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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행 비행기

여행을 마치며

by 올디너리페이퍼

베를린에서 머물던 집을 정리하고 다시 짐을 싸면서 이유 없이 우울했다.

아마도 미련 때문이었으리라. 아무리 남은 시간을 생각하려 해도 여행이 끝이 나고 있다는, 마무리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체감할 수밖에 없으니. 시간의 질에 있어서는 충분히 만족스러웠지만, 시간의 총량에 있어서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리고 공항과 다시 타야 할 비행기를 생각하면 울렁거렸다.

우버 택시는 시간 맞춰 잘 잡힐까, 기차를 타야 하는 건 아닐까, 무언가 잊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을까,

집 정리에 부족함이 있지는 않을까...와 같은 사소한 고민부터

공항에서 탈은 없을지, 따로 구매한 항공권에 문제는 있지 않을지,

그랬던 적은 없지만 짐이 안오진 않을지...와 같은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정말 쓸데없는 고민까지.

겨울의 낮은 해에 볕이 잘 들지 않아 다소 어두운 방에 우두커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암스테르담에서는 최대한 짐을 풀지 않았다.

최소한의 것들을 꺼내고, 사용하면 곧바로 넣고. 마치 머물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다행히 모든 일정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은 우울하지 않았다.

(집에 오고 싶지 않느냐 묻는 이도 있었지만, 진심으로 그러고 싶은 마음은 1도 없었다.)

짧지 않은, 하지만 마음만큼 길지는 않았던 이 여행이 참 좋았던 때문인 것 같다.

처음 계획했던 계절이 아니고 겨울의 해도 짧았지만

이 계절과 이 시간이었기 때문에 예기치 않은 친구들과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사람이 적어 각 곳의 방문이 수월했고,

마지막 날까지 다양한 날씨(비, 바람, 비, 바람, 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까지)를 만날 수 있었고,

게으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가장 감사했던 건 그 친구들 덕분에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시도할 수 있었고,

그들과 나의, 그리고 우리에 대한 수다로 사람들과의 자유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는 거다.

오랜 시간 사람에 지쳐 일을 떠났지만,

여행 중 만난 모든 이들이 또한 일을 통해 만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멈칫.

그 마음의 크기가 어떠하든, 상황이 어떠하든 그들은 충분히 나에게 진심이었음을 느낀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지난 시간에 이런 사람들도 있어주었구나... 되새긴다.


항상 사람이었던 것 같다.

소소한 일상의 웃음도 사람으로 인한 것이었고,

밤 잠 못 자는 고통도 사람으로 인한 것이었고,

불편함 뒤의 깨달음도 사람으로 인한 것이었고,

애달픔 끝의 감동도 사람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들로 인해 나는 좋은 사람이고자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좋으면 좋아서, 싫으면 싫어서.

그 때문에 정의로운 판단도 하지만, 또한 비겁한 생각이나 적당히 타협하는 행동도 했다.

때로는 필요 이상의 의욕과 욕심으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우리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그리고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졌다.

이제는 안다. 열심히는 하였으나, 현명하지 못했던 거라고.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완전히 또는 많이 달라지리라는 확신은 없다. 아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의 응원과 염려와 환대와 동행 덕분에 이번 여행은 빛났다.


그리고, 이제 뭘 해 볼까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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