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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Apr 20. 2021

청명(淸明), 날이 좋으니 사람 심으러 나가자꾸나

절기의 일기, 청명(淸明)


  24절기의 다섯 번째 절기, 청명(淸明). 날이 화창하고 좋아 나무를 심는 즈음이다. 꽃이 만발하여 봄의 기운이 완연한 시절이다. 내 인생 삼십 년째 되던 해의 청명, 뜻하지 않은 중국행으로 '사람' 나무를 심게 되었다. 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을, 소중한 인연을 심은 것이다.


청명






  2월부터 일을 시작했으니, 4월이면 수습이 채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직장과 대학원 3학기 차로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3월 마지막 주 수업 중 쉬는 시간에 교수님이 잠시 부르셨다. 종이를 내밀며 '한 번 생각해 봐, 좋은 기회인 것 같아'라고 하신다. 여성가족부에서 주최하는 한중 청소년 교류단 통역 모집 요강이었다. 교수님께서 추천 제의를 받으시고 내게 건네셨다. 

  선배들은 남녀 할 것 없이 가정을 꾸렸다. 동기들도 한 가정의 가장들이고, 나를 제외한 여자 동기는 대만 교환학생 중이었다. 나 말고는 적임자가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너무 가고 싶었다. 정부기관 행사에 8일 동안 베이징-창사(長沙)를 개인비용 없이 갈 수 있다니! 기회였다. 무조건 가야만 했다. 앞뒤 생각 않고 교수님께 추천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앞뒤 정도는 생각해야 했다. 나는 직장인이었다. 그것도 수습 과정이었다. 수습 주제 8일이나 자리를 비우는 건, 내가 생각해도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중국은 무조건 가야 했다. 몇 날 며칠을 끙끙 앓다가 비자발급신청서를 받은 날, 사무실에서 일도 안 하고 장장 A4 4장에 달하는 '사장님 설득서'를 작성했다. 

비록 수습 과정 중이지만, 중국 통역 경험으로 현 중국 경제 상황을 체감하고 오는 것이 우리 회사의 앞날에 무궁한 도움이 될 것이다, 정부 기관 파견이라 그곳에서 얻는 인재는 나 개인뿐 아니라 회사에도 막대한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무급으로 8일을 다녀오고자 하니 부디 좋은 판단을 내려 주시길 바란다, 

  는 말도 안 되는 말을 그럴싸하게 쓰기 위해 점심시간을 바쳤다.

  퇴근시간이 다가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사장님의 책상 위에 네 장을 순서대로 펼쳐 두고 나왔다. 회사 입구부터 지하철역까지 괜히 뛰었다. 사장님이 '너 거기 서, 해고야'라고 하기 전에 지하철역 계단으로 숨듯이 뛰어내려 갔다. 폰은 울리지 않았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폰을 쥔 손에 땀이 났다. 후회와 기대와 설렘이 피에 섞여 2심실2심방을 왔다 갔다 했다. 내 앞에 길은 두 갈래뿐이었다. 즐겁게 중국에 다녀오거나, 회사에서 잘리는 것. '사장님'이라고 발신이 뜬 전화가 울린다. 내 인생사에 길이 남을 순간이었다. 여보세요.

  "잘 갔다 와. 회사 걱정하지 말고."

  감사합니다,를 28번 정도 쉬지 않고 말한 것 같다. 사장님 배에 담으신 건 거대한 인덕이었군요,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지하철 칸칸이 돌아다니며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 사장님이 최고라고 알리고 싶었다. 일주일 후, 나는 '여성가족부-공산주의청년단 주최 한중 청소년 교류단 집합'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린 숙소 앞에 도착했다. 청명 즈음이었다.






  전국 각지의 중국 관련 전공 대학생들이 50여 명이 모였다. 몇 번의 면접을 통과해 뽑혔다는 말을 듣고 보니 괜스레 더 똘똘해 보였다. 그래, 좋을 때지. 무엇이든 꿈꿀 수 있고 그만큼 불안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때이지. 중국어 관련 친구들은 우리 통역단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통역단은 나를 포함해 세 명이었다. 다섯 살 많은 언니는 박사 논문 중이었고, 두 살 어린 동생은 석사 과정 중이었다. 둘 다 중국어 석박사였고, 나만 국제정치학이었다. 나의 중국어 실력이 제일 부족할 거란 직감이 들었다.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한편으로 중국어 석박사가 아닌 내가 통역단에 들게 되어 감사한 생각도 들었다. 집행단에는 우리 외에 여성가족부 직원 3명과 영상 담당이 있었고 외교부 소속 청소년 교류를 맡고 있는 친구가 있었다. 여가부 직원들은 함께 방을 쓰고 영상 담당은 우리와 방을 썼다. 외교부 친구는 유일하게 혼자 방을 썼다.


