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사실 늘 그랬지만) 아빠는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중학교 때 대뜸 불러다가 '언젠가 흑인이 미국대통령을 할 날이 올 거다' 했던 적이 있었고, 친구가 '샤프'시디플레이어를 학교에서 자랑했다고(나도 사고 싶다고) 툴툴거리면 '조금만 지나 봐라, 우리나라 물건이 일본보다 더 비싸지는 날이 온다'라고 했다. 제이팝을 흥얼거리는 내게 '니가 어른이 되면 온 세계 사람들이 우리나라 노래를 배우려고 난리가 날 거다'라고 했다. 중고등학생의 나는 '아빠 또 시작이다' 하고 말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말들이었다. 부시는 전형적인 백인엘리트였고 나의 아이리버시디플레이어는 기스가 많이 나고 버튼이 잘 눌러지지 않아서 꺼내기 부끄러웠다. 감각적인 제이팝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대중가요는 뭔가 부족했고 촌스러웠다. 아빠의 말들은 그저 아빠의 바람일 뿐이었다.
그런 아빠가 한 말 중 가장 충격적이고 잊을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말이 있었다. 사실 이 말이 아빠의 '뻥' 중에 가장 '뻥'스러웠다. 어느 저녁, 여덟 살의 나(아홉 살이나 열 살 일 수도 있다)를 데리고 나갔다. 아마 엄마와 싸워서 저녁을 나가 먹어야 했을 것이다. 아빠는 돈가스를 하나만 시켰다. 내 앞에 밀어주고 아빠는돈가스를 대충 썰었다. 아빠도 태어나 처음으로 돈가스를 썰어봤을 그런 손짓이었다. 고기는 접시를 벗어나려 했고 아빠는 손으로 접시 쪽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아빠가 깨달은 게 있는데, 이 세상이 있잖아, 우리가 만드는 대로 만들어지는 거다."
처음 먹어본 돈가스는 솔직히, 텁텁했다. 씹어 삼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빠는 식탁을 탁탁 치면서 말했다. 이 세상이 원래 무야 무, 없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믿는 대로 만들어지는 거다 이 말이야, 네가 이 세상을 만드는 거야, 너 마음대로. 컵을 잡고 물을 마셔 보았다.컵은 공장 아저씨가 만들고 물은 그냥 물이었다. 컵도 물도 그렇게 원래 있는 거였다. 아무리 봐도 내가 만든 게 아니었다. 그때는 '실재한다'는 단어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고 하여튼 아빠가 조금 미친 것 같았다. 빨리 나가고 싶었는데 돈가스가 많이 남았다. 아빠 이거 다 못 먹겠어. 아빠는 빠른 속도로 남은 돈가스를 다 먹었다. 그러면서도 이상한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이게 다 원래는 없는 거야, 우리가 만든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거야. 나는 괜히 아빠 뒤의 다른 곳을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아빠의 말을 들었을까 봐, 나 말고도 아빠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봐.
글을 담는 그릇이 되고 싶다고 오래 생각을 하며 지냈다. 내게 오는 글을 담아내며 썼었다. 그래서 글을 쓰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는 일은 내 생각대로 되는 적이 없었기에 글을 잠시 쓸 수 없었고(꽤 오래 더 이어질 것 같다), 그렇다면 읽지 못한 책들을 읽어보자 싶었다. 마침 사람들로부터 소설을 써보라는 말도 들었다.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라 막연한 거부가 있었다. 실재가 아니잖아. 진짜가 아니잖아. 진짜가 아님에도 진득하게 '실재'하는 그 이야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일단 읽었다. 이런, 저런, 그리고 다시 이런저런 소설들을.
그릇은 투명해졌다. 글이 아닌 감정을 담고 마음을 담고 시대를 담았다. 슬픔이 담겼을 땐 무슨 모양과 색깔인 지 내 밖에서 보고 싶었다. 환한 곤란이 오래 머물렀다. 물이 담겨 있었는데 그게 무슨 기분인 지 몰라 혼자 난감했었다. 글을 담기엔 활자가 들어찰 자리가 없었다. 소설은 그렇게 내 안에서 진짜가 되어갔다.
