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시절 그 음식: 영주역 가락국수 >
아빠는 어디에도 없었다. 기차는 기어코 출발을 했다. 나는 우엥하고 울어 버렸다. 누나가 울자 동생도 우엥하고 울어 버렸다. 내내 웃기만 하던 엄마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고 과자 차 아저씨가 들어왔다. 문이 그냥 닫혀서 나는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아빠는 없었다.
영주역. 지금 검색해 보면 3분 정차였다지만, 아무래도 내 기억엔 10분, 최소 5분이다. 아빠는 웃으며 ‘갔다 올게’라고 말했다. ‘홍익회’ 간판 밑에 아빠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빠는 여전히 간판 밑에 서 있었다. 어느새 플랫폼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딸과 아들은 창문을 두드리며 무어 무어라 소리를 지른다. 분명 ‘아빠, 아빠’ 하고 외치는 것일 테다. 아빠가 가락국수 네 그릇을 재주껏 창으로 넘겨 엄마에게 준다. 아빠가 급하게 뛰어 기차에 오르면 기차는 부에엥 하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얼굴이 조금은 붉어진 아빠는 우리의 조마조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큰 웃음을 얼굴에 달고 온다.
지금까지도 가장 사랑하는 가락국수의 맛이 거기에 있다. 가락국수의 맛이라 함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맛인데, 영주역 가락국수는 달랐다. 연한 갈색의 국물과 불은 면과 고춧가루와 쑥갓과 김가루와 어슷썰기 한 맛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어딘가에 특유의 맛이 숨어 있었다. 그 맛은 지금까지 내 뇌 어딘가에 숨어 오롯이 기억하게 한다. 그 맛과 플랫폼과 아빠의 조금 굽은 등과 엄마의 여유있는 호들갑 모두를.
가락국수 네 그릇을 사 오는 아빠는 늘 남들보다 늦었고 간신히 기차를 탔다. 나와 동생은 매번 유리창에 달라붙어 ‘아빠, 빨리빨리’를 외쳤고 유리창엔 두 꼬마의 손바닥이 진하게 찍혔다. 아빠가 기차를 못 탈지도 모르는데 엄마는 혼자 삐죽이 웃으며 우리를 보기만 했다. 아빠가 기차를 못 타도 좋은 건가, 엄마가 미웠다. 엄마는 내 속을 잘 보는 사람이어서, 그저 웃기만 하는 엄마가 밉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제야 엄마도 같이 ‘아빠 빨리’를 외쳤다. 엄마도 같이 아빠를 외칠 즈음이면 아빠는 잰걸음으로 기차에 올랐다. 그래서 영주역이 좋았고 영주역이 싫었다.
어떻게든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아빠가 올라탄다는 사실을, 몇 번의 경험으로 알게 된 후에는 조용히 창밖을 봤다. ‘홍익회’ 간판 밑 가락국수 네 그릇을 기다리는 아빠는 여전했지만 나는 조금 컸다. 창문을 두드리건 두드리지 않건 아빠는 기차에 오른다는 것을, 아빠의 얼굴과 엄마의 표정으로 배운 것이다. 명절마다 안동 큰집에 가는 기차에서 나는 내가 자라나고 있음을 그렇게 실감했다. 성장이란 소리없이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아빠가 기차에 오르는 걸 보지 못했다. 플랫폼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기차는 점점 속력을 내는데, 엄마 옆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엄마, 아빠가, 아빠가. 마침 열린 문에서는 판매원 아저씨가 달달한 향내 풍기며 과자 차를 밀고 들어왔다. 사이다도 삶은 계란도 소시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빤 어디에 간 거지, 기차를 못 탄 아빠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제 아빠 없이 어떻게 살지.
엄마마저 웃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는 엄마의 얼굴을 보니 엄마도 모른다. 아빠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엄마를 보니 더 무섭다. 가락국수 안 먹어도 좋으니 아빠만이라도 돌아왔으면. 영주역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데 아빠는 없다.
“어디 있다 이제 오니껴!”
