했다. 이제 적응 좀 되나 보구나. 나는 생각했다.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사람일까, 원리일까. 그게 사람이라면 나는 적응하지 못한 게 분명했고, 원리라면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잘 적응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런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이제 조금 마음이 놓인 듯 보이는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먼바다를 흐르고 흘러, 섬은 새로운 육지를 발견했지만, 끝내 육지의 일부가 되지 못하고 연안을 지키는 섬으로 남았다. 그나마 더 이상 떠돌지 않는 게 어디야. 적어도 행정구역상으로는 육지의 관할구역에 소속된 섬 하나가, 푸른 물결 위에 서서 물안개 너머의 육지를 건너보며 생각했다. 육지와의 거리를 유지해주는 물결은 파고가 높지 않아 안락하게 느껴졌다. 이 정도라면, 굳이 육지에 닿기 위해 애쓸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생각했다. 


가방에서 워크맨을 꺼내 무릎 위에 올렸다. 그리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불친절한 워크맨의 털털거리는 소리가 몇 초 정도 지나고, 섬을 고립시키는 파도 같은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감았다. 현을 울려 일으키는 파도 소리가 더욱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터......ㄹ썩, 터......ㄹ썩, 턱, 쏴......아. 터......ㄹ썩, 터......ㄹ썩, 턱, 쏴......아.? 분명히 그렇게 들렸다. ‘철썩, 철썩, 척, 쏴’가 아니었다. 경쾌하고, 산뜻한 소리가 아니라 느릿하고, 약간 지루한 소리였다. 눈을 감아서 아련하게 들리는 게 아니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배터리가 떨어져 가는 소리임이 확실해졌다. 중고로 산 구형 워크맨이어서인지 산 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았는데 눈에 띄게 배터리 잡아먹는 속도가 빨라졌다. 


눈을 뜨고, 워크맨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배터리를 갈아 끼우기 위해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러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 옆자리에서 누군가가 턱에 손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이라는 녀석이었다. 그냥 할 일이 없어서 저러나보다, 생각하며 이어서 가방을 뒤져 배터리를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녀석이 내게 말을 걸었다. 


“넌 어떤 음악을 듣니?”


멈칫하며 녀석을 바라봤다. 이전까지는 누구라도 쉬는 시간에 내 근처로 다가온 적이 없었다. 하물며 수업과 관련된 일 같은 특별한 용건도 없이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놀랐다. 대체 이 녀석은 왜 여기 있는 거지? 왜 나한테 말을 거는 거지? 혹시 다른 사람한테 하는 말은 아닐까? 하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녀석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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