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지난 한 주는 마음에 드는 시간들을 대량 수집했습니다.
베스트 오브 베스트는 조카를 만났다는 거예요.
지난 1월 1일 이후,
음력설에는 제가 A형 독감에 걸려 연휴 내내 집콕했고,
지난해의 이름표를 달고 등장해 2월 말부터 거세게 퍼진 코로나19 때문에 지금까지 못 봤거든요.
개인적으로(공연이 연이어 취소되었기 때문에 양심상 개인적 차원이라는 단서를 달아야겠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특별히 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평소에 친구들과의 만남이 잦은 것도 아니고, 외부활동이 활발한 것도 아니고, 공연들도 거의 취소가 되어 속상하지만 씁쓸하게도 죽어도 꼭 봐야만 하는 공연은 없다는 걸 이제는 알고…
그런데 조카를 보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한동안 누군가 이토록 보고 싶은 적이 있었나.
새로운 생명이라고는 엄마가 들이는 식물들 뿐인 집에
퍽이나 오랜만에 등장한 새로운 생명인 그 아이 덕분에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중에 가장 의미 있는 건 아빠가 국가대항전 스포츠 게임이 아닌 한 사람을 향해 그렇게 많이, 크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제가 잊었던 걸 수도 있구요.
몇 번이고 그 모습이 낯설어 신기한 발견을 한 것 같았답니다. 기분 좋은 발견.
그렇지만, 조카와 하루종일 놀지는 못합니다. 노는 체력이라는 게 일하는 체력과는 또 다르거든요. 몇 개 밖에 없는 놀이기구를 잠깐잠깐씩 순례해야 하는 놀이터(그 와중에 그네는 자리가 나면 찜을 위해 얼른 달려가야 합니다), 숨을 곳도 몇 군데 안 되는 집에서 하는 반복되는 숨바꼭질, 플라스틱 통들을 세워놓고 마사지용 공을 굴리는 볼링, 상상의 골대를 상대로 하는 미니 축구, 상상력을 펼치기에는 빈약한 그림 그리기, 한창 유행하는 팔찌나 반지 만들기 비즈 공예, 티슈로 대체한 스케이트 타기에 어디서든 무작정 달리기까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아이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모든 어른들이 시간을 분담해서 커버해야 한답니다. 근데, 아시나요? 이럴 때 가장 많이 투입되는 것이 이모나 고모, 삼촌이라는 것. 영광스럽게도, 저는 고모 군에 속합니다.
그리고 하루는 집에서 스콘을 구웠습니다.
그게 뭐 대수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제가 살고 있는 집은 설탕 하나도 없는 곳이거든요.
전날 밤, 커피를 마시다 말고 갑자기 나가서
마트가 문을 닫기 직전에 밀가루, 설탕, 버터, 우유, 베이킹파우더, 종이호일을 샀습니다.
집에 있는 거라고는 오이를 닦을 때 사용하는 굵은소금뿐.
이번에 베이킹파우더가 조미료 코너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답니다.
가도 항상 들르는 코너만 들르기 때문에 뭐가 어디 있는지 찾는데 그 넓은 마트에서 꽤 난감.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이스트랑 베이킹파우더랑 같은 건 줄 알고 베이킹파우더를 샀어요.
다음날이 휴가라, 아침 일찍부터 유튜브 보면서 스콘을 하나 구웠는데!
맛은 상상에 맡길게요.
사실 맛없을 수 없는 조합이잖아요. 그 재료라는 것이. ㅇㅎㅎ
마지막으로, 학교 다닐 때 작성했던 과제물을 노트북으로 옮겼습니다.
과제물이 플로피디스크에 들어 있었거든요.
혹시, 플로피디스크를 아시나요? 사용해 본 적 있으세요?
그걸 언제까지 사용했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이제는 데스크톱에도 플로피디스크 리더가 없잖아요.
근데 골동기기를 많이 보유한 친구가 외장 플로피디스크 리더를 가지고 있던 덕분에
선사시대 유물과 같은 리포트를 플라스틱 안에서 건져낼 수 있었답니다.
감탄할 수는 있으나, 좋아하기 참 힘든 교수님의 수업시간에 매주 제출해야 하는 과제였는데,
살면서 아주 가끔 생각났거든요. ‘경험보고서’라고.
일주일 동안 지내면서 내가 마주친 고정관념에 대해 쓰는 글이었습니다.
1학기라고 해봐야 수강변경기간이랑 시험기간 빼고 나면 정작 몇 주 안 되잖아요.
그런 거 보면 대학 수업 시간이 참 적은 것 같아요. 학교 다닐 땐 미처 생각 못했는데.
대학교, 대학생활이라는 건
본인이 작정하고 찾아 나서지 않으면 참 날려버리기 쉬운 시간과 돈인 것 같아요. 참고로, 작정하지 않았던 1인의 아쉬움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10번째 보고서까지 있더라구요.
남녀평등, 교육열, 촌지, 익숙해짐, 개인주의, 선택, 미스코리아, 부모와 자식, 주인의식.
제 보고서 속 고정관념이었습니다. 지금 보니 하나가 비네요.
생각해 보세요. 20년 남짓 전에 나왔던 단어들.
우스운 건 많이 달라졌고, 여전히 달라지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저기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는 거죠.
세상도 나도. 아니, 세상까지 논하기엔 거창하네요. 그냥 제가.
엇! 오늘은 의도치 않게 너무 길어졌습니다.
이 메일의 시작이 되었던 ‘외롭다’라는 말, 오늘의 계획은 외로움이 벌컥 찾아오는 순간에 대해 얘기하려고 했었는데.
나중에 다시 생각난다면, 그때 논해보지요. 고정관념도 외로움도.
많이 웃고, 다음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