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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meralda Jun 19. 2020

006 그 영화제에 갑니다

배고픈 에세이입니다

 지금쯤 평창국제영화제에서 만족스러운 첫날을 마무리하고 잠에 들 언니에게 느지막한 답장을 씁니다.


 저도 언니를 따라 생전 처음 영화제를 가게 되었습니다. 금토일 예매한 언니와 바통 터치하는 격으로 월요일 당일치기라는 아주 의욕적인 첫 영화제를 가게 되었는데요, 오늘 짧게 듣자 하니 언니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한 영화제로 스타트를 끊은 것 같아 저도 기대가 됩니다.

 처음 언니가 같이 가자는 제안을 했을 때에는 저한테 스케줄 외의 몇 가지 고민되는 사항들이 있었는데요, 그중에 하나는 먹을 것에 대한 거였어요. 일전에 연락으로는 얘기하지 못했는데, 지금 저는 인생 대대적인 다이어트를 하고 있습니다. 딴따라라는 숙명에 늘 고무줄 몸무게로 살아오긴 했었지만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른 열의로 다이어트에 임하고 있거든요. 그러기에 주식은 닭가슴살과 샐러드입니다. 그토록 닭가슴살만은 먹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요리조리 피해왔지만 고단백 저탄수 식단을 지킬 수 있는 건 닭가슴살이 최선이긴 하더라고요. 저는 요즘 매일 아침 두유를 들이켜는 것부터 루틴의 시작으로 냉동실에서 닭가슴살을 꺼내 해동하고 모든 고난의 유일한 구원자 스리라차 소스를 곁들여 풀과 함께 우적우적 먹습니다. 저녁은 주로 스케줄 때문에 외식이기에 써브웨이에서 로스트 치킨에 속을 파낸 위트 빵에 레드와인식초와 올리브유를 뿌려 먹어요. 써브웨이 특유의 미국 식당 냄새를 아나요? 저는 지나가다 그 냄새를 맡게 되면 속이 메스꺼워 돌아갈 정도입니다. 그래도 써브웨이에서 빈약한 위트 빵이 들어올 땐 위에서 박수갈채가 나오는 소리가 들려요. 탄수화물은 탄수화물입니다. 그러다 한 번씩 진짜 엽떡 생각에 몸부림 쳐질 때에 실곤약 국수에 닭가슴살을 찢어 초계국수처럼 먹어요. 그렇게 지금 4주째 하고 진행하고 있네요. 그럼에도 6킬로가량이 남았어요. 누군가 말하는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것 참 어렵습니다.

 여차저차 이런 식단을 유지하는 데에 영화제라니, 팝콘 없는 영화 관람은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말이 되지 않는데요? 콜라가 없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요. 그래도 4주간 열심히 주 1킬로씩 감량한 제 자제력을 믿고 이 퍽퍽한 닭가슴살 같은 청춘의 하루를 매콤한 문화예술탕에 던지기로 마음먹었어요. 다행히 저는 록 페스티벌 같은 형태일 거라 예상하고 온갖 푸드트럭과 편의점 음식만 주어진 어떤 우리 안에 들어가는 것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영화관 출입이 자유롭고 로케가 넓어 근처 식당이 많다고 해서 아 어느 정도 선택권이 있겠구나 안심했지만 언니가 오늘 맛있게 먹었다며 추천한 메밀국수에 또다시 자제력을 잃을 뻔했습니다. 하얀색 면을 맘껏 먹어 본 지 언제일까요.. 까만색 국수라며 합리화시키며 거기 가서 그 집 국수를 먹으면 어쩌죠...


키키의 ost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먹방을 계속 보고 있었어요. 바다가 보이는 마을이라는 제목이 예뻐요. 이 곡이 끝나면 회 먹방을 봐야겠네요. 오돌오돌 씹히는 장어회가 먹고 싶어요. 아 음악이 너무 좋아요. 히사이시 조의 노래를 들으면 뭔가 눈시울이 붉어질 때가 있어요(배가 고파서 그런 건 아니겠죠?). 나이를 먹으면서 노래를 쓰는 관점도 약간 이런 방향이 되어가고 있는데요, 슬프지 않은데 눈물이 나는 노래를 쓰고 싶어요. 밝은 노래에 울컥할 때가 있지 않나요? 저는 그때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을 느끼곤 하거든요. 훨씬 복합적이고 풍부한 먹먹함이 느껴져요. 그런 노래는 회상이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노래에 회상을 담으려면 현재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게 참 아이러니 하지만 더 이상 억지로 짜내는 슬픔을 쓰지 않으려면 더 담담한 어조로 현재를 잘 표현할 수 있어야 하더라고요. 제 현재는 어떤 모양인지 요즘 생각합니다. 거기에 명확한 답을 내릴 순 없지만 곧 현재가 될 가까운 미래에는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행복한 모양이겠어요..


 요즘 언니가 예전에 추천한 [새의 선물]을 이제야 보는데 참 재밌어요. 그때 막 이 책을 받았을 때는 '언니는 뭐 이런 책을 재밌어하나' 했는데(미안합니다), 지금은 '나는 뭐 이런 책을 재미없어했나' 싶어요. 책도 음악도 영화도 자기의 상황에 맞게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예전에 리틀 포레스트를 보며 너무 싱거워서 중반부터는 잠에 들었는데 얼마 전에 봤을 때는 단짠단짠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더라고요. 언제나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은데, 이렇게 보면 또 욕심인가 싶기도 해요. 아무튼 [새의 선물]은 은희경 작가님의 별미 같은 책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받은 건 아니지만 추천해줘서 고마워요. 영화제도 마찬가지로요. 기쁜 마음으로 갔다 오겠습니다.


P.S. 사진은 4킬로 더 쪘던 제가 그만큼 덜 나가는 저에게 주는 회상이란 슬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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