눈물을 닦느라 앞이 안 보여서 엄마의 목소리가 더 진하게 울렸다. 아빠가 매번 같은 그 웃음을 얼굴에 걸고 서 있었다. 손에는 가락국수 두 그릇을 들고. 기차가 가길래 급하게 뛰어 오다 두 그릇 떨좌삐고* 바지도 다 젖고 해서. 가락국수 그릇 속 쑥갓이 시들하게 걸쳐져 있었다. 나는 눈물만 닦고 아빠가 건네는 가락국수를 받아 들었다. 먹기 좋게 식어 있었다. 엄마 가락국수와 아빠 가락국수의 행방은 묻지도 못한 채, 늘 그랬듯 국물째 다 먹었다. 가락국수 없는 아빠와 엄마는 나와 동생을 보기만 했다. ‘다음 도착역은 봉화 역입니다’ 방송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나와 낮게 퍼졌다.
창문도 열 수 있었고 담배도 피울 수 있었고 천장에는 선풍기가 돌아가고 의자 옆에 가락국수 그릇을 쌓아둘 수도 있었던 비둘기호를 생각하면, 꿈속에서 꿈을 꾼 것처럼 까마득한 기분이 든다. 그런 기차를 타고 강원 태백에서 경북 안동까지 두 시간 반을 다녔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것은 유년의 기억이라기보다 차라리 구한말 시절의 삶을 자세히 묘사한 어느 소설의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 같다.
몇 개의 산을 지나고 터널을 지나도 창밖 풍경은 대체로 같았다. 동생과 노래를 부르다 끝말잇기를 하다 실 놀이를 하다 보면 끌차 아저씨가 지나갔다. 바나나우유를 먹고 싶었지만 엄마가 고르는 건 삶은 달걀과 사이다였다. 끌차도 더는 흥미를 끌지 못할 즈음 영주역에 도착했다. 4학년이 되어 영주에 부석사라는 아름다운 절이 있다는 것을 배울 때도 나는 속으로 ‘가락국수’을 생각했다. 그리고 젖은 바지에 가락국수 두 그릇만 들고 온 젊은 아빠를 생각했다. 그즈음 우리는 비둘기호가 아닌 통일호를 타고 큰집을 오갔다. 얼마 후 통일호와 함께 홍익회 가락국수도 사라졌다. 무궁화호는 빨랐고 의자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화장실도 깨끗했다. 쾌적한 무궁화호는 냄새나고 느린 것들을 잊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무궁화호 기차는 봉화역에 정차하지 않았다. 기차가 비둘기에서 무궁화로 진화하는 동안 몇몇 기차역은 퇴화되었다. 전에 이 역에서 기차에 오르내리던 사람들은 어찌 되었을까, 궁금해할 새도 없이 기차는 역을 지나쳤다. 그렇게 인생의 몇몇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한 채 이 나이에 도달했다. 답을 찾지 못한 궁금증 중 하나가 바로 ‘가락국수의 맛’이었다. 국물과 면과 고춧가루와 쑥갓과 게맛살 어디에 숨어있었던 걸까, 그 맛의 특별함은.
얼마 전 학교에서 온 아이가 말했다. 오늘 간식으로 가락국수 먹었는데 맛있었어요, 가락국수 해주세요. 인터넷 검색 후기가 가장 좋았던 가락국수 세트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맞아요, 이 맛이에요! 그래, 이 맛이구나. 오래전 영주역 아빠 손에 들려온 가락국수와 비슷한 맛이 났다. 그리고, 그래, 그 손이다. 답이 뒤통수 어디선가 튀어 나왔다.
가족에게 먹일 생각 하나로 뜨거운 그릇을 들고 오던 손, 영주역 가락국수의 맛은 그 손에 있었다. 출발하는 기차에 간신히 오르며 쏟은 두 그릇은 어찌해버리고, 온전한 두 그릇을 아들과 딸에게 건넨 손. 다행히도 그 손은 아직 있지만, 그 손에 들려오던 영주역 가락국수는 없어진 지 오래다. 태백-안동 간 정차하던 몇몇 역들이 없어지고 비둘기와 통일이 없어지고 나의 유년 시절에 대한 감각마저 없어지고 있다. 시간은 소리없이 많은 것들을 없앤다. 그러나 단 하나, 시간을 관통하며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것이 있다. 내 아비가 내게 건넨 가락국수와 내가 딸아이에게 끓여준 가락국수에 담긴, 같은 모양을 한 마음이다.
영주역 가락국수는 아직 없어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떨좌삐고: 떨어뜨려 버리고, 경상도 북부지방 사투리.
*사진출처: 대문-Guyver님의 홈페이지, 김빠진사이다 님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