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의 일기, 춘분(春分)
봄의 온도와 봄의 기운과 봄의 향기가 가득한 절기의 이름, 춘분(春分).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의미도 당연히 포함하고 있는 듯한 이름이다. 그랬다. 나의 청춘의 시작, 스무 살의 시작이었던 춘분에 제대로 깨어난 것이다. 눌러왔던 춤의 본능, 그것을 감추지 못한 세포의 리듬, 그리고 '열정'의 감각이.
고등학교 때 동아리를 두 개를 했다. 문학과 댄스 동아리. 서로 극과 극에 위치하고 있는 이 두 가지 요소는 놀랍게도 내 안에 다 내재되어 있다. 사실 놀라울 건 없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안에 사통팔달의 방향으로 뻗어대는 재능과 요소를 가지고 있을 뿐, 그것이 발현되는 시기와 장소가 다를 뿐이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이 두 가지를 모두 좋아했고 표출해 내고 싶어 했다.
댄스 동아리는 공식적인 동아리는 아니었다. 나와 춤추기 좋아하는 두 명의 친구들이 수업 끝나고 시간 될 때마다 연습을 하는 게 전부였다. 그 당시 즐겨 추던 춤은 3인조 여성그룹 '디바'의 노래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두 명은 금방 습득해서 진도도 빨랐고 춤 선도 예뻤다. 나는 계속 연습을 해도 그들을 따라가지 못했고, 두 친구는 번갈아가며 나에게 동작을 가르쳐 주고 교정해 주었다. 성적에서는 내가 가장 앞섰으나 춤 연습 시간만큼은 나는 절대적인 열등아였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했다. 열심히 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중간고사를 얼마 앞둔 시점부터 우리는 춤 연습을 쉬었다. 시험 끝나고 다시 하자, 라는 말을 마음 밑바닥에 깔고 시험 준비를 했다. 그리고는 잊었다. 시험이 끝나고 한 달 후에 축제가 있어서 문학 동아리의 시화전과 문집, 시낭송 준비에 바빴기 때문이었다. 축제날은 다가왔고, 오전과 오후 일정은 무난히 흘러갔다. 시화전과 시낭송은 늘 그렇듯 인기가 없었다. 몇몇 친구들만 방명록에 이름을 남겨 주었을 뿐이었다. 작년보단 3명 더 왔네, 하며 우리끼리 자축을 했고, 곧 저녁 공연이 시작되었다. 저녁 공연이라고 해 봤자 리코더부와 합창단 공연이 전부였다.
갑자기 사회자가 '특별 무대'가 준비되었다고 했다. 다들 기대에 찬 가슴으로 정면 무대를 보았다. 혹시 남고 아이들이 오는 건가, 남자 선생님들이 재미있는 걸 보여주는 건가, 이게 무어라고 이렇게 가슴이 뛰지.
멜빵바지를 입은 나의 댄스 친구 두 명이 두건을 푹 눌러쓰고 무대에 올랐다. 내가 많이 들어온 '디바'의 노래가 흘렀다. 나도 아는 그 춤을, 두 친구는 연습 때보다 더 완벽하고 멋있게 추었다. 그다음 곡은 나는 모르는 노래였다. 역시나 멋있었다. 나를 제외한 전교의 친구들은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쳤다. 팔짱 낀 선생님들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도 올랐어야 할 무대였다. 나 혼자만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는 중에 무대가 끝났다. '앙코르, 앙코르' 소리가 운동장을 덮었고 '디바'가 아닌 다른 그룹의 노래가 나왔다. 혼자 조용히 화장실로 갔다. 춤이나 추다가 대학 못 가라, 평생 춤이나 추면 잘 나가봤자 백댄서겠지, 라며 세상의 모든 어둡고 습습한 저주를 화장실 변기를 보며 퍼붓고 있었다. 울었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단지 손톱을 잡아당기다가 피가 나서, 손을 씻으며 운동장의 음악 소리와 함성 소리가 멈추기만을 기다렸던 것은 기억난다. 그리고 다짐했다. 대학 가서 반드시 댄스동아리에 들어갈 것이라고, 그러기 위해 나는 꼭 원하는 대학에 갈 것이라고. 그때부터 나에게 대학은, 공식적으로 춤을 추기 위한 곳의 이미지가 더해졌다.
다행이었다. 댄스동아리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오리엔테이션 날 본 중어과 치어단의 모습에 나는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나는 치어를 하기 위해 태어났고 20년의 시간을 거쳐 이곳에 온 것이었다. '디바' 따위 유치원 학예회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이 것이 바로 스무 살의 풍경이고 향기지.
입학식 날부터 치어 짱 오빠만 쫓아다녔다. 오디션 날이 언제예요, 저 꼭 뽑아 주셔야 해요, 치어 너무너무 하고 싶어요, 이름은 김진샤라고 해요, 잊으시면 안 돼요. 치어 짱은 단호했다. 오디션 보고 결정할 거야. 중국어는 이미 저 멀리 있었다. 하루하루 치어만 생각하고 치어 단원 언니 오빠들이 지나가면 저 멀리서도 뛰어가서 90도 인사를 하곤 했다. 무조건 치어를 해야만 했다.
춘분을 며칠 앞두고, 1학년 수업이 끝난 뒤 치어 짱 남녀 선배님들이 강의실에 들어왔다.
"공지사항, 1학년 전원 오늘 5시 전강으로 집합. 열외 없이 치어 오디션 볼 예정이다."
