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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Feb 06. 2023

시의 동사




데이비드 오어의 재미있는 보고에 따르면, 어떤 임의의 X에 대해 '나는 X를 좋아한다(like)와 '나는 X를 사랑한다(love)'의 구글 검색 결과를 비교해 보면, 대체로 '좋아한다'가 '사랑한다'보다 더 많다고 한다.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는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에 비해 세 배나 많다는 것. X의 자리에 '영화', '미국', '맥주' 등등을 넣어도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poetry)만은 결과가 반대여서 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 배 더 많다고 한다. 왜일까?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훌륭한 시를 읽을 때, 나는 바로 그런 기분이 된다. 

신형철 평론가(2017.01.06, 한겨레,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전에도 이 부분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 글을 다시 인용하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올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 날이 생각보다 빨리 왔다. 



시의 동사, 사랑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시의 동사는 '사랑한다'이다. 시를 좋아한다고 시를 아낀다고 시를 즐긴다고 시를 생각한다고 시를 품는다고, 다 가능하지만 시에 가장 어울리고 적합한 단어는 역시나 '사랑한다'이다. 왜 그럴까. 왜 시는 조금은 고집스럽게 '사랑한다'라는 동사를 취할까. 왜 사람들은 별 거부감 없이 '시를 사랑한다'라고 말하고 순하게 그 말을 듣는 걸까. 

꽤 오래, 저 글을 쓰고 발행한 거의 그 시점부터(지금 보니 약 8개월 전이다) 내내 생각해 왔다. 왜 시는 '사랑한다'라고 말하게 되는 걸까. 물론 수필이나 소설도 '사랑한다'라는 동사를 적잖이 취하기는 하지만 시는 상대적이자 절대적으로 '사랑한다'를 데리고 온다. 사랑한다는 동사의 주체로서의 시, 시는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 나름의 고민을 해봤다. 쓸데없고 고결하며 목적도 없는, 그러나 그리하여 온전히 문학적일 수 있는 고민. 


아무래도 시에 집중하는 시기이다. 조금은 더 열린 마음과 데워진 온도로 시를 본다.(여러 차례 말했지만, 시에는 '읽는다'라는 동사를 붙이기가 개인적으로 껄끄럽다. 차라리 시를 본다, 라든가 시를 접한다, 음미한다,라는 건 받아들여져도 '읽는다'는 건 괜히 싫다. 신문을 읽고 논문을 읽고 보고서를 읽는 행위와 시를 읽는 행위에 차별을 두고 싶은 이상한 마음인 거다) 

시를 보면 볼수록, 그에 걸맞은 동사는 '사랑한다' 뿐이다. 

시가 어떤 형태이고 어떤 내용이든 시는 사랑할만하다. '사랑한다'라는 동사를 취할 충분한 자격이 있는 주체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어떤 점 때문에? 


시는 은밀한 언어로 쓰인 글이다. 직관적인 시들도 당연히 많지만, 상당수의 시는 은밀한 언어로 쓰였다. 온갖 은유와 비유와 환유와 활유와 중의, 심상이 보란듯이 뒤엉켜 있다. 너만 당신만 그대만 알아볼 수 있게,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만 알아챌 수 있게, 동일한 또는 동질한 시간의 결을 지나는 이만 감지해 낼 수 있게. 

그렇기에 읽는 이들이 같은 시에서 건져내는 것들은 대개 다르다. 어떤 이는 딱딱한 시간을, 어떤 이는 느끼기 조차 힘든 미세한 감정을, 어떤 이는 폭발하는 핵연료 같은 위해하고 투명한 기운을, 같은 시에서 만난다. 은밀한 언어 때문이다. 확정적이고 객관적이지 못한 시어들 덕분에 독자들은 제멋대로 시를 이해해 버린다. 그리고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시를 쓴 이와 읽는 이만 가질 수 있는, 그들이 만나야만 화학적 결합이 일어나는 성분들-은밀한 언어-로 인해 시는 재구축된다. 이 재구축은 시를 쓴 이도 기대도 상상도 하지 못한 부분이다. 자신이 선택한 은어가 읽는 이에게 그런 방식으로 흡입될 줄은 몰랐을 테니. 