소설은 '이야기'의 실재였다. 진짜로 존재하는 '이야기'이고 마음 안에 담겼다가 사라지는 그 무엇이었다. 중요한 건 담긴다는 사실이었고, 사라질 땐 어떤 흔적이나 흠집을 남겼다. 내 그릇이 되었다가 그릇을 훔쳤다가 어느 순간 되돌려 왔는데 다른 모양이 되어 있었다. 소설은 그릇을 깼다가 그 모습 그대로 가져오곤 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달라져 있었는데 어딘지는 알아내기 힘들었다. 그렇게 그릇의 형질이 색이 존재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었다.
낙엽을 치우는 어떤 이를 바라보는 화자의 이야기가, 길을 걸으며 떠오른다. 킥보드를 타며 지나가는 아이의 뒤를 따르는 여자의 모습을 보며, 보험청구접수확인 문자를 확인하며, 꼬리를 세우며 나를 보는 길고양이의 검은 등을 보며,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의 차이를 묻는 아이에게 답을 어찌해줘야 할지 고민하다가 '어떻게든 되겠지' 되뇌는 나를 보며, 그렇게 이야기들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만만했던 적은 없었지만 그렇게 보였다면 자신만만함을 버리고 소설들을 필사했다.(함축된 오해마저 이야기로 피어오르는 걸 허락하는 게 소설이라, 그것도 고마웠다.) 느렸지만 천천히 이야기들은 땅을 다졌고 일어섰다. 생김새는 볼품없지만, 어쨌든 그릇을 만드는 손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빠 앞에 앉아 물컵 안의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작은 나를 요즘 자주 불러낸다. 지금의 나와 나이가 같은 아빠는 미친 게 아니었다. 그때의 아빠는 종교적 각성에서 비롯된 세계를 내게 건네준 것이었고, 지금의 나는 다른 의미의 세계를 받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때의 아빠만큼 깨어있지 못해 여전히 매트릭스 안에서 헤매는 나이지만(빨간 약을 받을 거지만 삼키지는 않을 테야!), 나는 내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길을 잃어보려 한다. 그때 지하철 역에서 나의 말에 웃음을 멈추지 못한 친구의 표정에서 첫 문장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그릇은 온전히 내 것이고, 오롯이 그 이야기만 담을 수 있다. 오후 한 시, 태권도 차량을 기다리는 아이의 노란띠에 수놓인 '강철' 두 글자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에이포 열 장을 채운다. 그 그릇은 다른 재료로 만들어졌기에 내 세계의 다른 자리, 국경 너머 마른 땅에 놓일 수밖에 없다. 아직은 황량하기만 한 소설이라는 공간. 어쨌든 내 파란 약은 내가 제조할 거니까.
세계를 직조해내는 나의 글쓰기는 이제 시작이다.
이 세상은 원래 없는 거야, 우리가 믿는 대로, 만드는 대로 만들어지는 거야.
돌이켜 보면(사실 늘 그랬지만) 아빠의 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잘 지내며 잘 못 지내고 있습니다.
시를 필사하고 책을 읽고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나무를 보다가 시를 필사합니다.
계절이 문득 거울 앞에 선 사람에 대한 안부를 물을 때,
앞서 다녀간 얼굴의 온도 덕분에 이렇게 웃고 있었다고.
계시된 시간보다 먼저 도착한 약속처럼 우리의 질문은 오직
잘 쓰고 계신가요,
저 또한
우리에게 다른 무엇이 필요없는
잘, 쓰고 있었어요, 라고 답할게요.
그러니 부디 잘 쓰고 계세요, 미농지 위에 겹쳐 그리고 나눠 가진 뒷모습을 맞춰볼 그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