  베이징행 비행기는 난기류가 심했다. 비행기를 타고 구토가 난 건 처음이었다. 중국은 몇 번을 가봤지만, 베이징을 간 적은 없었다. 중국의 심장 베이징을 통역단으로 가게 되다니, 생각할수록 꿈만 같았다. 자금성(紫禁城)과 천단(天壇) 같은 세계적인 장소를 둘러보고, 맛있는 음식만 먹었다. 날씨가 좋아 더 행복했던 여정이었다. 거슬리는 단 하나만 빼면 모든 것이 좋았다, 혼자 고고한 척하는 외교부 친구만 뺀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처럼 보이는 것만 걸쳤다. 우리 교류단에서 늘 혼자였지만, 혼자여도 모두는 그녀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집행 단과 대학생들 모두가 그녀를 흘끔흘끔 보았고, 가끔 객기 부리는 남자 대학생 친구들이 말을 걸면 쿨하게 대답하던 그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외교부. 얼마나 증오하던 단어이던가. 내가 가닿을 수 없어 질투의 마음만 꽉 채워 바라보던 곳, 외교부. 언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이들이 호기롭게 장래희망으로 말하는 양대산맥이 있다. 외교부와 코트라(KOTRA). 언어과 정치를 접목하면 외교부로 향하고, 언어와 경제를 합하면 한국 무역공사로 향하게 된다. 그래서 언어학 전공자들의 대부분은 무역학과를 이중전공으로 한다. 반드시 코트라가 아니어도, 무역 관련으로 취업이 쉬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기자가 되기 위해 정치학을 복수 전공했지만, '혹시 외교부?!'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포기가 빨라 다행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목말랐던 곳이었다.



  관광지 입장을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어느 대학생이 내 뒤에 선 외교부 친구에게 질문하는 걸 엿들었다.

  "누나, 어떻게 하면 외교부 들어갈 수 있어요?"

  "야, 외교부 별 거 없어. 그냥 공무원이야. 오지 마."

  총천연의 재수 없음이 찬란히 빛났다. 돌아보았다. 얄미운 입이 어찌 생겼는지 보아야만 했다. 다 가진 자가 되면 저렇게 재수 없어질 수 있나 보다 싶었다. 베이징에서의 여정 내내 그녀에 대한 시기심과 호기심이 함께 커졌다.





  창사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그녀는 내 옆에 탔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살짝 잠이 들었는데, 입을 벌리고 잤다. 외교부 직원도 입 벌리고 자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창사는 마오쩌둥(毛澤東)이 태어난 지역이다. 일정 중에 마오쩌둥 생가 방문이 있었다. 엄청난 마오쩌둥 동상을 앞에 두고 사진을 찍을 때, 비가 사정없이 내리쳤다. 사진 촬영 시간이 유난히 더 길게 느껴졌다. '중국 놈들, 공산당 주최 행사니 이건 무조건 잘 찍어야겠지'. 촬영이 끝나고 화장실로 들어가 비에 젖은 옷을 닦고 메이크업을 고치는 데, 외교부 친구가 거울을 보며 내 옆에 선다.

  "통역단은 즐거워 보여요."

  처음으로 말을 걸어왔다. '아.. 네. 재미있어요'라는 대답의 끝에 뜻 모를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제야 생각해 보았다. 8일의 일정 중 그녀는 4일을 넘게 늘 혼자였다. 혼자 방을 쓰고 혼자 밥을 먹었다. 가끔 대학생들과 농담을 주고받을 뿐 그녀 곁에 누군가 함께 있었던 장면이 떠오르지 않았다. 외로웠던 것이다.

  그날 점심식사 시간 나는 일부러 그녀를 찾았다.

  "이리 와요, 같이 먹어요."