그러나 시인과 독자는 대부분 만나지 못한다. 물론 북토크나 사인회 같은 형식으로 저자와 독자의 만남이 흔히 일어나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사실상 만남이 이루어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당신의 시를 이렇게 읽었어요. 그런가요, 저는 이렇게 쓴 것이지만 그렇게 읽힐 수도 있겠군요. 이 부분은 나에게 이렇게 다가왔는데, 지금의 제가 이러하기 때문이에요. 그렇군요, 제가 쓸 때는 제 상황이 이러이러했어요. 이런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다. 오로지 '시'만이 매개가 되어 시인과 독자 사이에 놓이는데, 그 시마저 은밀한 단어로 가득하다. 


이 은밀함 속에서 '사랑'이 발생한다.


어떤 내밀함, 그것을 제대로 파헤쳐보려는 나름의 노력, 그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종류의 오해, 오해 속에서 오해를 풀어보려는 또 다른 차원의 노력, 일종의 포기, 그러나 다 할 수는 없는 포기, 약간의 방치, 다시 시작하는(읽어보는) 시도, 다시, 오로지 내 쪽에서만 가능한 이해들, 그것에서 파생되는 - 이전과 비슷한 오해, 끝내 내 마음대로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체념.


시를 보는 행위, 어떤 행위와 비슷하다. 사랑이다. 어떤 대상을 사랑할 때 대부분 겪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다. 물론 사람을 사랑한다면 좀 더 복잡하고 예민한 피드백이 오고 가겠지만, 그럼에도 전체적으로는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시를 보는 행위, 사랑하는 행위.

시는 왜 이해하기 어렵고 그래서 오해하기 쉽고 결국 내 맘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가. 다시, '은밀한 언어' 때문이다. 시만이 갖고 있는, 융통성 없는 심성 때문이다. 쓰는 시인 따로, 읽는 독자 따로, 그 가운데 홀로 외로운 언어들. 소리 없이 그러나 강력한 파동의 감정, 사랑.


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떤 동사로 대체할 수 있을까. 여럿을 떠올려 보고 생각해 보았지만 나의 생각이란 편협하여 '사랑한다' 말고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시는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어서, 

목소리가 아름다운 자는 낭송을 한다.

그림을 그리는 자는 시에 그림을 그려 시화전을 연다.

가창이 뛰어난 자는 음률을 붙어 노래를 한다.

가슴에 남기고 싶은 이는 자주 들여다 보고 필사를 하고 책상에 붙여 둔다. 잊지 않기 위해 외운다. 

시를 사랑하는 방식들은 모두 다르지만, 그들이 하는 것은 단 하나이다. 시를 사랑하는 것. 


고백은 늘 쉽지 않은 것이어서 시를 사랑한다고 입 밖으로 내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시 좋아해요, 는 몇 번 말할 기회가 있었지만 '시를 사랑해요'는 감히 말하지 못했다. 어떤 고백은 수치심을 동반하기에 더욱, '좋아해요'에 그치고만 말았다. 시가 담고 있는 은밀한 말들에 내가 내 식으로 화답하는, 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작용하는 나만의 객체적 정서를 자주 위축시켰다. 

그런 내게 신형철 평론가가 약간의 용기를 주었다. 다음에 그럴 기회가 주어진다면 용기 내서 '시를 사랑한다'라고 말하고 싶다. 곁에 있는 이가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시는 은밀하니까요'라는, 쉽게 오해를 일으킬만한 대답보다는 좀 더 정갈한 다음의 문장을 빌려 말할 것이다. '사랑'과 '사람'이 포함된, 그리하여 시의 속성을 가장 정확히 드러낸.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훌륭한 시를 읽을 때, 나는 바로 그런 기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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