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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Mar 20. 2021

우수(雨水), 빗물처럼 흘러내린

절기의 일기, 우수

  

  우수, 는 '빗물'이라는 본연의 뜻보다 절기상 '눈이 녹아 물이 된다'는 의미가 짙다. 그만큼 날이 풀리는 때이다. 입춘이 한겨울의 중심같이 느껴져도 보름 정도 지난 우수가 되면 바람이 확연히 다르다. 입춘을 덮은 눈도 사실상 보이지 않는다. 거의 다 녹기 때문이다. 입춘이 가짜 봄이라면, 우수는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다리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까. 우수는 눈이 녹아 물이 되는 시절이고, 나에게는 눈에서 물이 나온 시절이다. 그렇다, 참으로 보편적이고도 시시한 첫사랑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 시절이다.


 

우수





  나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은, 방송인 '박상원' 씨에게서 처음 느꼈다. 무려 8살이었다. 어느 건강식품 광고였는데, 특유의 젠틀함이 있었다.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서울방송(SBS)을 볼 수 없었는데, 그때 방송하던 '모래시계'를 보게 되었다면 아마 어린 극성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최민수 씨의 극성팬으로 돌아섰을지도 모른다) 그 후에는 같은 반 남자애였으나, 워낙에 인기가 많은 아이였고 여자 친구가 있었다.(겨우 4학년짜리들이 못하는 게 없다) 그래서 2주 동안 짝을 해본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아이였다. 그 후엔 여중 여고를 다녀서 '남자'와 얽힐 일이 없었다. 6년간 내가 접한 남자라곤 아빠와 동생, 학교 선생님들 뿐이었다. 그래서 스무 살이 되어서도, 동기 남자아이들의 눈을 보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한 학기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겨우 남자애들과 말 좀 트기 시작할 때 여름 방학도 시작되었다.


  여름방학이 끝나자마자 '외대 신입생 모꼬지'가 기획되었다. 6개 외대 신입생들만 모이는 MT였다. 각 과 집행부가 모여서 기획했고, 중어과 부대과(표)였지만 과대가 반수 한다고 등록을 안 해서 실질적인 과대였던 나는 혼자 기획단이 되었다. 과대, 부대과 두 명이 참여했던 다른 과와 달리 과대가 없었던 우리 과는 나만 혼자여서 외로웠다. 그래도 이래저래 얼굴 보던 친구들이라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그중에 독어과 과대는 낯설었다. 어라, 저런 친구가 있었던가. 첫 회의 내내 너무나도 거슬렸다. 자세도 삐딱하고 말투도 툴툴대고 계속 '이런 거 해야 해?' 라며 줄곧 부정적인 태도였다. 원래 잘 화내지 않는 나인데 그날 그 아이에게만큼은 제대로 화를 냈다. '그럴 거면 오지 마'라는 내 말에 '나오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며 받아쳤지만, 성격 좋은 불어과 과대가 말리는 바람에 더는 싸움이 커지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못생겼다. 그나마 정말 후하게 쳐줘서 '못생긴 성시경' 느낌인데, 피부도 여드름 투성이에 성시경이 이 글을 보고 그 아이를 본다면 나를 고소할 수준으로 못생겼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못 생긴 게 성격까지 별로였다. 그 아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툴툴거리면서도 다음 회의도, 그다음 회의도 나왔다. 그리고 삐딱하게 앉아도 적절한 타이밍에 꽤 괜찮은 아이디어를 냈다. 그 아이 의견에 딴죽을 걸고 싶어도, 너무 괜찮은 의견들이라 그러지 못했다. '괜히 과대가 아니긴 하네' 생각하며 그 아이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세 번째 모임에, 비상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쭉 훑어보다가 독어과 과대 전화번호에서 멈칫, 했다. 이상했다. 연락할 일은 절대 없는데, 이 번호를 갖고 있으면 어쩐지 연락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조금 고민하다가 그 아이 번호 부분을 찢어서 버렸다.

  그 당시 친한 친구가 CC(캠퍼스 커플)였다. 수업도 안 나오고 오빠에 빠져 있었다. 그 친구를 보면서 '연애는 절대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초등학교부터 품었던 '기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선 잠을 줄이며 노력해야 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남자고 연애임을 그 친구로부터 배웠다. 남자는 대학 생활 기피 대상 1호였다. 신경 쓰이는 아이라면 신경 쓰이지 않게 내가 컨트롤해야 한다. 그래서 찢어 버린 그 아이 번호가, 자꾸 거슬렸다. 번호만 갖고 있고, 연락을 안 하면 되지. 그날 밤 쓰레기통을 다시 열어 보았으나, 이미 룸메이트 언니가 쓰레기통을 비운 뒤였다.