  그래도 되나요,라고 묻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동그란 식탁에 한 명이 더 늘었다. 이름이 뭐예요,부터 물었다. 일정의 절반이 넘어가서야 '외교부 왕재수'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소희는 금수저였다. 뉴욕대에서 석사를 하고 외교부 특별채용으로 들어갔다. 무엇보다, 나와 동갑이었다. 그녀의 패션이나 언행 때문에 세네 살은 많을 줄 알았다. 나의 못난 감정 -시기, 질투 같은-들은 그녀를 미워하도록 하게 했지만, 마음에 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문으로 호기심과 '친해지고 싶은 감정'이 물 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좀 있다 밤에 우리 방 놀러 와."

  진심이었다. 며칠 남지 않은 일정 동안 열심히 친해지고 싶었다. 그동안 혼자였던 그녀를 그렇게 혼자 이도록 방치한 것이, 그러면서도 미워하기만 한 내 마음에 대한 속죄의 의미도 있었다. 소희는 기뻐했다. 나 진짜 놀러 간다, 어느새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편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날부터 3일 연속 밤마다 소희는 통역단 방문을 두드렸다. 맥주캔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다 같이 자기도 했다. 지난 연애와 썸남과 전공 공부의 어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끝이 없었다. 외교부 파견과 통역단 같은 건 처음부터 없는 것처럼 놀았다. 밤을 새워서 놀고 아침에 허겁지겁 통역 준비를 했다. 버스에서 조금씩 자고 밤이면 어김없이 깔깔댔다.

  마지막 날 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모이게 된 거지' 이런 수다를 떨다가 중국 공산당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의 밤이었다. 그때의 나는 중국 정치학 석사생이었다. 지난 1년간 중국 정치에 빠져 있었다. 거의 두 시간에 달하는 강의가 이어졌다. 중국 근현대사를 정치인과 엮어 특강을 펼쳤다. 지금이야 그저 배 나온 애셋 엄마이지만 당시는 불타는 정치학도였다. 와, 와하며 듣던 소희는 나의 연설 끝에 박수를 쳐줬다.

  "와, 이렇게 재미있는 정치 이야기는 처음 들어 봐. 너 진짜 최고다! 한국 가도 나 계속 만나줘야 돼."

  외교부 친구에게 받는 박수라니. 그 도도하던 친구에게 칭찬을 받다니. 우리가 이렇게까지 친해지다니. 일정 초반 4-5일을 미워하기만 하며 날려 먹은 것이 억울해서라도 더 친해져야 했다. 그렇게 떠오르는 아침을 함께 맞이하며 마지막 밤을 보냈다.






  결혼을 하고 난 후는 그 전처럼 자주는 만나지 못한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백탕홍탕 훠궈(火鍋)를 앞에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외교부를 그만두고 동아시아재단과 지금의 인권위원회로 여러 직장을 거치는 모든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소희 역시 나의 연애와 결혼을 응원하고 함께해 주었다. 결혼식 때에도 몇몇 교류단 대학생 친구들과 함께 와주었다. 2018년 세종 방문했을 때 보고 만나지 못하고 있다. 작년에 부산에서 결혼식을 올린 친구를, 코로나와 육아 때문에 지켜보지 못했다. 그래도 늘 고마워하고 응원하고 힘이 되어주고 지켜봐 주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다시없을 우정의 깊이를 확인하며.


  통역단을 지원할 때만 해도 내가 얻고자 했던 것은 '경험'과 이직 때 추가할 '한 줄 이력'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차라리 미천한 것이었다. 나는 4월의 청명한 하늘 아래, 가장 커다란 것을 얻었다. 소중한 인연, 친구, 우정 이런 단어와 관계 깊은 것,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유년의 가정환경과 직업 같은 것은 문제 되지 못했다. 특별한 장소와 시간을 함께한 경험은 우리를 더할 나위 없는 친구로 만들어 주었다. 서로에 대한 진심과 존경이 우리 마음속 깊이 이어져 있다. 이 우정의 유통기한은 '영원'임을 확신한다.


  청명(淸明), 사람을 만나 마음속에 심고 가꾸기 좋은 때이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날이 좋으니 사람 심으러 나가봐야겠다.




0으로 끝나는 날마다 절기의 일기를 써보려 합니다.

입춘과 입하를 지나 입추와 입동에 이르는 찰나의 순간들, 그 틈새에 끼워져 있던 이야기를 펼쳐 보려 합니다. 퀴퀴한 냄새를 털어내고 빛바랜 장면을 손으로 쓸어내다 보면, 무기력을 벗어난 진짜 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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