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무기력의 다른 이름이었다. 무기력을 분신 삼아 흐르는 시간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똑딱똑딱 흐르기도 했고 천천히 혹은 빠르게 흘러가기도 했다. 시간은 아이의 울음소리를 밟고 지나갔고, 무기력보다 더 무력하게 공간을 채웠다. 어떤 때는 강한 힘으로 순간을 휩쓸고 지나갔고, 어떤 시간은 모든 순간의 구석을 다 훑고서야 찬찬히 지나갔다. 시간은 시계의 형태를 지니기도 했고, 감정의 흐름이기도 했으며 찰나의 축적이기도 했다. 무기력은 그 모든 시간을 차근차근 짚어낼 수 있었다.
서사, 프롤로그, 이야기의 이전
시간은 달력으로 환생하기도 했다. 시간을 뚝, 뚝, 뚝 또는 뭉텅뭉텅 잘라 수치화한 것이 달력이었다. 시간이 숫자로 둔갑하고 있는 달력을 한참 바라보았다. 시간은 얌전한 가식을 떨며 달력 안에 조용히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안에서도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토막 난 시간의 조각을 걸어 둔 달력을 바라보다가, 작은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입춘, 하고 발음해 보았다. 춘, 에서 봄의 소리가 날 뻔했다.
입춘이라니, 웃기시네, 입춘 따위, 春, 눈 속에 얼어 버려라.
라고 생각하고는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 졌다. 그렇다, 순전히 '갑자기' 일어난 본능 같은 욕구였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달력을 보고 글을 생각하는 사람, 새어나가는 시간을 아까워하기 위해 달력을 보다가 기껏 글 밖에 생각해 내지 못하는 사람. 그러나 받아들여야 했다. 글로 써내는 것 말고는 무기력에 무력해진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시간의 이야기를 써야 했다.
'시간의 이야기', 그것이 문제였다. 시간은 그 자체가 갖는 추상성과 형이상학적인 힘으로 인해 활자로 고체화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역부족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계절로 치환하는 순간, 계절의 흐름은 안개를 걷어 내고 조금씩 문자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분명한 이야기들은 스물넷의 절기로 나누어지자 그 형태가 명확해졌다. 그러니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사실 보름마다 새로운 절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과 동의어인 것이다. 그리고 활자는 내게 있어, 시간보다는 절기에서 조금 더 선명하게 조각될 수 있었다.
동시에 무의식 이곳저곳에 콕콕 박혀 있던 생의 순간들이 의식의 표면 위로 떠올랐다. 불명확의 시간을 헤쳐 나온 나의 서사(敍事)들은 '절기(節氣)'라는 틀을 만나자마자 내 안의 글 쓰는 이의 멱살을 흔들었다. 어서 나를 글로 써내, 내게 문장의 옷을 입혀서 밖으로 보내 줘.
대부분은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다. 잘나지 못한 생이기에 그저 소박하고 우습게만 보일, 그래서 더욱 부끄러울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은 수치심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책갈피처럼 스물네 절기에 꽂혀 있던 나의 이야기들은 어쩌면 '그'의 삶의 한 부분, '그분'의 생의 한 조각과 교집합을 이루어 조금은 숙성된 맛이 날 것이다. 혼자였다면 수치스러울 삶의 흔적들은 '누군가'들로 인해 조금 부끄러운 정도에 그칠 수 있었다. 수치심에 이르기 전에 익어버린 이야기들이, 보름을 주기로 하는 절기와 만나 세포 분열을 시작하였다. 그 탄생의 처음은 역시나, '입춘'이다.
0으로 끝나는 날마다 절기의 일기를 써보려 합니다.
입춘과 입하를 지나 입추와 입동에 이르는 찰나의 순간들, 그 틈새에 끼워져 있던 이야기를 펼쳐 보려 합니다. 퀴퀴한 냄새를 털어내고 빛바랜 장면을 손으로 쓸어내다 보면, 무기력을 벗어난 진짜 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