  모꼬지를 준비하는 내내 신경 쓰였다. 키가 커서, 매점을 갈 때마다 키 큰 사람은 자꾸 한 번 더 보게 되었다. 그렇게 늦여름을 보내고 모꼬지는 다행히 잘 끝났다. 이제 저 아이는 신경 쓸 일이 없는 건가, 이 기분은 시원한 건가 아쉬운 건가 헷갈리고 있을 때, 요즘 시쳇말로 '대형 빌런'이 나타났다. 나와 친하게 지내던 아이가 외대 신입생 모꼬지 때 독어과 아이와 눈이 맞아 사귀게 된 것이다. 독어과 남자 친구가, 부과대였다. 그러니까, 독어과 과대의 절친이었다. 내 친구는 자기 남자 친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줬다. 중간중간 독어과 과대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괜스레 집중하게 되었다. 뭐야, 왜 자꾸 계속 거슬려, 이제 더 볼일도 없는데.


  모꼬지가 끝나고 2주 후, 외대 축제 기획단이 만들어졌고 자연스레 모꼬지 기획했던 아이들이 집행부의 이름으로 다시 모이게 되었다. 이제는 많이 친해졌기에, 다들 반가워했다.

  "또 보네."

  첫 만남 때 싸움 이후 처음으로 그 아이가 나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게'로 말하는 나의 눈은 그 아이를 보지 못했다. 키가 커서,라고 그때는 생각했다. 지나고 나니 그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외대 축제 기획단은 선배들도 같이 하는 모임이어서, 준비가 끝나면 자주 술자리를 가졌다. 짓궂은 선배 언니 오빠들이 1학년들을 놀리고 이어 주기도 했다. 특히 불어과와 노어과 애들이 잘 거론되었고, 나 혼자 뿐이고 술도 잘 못 마시고 말도 많지 않아서 그런 농에서는 제외되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기피 대상이니까.


  어느 날, 외대 창고의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하는 작업이 있었다. 내가 무거운 것을 낑낑 들고 계단을 오르자 '힘도 없는 주제'라며 내 짐을 들고 가는 이가 있었다. 독어과 과대였다. 뭐지, 왜 저래, 안 어울리게. 옥상으로 다 옮기자 그 당시 자주 먹던 한ㅅ도시락이 점심으로 주어졌다. 하아, 생선가스. 절대 먹지 않는데, 더 큰 문제는 어쩌다 그 아이와 나만 먹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다들 어딜 간 거지, 도대체, 아 어색해. 둘 다 아무 말도 없이 먹었다. 사실 나는 거의 먹지 않았다. 생선가스는 도저히 못 먹겠고, 단무지와 김치로 먹기에는, 금방 다 먹었다. 밥알을 세고 있자 그 아이가 말했다.


  "입이 짧네."


  "??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도 여전하지만, 나는 그때도 여전히 대식가였다. 태어나서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봐서 입이 짧다는 게 무슨 의미인 지 몰랐다. '많이 안 먹네'라는 대답에 피식 웃었다. 아, 네, 그렇게 보셨어요. 분명히 많이 안 먹긴 했다. 생선가스였고, 뭔가 밥이 꼬들어서 입에서 헛돌았다. 무엇보다, 그 아이와 단둘인 이유가 컸을 것이다. 왜 웃어?라고 묻는 말에 아니 그냥, 이라고만 대답했다.

  "아, 맛이 없다"

  그 아이도 금방 젓가락을 내렸다. 그러고는 내 이름이 중국어로 뭐야?라고 물었고, 나는 이름 한자를 물었다. 가운데 '밍'이었다. 발음을 따라 해 보더니 '이상해'라고 말했다. 중국어로 이름 바꾸면 다 이상해,라고 말하는데 선배들이 저쪽에서 왔다. 이 것이 그 아이와의 가장 긴 대화였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축제 준비가 이어졌다. 매일 모여 회의하고 무언가 만들고 사고 붙이고 술을 마셨다. 그래도 둘만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더 없었다. 나는 주로 일어과 아이들과 친했고, 그 아이는 전체적으로 어울렸으나 특히 더 친한 친구는 없었다. 그렇게 축제날이 다가왔다.

  축제의 마지막은 불꽃놀이였다. 외대 건물 옥상에서 불꽃을 올렸는데, 10분 정도 터졌다. 기획단은 다 같이 모여 터지는 불꽃을 보았다. 밍과 나는 어쩌다 나란히 서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툭 쳤다. 누구야,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툭, 아 뭐냐고 도대체. 뒤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옆에는 그 아이였다. 야 너지, 나의 한 마디에 밍은 대답은 않고 씩 웃었다. 나 역시 더는 아무 말 않고 가을밤을 가득 채운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날 회식에 나는 술도 약한데 일찍부터 들이켜서, 기숙사에 일찍 돌아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고는, 더 볼 일이 없었다. 가끔 외대 매점이나 복도에서 마주쳤다. 그러면 그 아이가 '진샤' 하고 불렀고, 나는 '어, 밍' 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건 2학기 시작부터 두 달 가까이 매일 보았던 모든 외대 집행부  친구들에게 하는 인사였다. 나는 다른 친구들은 먼저 다가가서 인사했으나, 유독 그 아이에게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그즈음 나의 친구와 독어과 부과대가 헤어졌기 때문이다.


