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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디너리페이퍼 Jun 02. 2024

찬란한 봄, 5월의 광주에서

2020년 5월 #1

평화로운 봄의 연휴를 보내셨나요?

긴 연휴를 누릴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더 좋네요.

이 기간에 소위 생산적인 활동은 아무것도 안 하기로, 그 어떠한 것도 안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마도 내일 오후쯤이면 이미 지나 보낸 시간이 아까워지겠죠. 그래도!


지난 수요일 퇴근을 하고 전라도 광주에 갔었습니다. 광주는 처음이더라구요.

광주직할시… 5.18 광주민주화운동, 광주아시아문화전당, 전라남도 도청소재지. 

ㅋㅋㅋ제가 한참 학교에서 도시 이름 외우던 어린 시절에 광주는 직할시였답니다. 

찾아보니, 1995년 광역시로 변경되었네요. 이 또한 외웠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거 아세요? 지금은 무안이 전라남도 도청소재지래요. 2005년에 변경됐다고 하는데 이것도 몰랐습니다. 하하 >.< 


다음날, 국군광주통합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국군광주통합병원 옛터.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문과 심문으로 부상을 당한 시민들이 이곳으로 옮겨져, 

감시 하에 치료를 받으면서 동시에 심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1998년에 사적지로 지정됐다고 하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공개가 되지 않고 폐허의 모습으로 남아있더라구요. 지인의 작업으로 저도 우연히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사진 찍으러 다녀왔습니다. 


먼지가 쌓인 걸 넘어 먼지로 침식되어 버린 것 같은 내부는 깨진 유리와 나무 조각들이 널려 있고, 

군데군데 비늘 벗겨지듯 거칠게 일어난 빛바랜 페인트와 타일로만 원래의 색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회색빛.

그리고 건물과 내부의 기운이 무색하게 바깥은 초록 잎이 무성한 나무와 담쟁이덩굴, 갈색 덤불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으면 폐허가 되고,

자연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으면 기운이 승하는 것 같아요. 


병원이었음을 그나마 짐작할 수 있는 몇 개의 안내 표지판과 사물들, 

긴 복도를 따라 나 있는 용도를 알 수 없지만 애써 상상하고 싶지 않은 칸칸이 나뉜 방들, 

희뿌연 유리가 간신히 붙어 있거나 틀만 남은 똑같은 모양의 창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연상작용으로 남영동 대공분실, 

특정 층은 고문피해자들이 투신자살을 할 수 없도록 창문의 폭이 모두 좁게 만들어졌다는 그곳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마침 유튜브에서 잠깐 본 때문인 것 같아요.

처음부터 고문을 위한 곳으로 계획되고 지어졌다는데, 한국현대건축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고… 작업을 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건축가는 이후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그 폐허에서 하루종일 있다가 왔습니다. 

하루의 빛에 따라 같은 공간을 다르게 보고,

햇빛과 바람과 새소리도 오랜만에 보고 듣고 느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예전 공연 연습을 하며 수없이 들었던 노래 ‘5월의 노래 2’와 한강 작가님의 소설 ‘소년이 온다’가 연이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합니다. 이런 공간에는 항상 거대한 나무들이 있습니다. 많아요.

몸이 닿지 않는 높은 곳의 바람은 직접 느낄 수 없지만, 나무를 통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날도 생명이 한창 움트는 계절답게 솔솔 부는 바람에 하늘 끝에 닿은 연두색 나뭇잎들이 찰랑대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이곳은 어떤 생김이었을까요. 

그나저나 광주는 참 멀었습니다.  

가도 가도 나오지 않고, 와도 와도 도착하지 않더라구요. 


이번 주엔 드디어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봤습니다. 

개봉 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코로나19랑 맞물려서 차마 못 가겠더라구요. 쫄보.

영화 피디, 40세의 미혼여성. 

아휴! 이 영화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고 싶은데 이미 너무 길어졌습니다. 그래서 딱 한 가지만 얘기하려고 합니다

의욕이 길을 잃고, 자신이 사라지는 것만 같을 때 찬실씨는 밥을 먹지 않더라구요. 밥 먹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다시 마음의 힘이 생겼을 때, 찬실씨는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합니다

감독이(작가가)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아마도 그랬겠죠?), '밥'이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런 도구로 많이 사용되지요. 이번에도 역시 인상적이었습니다. 

동질감을 느꼈거든요. 저도 '먹는다'는 행위에 의욕이 없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와 달라진 지금의 저는… 마음의 힘이 있어 상차림과 먹기를 하는 것인지, 

상차림과 먹기로 에너지와 의욕을 내려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영화 속 장국영이 찬실씨에게 얘기한 것처럼, 찬실씨가 소피에게 얘기한 것처럼 깊이 생각해 봐야겠지요. 

그러면 찬실씨처럼 무언가 찾아질까요, 무언가 발견하게 될까요.

소피처럼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할까요.

그러면 그런대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다시 행복하게 살까요.


많이 웃고, 다음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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