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그 할렘?
대책 없이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면서, 4박 5일 기간 중 확정됐던 유일한 계획은 마침 같은 기간에 네덜란드 친구 집에 와 있는 친구를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주요 목적인 공연 관람조차 암스테르담에 도착해서 예약을 했으니, 두어 번 좌석 확인을 하기는 하였으나, 뭐든 계속 미루고 싶었던 것 같다. 일할 때는 완전 J인데 여행은 거의 P와 같이 하는 스타일이었음을 깨닫는다. 어... 그래서 한 곳에 머무는 여행을 좋아하는 건가...
첫날은 해가 지는 시간에 도착해, 숙소 가까운 식당을 찾아 저녁식사를 하고 휴식.
이곳에 머무는 동안 첫날부터 날이 어마어마하게 추웠다. 유럽의 겨울이 춥다춥다 했지만, 베를린에 있는 동안은 서울이 말도 안 되게 추워서 오히려 베를린이 더 따뜻할 정도였다. 하지만 암스테르담으로 이동하는 날부터 유럽이 다시 추워지는 시기였는데, 심지어 덴마크는 영하 43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게 사람이 살 수 있는 온도인가. 싶지만 살더라. 하긴 기온에 풍속까지 체크해 가며 옷을 껴입는 나 같은 사람도 있지만, 패딩 안에 반팔 티셔츠만 차려입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따뜻하지도 않은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패딩 벗고 반팔 차림으로 앉아있는다. 유럽 내에서도 특히나 북유럽 사람들이 확실히 추위를 덜 탄다고 하는데 볼 때마다 놀랍다.
고흐 미술관 하나로 하루를 보내고, 친구와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계획을 세워 본다.
암스테르담 보다는 근처 기차로 다녀올 만한 곳이 있는지 뒤적뒤적... 건물들의 모습 때문에 레고 마을이라고 일컬어지는 잔담을 들러 풍차가 많다는 잔세스칸스를 다녀올까(네덜란드 왔으니 풍차는 실컷 봐줘야지. 잔세스칸스행 기차표를 끊고, 중간에 잔담에서 내렸다가 다시 타도 되는, 여행자에게 딱인 신박한 시스템이다.), 아니면 다른 마을은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친구의 가족들이 추천하는 할렘(Harrlem)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미국에 있는 할렘이 그 오래전 네덜란드 사람들이 이곳의 할렘에서 가져간 이름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곳이다.
이렇게 급 당일치기 할렘 여행이 결정되었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기차로 20분이 채 걸리지 않고, 기차도 자주 있는 데다 결정적으로 관심 있게 볼 만한 공간들이 모두 역에서 도보로 이동이 가능한 곳에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라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에 제격이다.
미국 할렘의 이미지가 조금 더 익숙한 나에게, 그리고 친구에게 네덜란드 할렘의 첫 이미지는 깨끗하다, 조용하다. 겨울, 평일 낮이라 더 그렇기도 했겠지만, 정말 사람이 많지 않았다. 더욱이 너무나 사람이 많고, 복잡하고, 더러운 암스테르담에 있다 갔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차가운 공기만큼이나 깨끗하게 느껴지는 마을은 낮은 건물들 사이로, 또는 하천을 따로 걷기만 해도 숨통이 트이고, 정신까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강 따라 걷다 불쑥 만나게 된 작은 카페와
그 카페의 창가에 앉아 노곤히 햇빛 쬐는 사람들은 여유로워 보이고,
성당이나 박물관을 조용히 둘러보며 소곤소곤 대화하는 소리에 평화를 느끼고,
우연히 들른 초콜렛 가게의 진하고 풍성한 초콜렛 향이 기분 좋다.
더욱이 오렌지 껍질과 어우러진 초콜렛의 달콤하고 쌉싸롬한 맛에서 행운을 만난 것 같은 행복함을 느낀다.
게다가 맑고 밝은 햇살은 이 날의 주인공!
하루 온종일 우리의 여행이 성공적임을 보여준다.
성 바보성당이라고 하면 우리나라 말로는 다소 읭?! 스럽지만, St.Bavo Church라고 하면 괜찮은가?
어느 도시를 가면 성당에 한 번쯤은 꼭 들르게 되는데, 이미 많은 성당이 주요 관광지 목록에 들어가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스테인드 글라스와 성당이라는 공간의 오묘한 공기가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리고 가끔 운이 좋으면 파이프오르간 연주나 성가대 연습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도 있다. 바보성당에는 헨델과 모차르트가 직접 연주한 적이 있는 파이프오르간이 있다고 했었는데, 세상에 우연히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피아노 조율하는 것과 같이 음 하나하나를 눌러가며 점검하는 소리가 한참 들리더니, 어느새 점검이 끝난 건지 제대로 된 음악이 흘러나왔다. 몇 안되는 사람이었지만, 방문자 모두가 멈춰서 음악을 감상하며 행운의 순간을 누린다.
그리고, 전날 지도 보며 골라놓은 두 군데 박물관 중 테일러박물관(Teylers Museum)을 관람했다.
개인이 모은 것들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본인의 집을 개조해 뮤지엄을 만들었는데, 덕분에 지금의 우리는 개인의 부와 세상에 대한 기여를 경험할 수 있었다. 더욱이 한 사람이 수집했다고 하기에는 수집품의 범위가 상당히 다양해서 관람할 맛이 나고, 실제 돌아다니면서 관람한 건물과 전시품 중 하나인 박물관 미니어처를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것은 지도. 지도에 진심인 사람이었던지, 고지도들을 상당히 많이 수집해 전시하고 있었는데 Corea와 Mare Corea를 찾았을 때의 만족감은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니길.
그렇게 그렇게 해와 바람을 맞으며 물 따라 길 따라 걷다가,
큰, 하지만 그날은 닫혀 있던 풍차도 보고(풍차를 보려는 자 가까이 가지 말지어다. 멀리 보는 풍차가 진정 풍차임을 느꼈다. 가까이 가면 그저 전체를 한눈에 담을 수 없는 건물일 뿐),
한 때는 감옥이었으나 지금은 사무실과 학교,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Koepel Harrlem)도 보고,
여운을 남기며 넘어가는 하늘도 충분히 느끼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