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
답신을 보았습니다.
식구들과 어린 시절이 있는 곳에서의 새로운 시작이냐, 그간의 터전이 있는 서울이냐는 어디든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쉽지 않은 고민일 것 같습니다. 제 직장 동료들만 해도 지방에 있는 식구들과 떨어져 서울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드물긴 하지만 몇 본 적이 있구요.
저는 부모님과 워낙 오랫동안 같이 살기도 했고 식구들이 항상 같은 도시에 살아 온전히 이해한다고 할 수 없지만, 워낙 생활의 사소한 것 하나부터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식구들과 함께 할 때 기대할 수 있는 안정감과 이유 없는 지지가 무엇인지는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성인으로서 독립인으로서 이루거나 살아낸 것들 또한 얼마나 놓기 어려운지 감히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근데 그거 아시죠?
어디에 있든 거기서 만의 재미와 가치를 발견하면서 지내게 될 거라는 거. 어디든 살아가기 시작하면 생활의 터전이 된다는 거. 만일 고민하는 이가 건강한 당신이라면 그러리라 믿습니다.
오늘은 비가 내리는 휴일입니다.
저는 비를 참 좋아합니다.
어떠한 비라도 다 좋습니다.
세차게 내리는 여름 장맛비도,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도,
몸도 기운도 차갑게 식혀주는 겨울비도.
가장 좋아하지 않는 건 미적지근한 봄비인데,
덕분에 그런 사소한 이유로 가장 좋아하지 않는 계절이 봄이기도 하답니다.
봄에만 볼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연두는 제외하구요.
그래도 비는 비라서 봄비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청소기 돌리고, 온몸 받쳐 벼르던 걸레질까지 했습니다.
그 전에 버릴 게 없는지 찾느라 옷장을 한참 들여다봤어요.
이사 전과 후, 그리고 오늘까지 아무리 들여다봐도 버릴 게 없어서 다소 울적하던 차에
한 번도 입지 않았으나 도저히 입을 것 같지 않은
면티를 하나 골라 버릴 요량으로 반으로 잘라 걸레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버리는 걸 좋아합니다.
버리고 나서 찾아지는 여백이 있는데, 그 여백이 필요하거든요.
나중에 버리는 거에 대해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버리기 위해 서둘러 소비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흠.
어쨌든 걸레질까지 한 판 하고 나니 상쾌,
비까지 오니 오늘의 세상만사,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노란색 백열등 스탠드를 켜고,
아이팟에 담긴 너무나 익숙한 음악을 들으며 이 편지를 씁니다.
익숙하다는 건 그런 거예요.
듣고 있는 곡이 끝나면, 자연스레 다음 나올 곡의 시작을 이어나갈 수 있는.
사실 익숙하다는 감각조차 사라지는 그런 무뎌짐이기도 합니다.
2층에 살 때는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았지만,
고층으로 이사 온 지금은 땅이나 나무에서 멀어져,
에어컨 실외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비가 떨어지는 타다닥 소리인지, 쇠붙이가 열을 받아 가끔 나는 따닥 소리인지.
하지만 분명 하늘에 조금 가까워져서 공간의 빗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길 지나는 차에서 나는 빗소리도 더 들을 수 있게 되어 괜찮습니다.
신기하죠, 소리가 올라온답니다.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는 날엔 실외기가 떨어지진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까도 생각합니다만,
지금의 이 순간이 꽤나 만족스럽습니다.
게다가 더 많이, 멀리 보이는 하늘은 덤입니다.
만족스러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많이 웃고, 다음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