  기말고사 직전에, 외대 회장으로 당선된 오빠가 학기 정리 기념으로 축제단을 오랜만에 모았다. 그 자리에서도 역시 그 아이와 나는 '잘 지냈어?'와 '그렇지 뭐' 정도의 대화만 나누었다. 더 이야기할 기회도 시간도, 더 말할 거리도 없었다. 그렇게 학기가 끝났다.


  겨울방학은 길었다. 2학기가 그 아이로 가득 찬 기분이었다.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게 아쉬웠다. 겨울방학 내내 나름의 '고백'을 준비했다. 고백이라고 해 봤자, 먼저 인사를 건네는 정도였다. 그 정도도 나에게는 큰 진전이었다. 남자는 기피대상이었는데, 내가 먼저 인사를 하다니. 먼저 인사하는 여러 방법을 연습했다.

  2월 중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이 왔다. 집행부 선배가 된 나는 오티 전부터 준비를 위해 몇 차례 학교에 들렀다. 독어과 과실을 몇 번 지나쳤으나, 보지는 못했다. 오리엔테이션 날 역시 아무리 둘러봐도 독어과에서 밍을 보지 못했다. 오티를 안 왔나, 하다가 독어과 여자애 한 명이 우리 과로 전과한 것을 알게 되었다. 밥 먹는 시간에 슬쩍 옆자리에 앉아 말을 꺼냈다.

  "작년에 독어과 과대랑 이런저런 거 많이 해서 걔는 좀 알아."

  "아, 밍? 걔 군대 갔잖아, 해병대로 갔어. 지난달에 갔을 걸."

  해병대. 해병대. 키가 커서인지 해병대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더는 밥을 먹을 수 없을 것 같아 먼저 일어섰다. 어쩐지 다시는 그 아이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먼저 인사하는 연습도,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해보리라는 기대도, 조금은 더 친해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모두 창 밖의 눈과 같이 녹아내렸다. 우수(雨水) 즈음이었다.





  다시는 그 아이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예감은 틀렸다.


  4년 후, 어느 가을날이었다. 친구들과 도서관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누가 등 뒤에서 부른다. '진샤!' 돌아보니, 어, 어, 어, 하고는 나도 불렀다. '어, 밍!' 머리보다 입에서 먼저 나온 이름이었다. 4년을 까맣게 잊고 지내서 떠올리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도서관 가는 거야?"

  "어, 너는?"

  "아, 친구들이랑 식당."

  "그래, 맛있게 먹어."

  하고는 돌아섰다. 두세 발자국 더 가서 다시 돌아보았다. 그 아이도 돌아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누구야?"

  친구가 물었다.

  "어, 독어과 아는 애."

  "진샤가 독어과 아는 남자애가 있었어?"

  라며 친구들이 신기해했다. 나 역시 내가 독어과에 아는 남자애가 있다는 사실을 오래 잊고 지냈다. 한 순간 스무 살의 여름과 가을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계절들이 품었던 감정에 마침표를 찍었던, 우수도 떠올랐다. 겨울의 날이 풀려 봄을 맞이하는 시절이지만, 내 스물한 살의 우수는 반대였다. 마음의 봄이 한순간 차갑게 얼어버린 순간이었다.


  저 만남이 끝이었다. 20대 후반, 온갖 소개팅에 지쳐갈 때 문득 밍이 떠올랐다. 조용히 싸2월드의 판도라를 열었다. 밍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고, 밤마다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니 속상하다는 일기가 있었다.





  참으로 시시하고 밍밍하다. 첫사랑이라고 말해도 되나 싶을 정도이다. 오랫동안 짝사랑이라고만 생각했는데, 4학년의 그날 이후 짝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밍은 나를 보고 먼저 알아차리고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게 무엇이 중요할까, 싸2월드 이후 그 아이는 내 인생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이가 되었고, 나에겐 딸린 자식새끼가 셋이다. 중요한 건 이것이다. 내 옆에서 목을 꼭 끌어안고 자는 두 아이, 그리고 배 위에서 자는 한 아이, 그리고 한 덩어리가 된 이 모든 이를 위하는 이. 


  그러나 정말 가끔, 걔 해병대 갔다고 말하던 전과생의 표정이 떠오른다. 조금만 슬픈 표정으로 말해 줬으면 덜 슬펐을 텐데, 너무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서 나는 갑작스러운 슬픔을 숨기기 급급했다. 그 무덤덤한 표정 뒤로, 창문에 빗물(雨水)이 흘렀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우수(雨水), 빗물처럼 흘러내린 감정의 순간이다.





0으로 끝나는 날마다 절기의 일기를 써보려 합니다.

입춘과 입하를 지나 입추와 입동에 이르는 찰나의 순간들, 그 틈새에 끼워져 있던 이야기를 펼쳐 보려 합니다. 퀴퀴한 냄새를 털어내고 빛바랜 장면을 손으로 쓸어내다 보면, 무기력을 벗어난 진짜 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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