드디어 시작이었다. 모두에게 간단한 한 동작을 10분간 가르쳐 주고 바로 테스트에 들어갔다. 다행히 나의 몸은 리듬감을 잃지 않은 상태였다. 이튿날 대자보에 남자 7명, 여자 7명의 1학년 신입 치어단의 이름이 붙었고, 그날은 내게 있어 고등학생 시절 '디바'가 드리웠던 그늘이 완전히 가신 날이 되었다. 저녁부터 나는 매일 저녁 운동장과 전강(중국어 전용 강의실)에서 살게 되었다.
5시 반부터 6시까지는 대운동장 달리기였다. 철도 씹어먹는다는 20살이었기에 30분은 10바퀴를 돌기에 충분하고 남아도는 시간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불가능한 기록이지만, 그때는 매일 그렇게 뛰었다. 순전히 '체력 증진'이 목적이었다.
6시부터 9시까지 전용 강의실은 땀냄새로 가득했다. 쉬는 시간은 저녁식사 대용이었던 '오예ㅅ' 두 개를 먹는 10분뿐이었다. 앰프에서 터져 나오는 음악소리와 헉헉대는 숨소리, '정신 안 차려', '줄 맞춰', '똑바로 해', '팔 뻗어', '다리 올려'같은 고함소리만 가득했다. '연대 책임'이라는 단어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치어 연습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면 새벽 2시까지 숙제를 하고 뽀포모포 성조 연습을 했다. 새벽에 중국어 발음 연습이 시끄럽다고 옆방에서 항의가 들어온 다음날부터는 공용화장실로 가서 연습을 했다. 무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면 온 몸의 근육은 파업에 들어가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할 정도였지만, 5시 반이 되면 어김없이 운동장을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달을 꽉 채웠다.
5월, 체육대회의 날이 왔다. 체육대회의 꽃 치어리딩, 우리 과는 영어과에 져서 2등을 했다. 회식에서 선배 10명과 1학년 14명은 밤을 새워서 울었다. 영어과 치어 짱 새끼가 얼마나 간사한 놈인지에 대해 반복해서 들었다. 안무와 동선을 짜고 의상을 맞추는 고단함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치어 짱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새벽 즈음 새로운 치어 짱 발표가 있었다. 여자 치어 짱으로, 그 누구도 M이 되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수원에서 유명한 춤 짱이었고 키도 크고 늘씬했다. 동작을 한 번 보면 바로 익혀서 늘 우리 동기들을 가르쳐 주었다. 나 역시 손뼉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명된 여자 치어 짱 이름은, 그 친구의 성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김. 진. 샤!"
그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토요일이었던 다음날 2시에 기숙사에서 눈을 떴고, 폰을 열어 보니 축하 문자가 정확히 114개가 와 있었다. 여자 치어 짱언니에게 전화했다.
"언니, 왜 저를 뽑았어요?"
"너처럼 열정적이고 치어를 좋아하는 애가 짱을 해야 해. 동작은 연습하면 다 잘할 수 있어. 그런데 열정은 그런 게 아니거든. 열정은 배우거나 연습하는 게 아니야. 원래 갖고 있어야 해."
다음 해 춘분 즈음에 나는 똑같이 남자 7명, 여자 7명의 신입 치어단을 뽑았다. 우리의 입장곡은 '아오치 미엔 뚜이 황 총랑(傲氣面對萬重浪)'으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황비홍의 오프닝 '남아당자강(男兒當自强)'이었다. 붉은 깃발을 휘두르는 깃발단도 구성하였다. 입장부터 무조건 영어과를 압도해야 했다. 영어과를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는 중어과 치어의 역사를 바꾸어보고 싶었다.
M은 최고의 조력자가 되어 주었다. 패션 센스라고는 바닥인 나를 위해, 직접 동대문을 뛰며 의상을 책임져 주었다. 덕분에 별이 가슴에 놓인 멋진 의상을 준비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뻔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거쳐야 했던 '그대에게'가 우리의 메인곡이었다. 그해는 외대 단대 체육대회 역사상 처음으로, 영어과와 중어과가 공동 1등을 한 해가 되었다.
돌이켜 보면, 내 안의 열정은 마른 나뭇가지로 가슴속 어딘가 놓여있었던 것 같다. '치어'라는 불이 붙어 나뭇가지는 비로소 뜨겁게 타오를 수 있었다. 그 후 내 마음속 '열정'의 나뭇가지는 장작으로 쌓이게 되었고, 외부의 불이 들어오기만 하면 장작더미는 쉽게 타올랐다.
기자를 준비할 때는 하루 네다섯 시간씩 신문을 보며 세 개의 전공을 이수했다. 종교철학을 공부할 때는 '나'라는 존재의 끝에 가닿아 보고 싶어 '만 배의 기적'에 몸을 실었다. 야구팀을 응원할 땐 며칠 밤을 새우며 패인을 분석하고 논쟁을 펼쳤다. 내 20대의 다른 말은 '열정'이었다.
30대에 들어서 결혼을 하고 연달아 아이를 낳고 키웠다. 열정 같은 건 근방 100m 어디에도 없었다. 우울과 눈물과 절망 같은 단어들이 발목과 엉덩이에 덕지덕지 붙어 일상을 가라앉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메마른 나뭇가지를 찾기 시작했다. '글쓰기'라는 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열정은 잠시 길을 잃었을 뿐, '나'라는 랜드마크를 찾자마자 어렵지 않게 돌아왔다. 타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올해의 춘분 즈음 막내는 어린이집 적응을 마쳤다. 운동과 시 필사와 외국어, 그리고 글쓰기가 요즈음 내 열정의 좋은 땔감이 되고 있다.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열정(熱情)의 뜨거움이 나의 일상과 아이들에 대한 마음의 온도도 동시에 높이고 있다. 20여 년 전 춘분 즈음 '치어'로 점화되었던 열정이 올해 재점화된 것이다. 이 봄이 유난히 뜨겁게 느껴지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