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와 퇴고 사이

오늘 브런치 하셨나요?

by 박나비

'퇴고'의 한자를 아시나요?

이거 또 다 알고 계신 건데

제가 새삼스레 유난 떨고 있죠 :)


- 퇴:推, 밀 퇴

- 고:敲, 두드릴 고


밀고 두드린다는 뜻입니다.


커다란 덩어리의 밀가루 반죽을

계속 밀고 두드려 얇게 펴야지 비로소

면으로 만들 수 있다는데서 유래가..


될 리가 없잖습니까?


주먹 푸세요.

아니 주먹 안에 돌을 쥐고 계시면..


때는 바야흐로 당나라,

한 시인이 말을 타고 가다

멋진 시상이 떠올라 시를 한 편 짓습니다.

시 한 편 멋들어지게 짓고 보니

한 시구에서 딱 한 글자가 마음에 걸리더랍니다.


鳥宿池邊樹

(조숙지변수)

새는 못가의 나무에서 자고

月下門

(승퇴월하문)

중은 달빛아래 문을 미는구나


미는 것(퇴) 보다 두드리는(고) 게 더 좋지 않을까.

시인은 '밀 퇴' 대신 '두드릴 고'를 쓰면 어떨까

넋 나간 사람처럼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인 INFJ일까요?


머피의 법칙 아시죠?

그때 마침 저 앞에서 높으신 분이 행차하십니다.

그 왜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대감님 행차하실 때

가마꾼들보다 앞서 대감집 하인들이

‘물렀거라~ 나비어른 행차시다~’

라고 외치잖아요.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죠?

마치 바닷물이 반으로 갈라지듯

길 위에 있던 사람들이 양 길가로 흩어져서는

대감님의 행차가 끝날 때까지

고개를 처박고 있어야죠.


하지만 이 INFJ 시인은

‘밀다’와 ‘두드리다’ 사이에서

얼마나 고뇌를 하고 있었던지

그 소리조차 못 들은 거죠.


*전방주시태만

- 범칙금 6만 원, 벌점 15점

*안전거리미확보

- 범칙금 4만 원, 벌점 10점으로

경을 쳐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여기선 머피의 법칙이 아니라

샐리의 법칙이 작용합니다.

행차하신 높으신 분이 무려 당송팔대가 중

한 명이었던 거죠.

재수 좋은 놈은 뒤로 넘어져도 매트리스라더니..


INFJ 시인의 사정을 다 들은 이 문학의 대가께서는

'음, 여기선 두드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네'

하고 대번에 답을 내려 주십니다.

이 분은 ESTP였던 것 같습니다.


鳥宿池邊樹

(조숙지변수)

새는 못가의 나무에서 자고

僧敲月下門

(승고월하문)

중은 달빛아래 문을 두드리네


결국 INFJ 시인이 고민하던 시구는

‘퇴’ 자를 ‘고’ 자로,

딱 한 글자만 바꿔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밀 '퇴'와 두드릴 '고' 사이에서의 고민은

이렇게 끝나게 된 것이죠.


우리가 아는 ‘퇴고’의 유래입니다.



초고를 쓰는 것도 힘들지만 퇴고도 만만찮습니다.

작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초고를 쓰는 것보다

퇴고를 더 힘들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볼 때마다 보이기 때문이죠.

무슨 말이냐고요?

아무리 고쳐도 볼 때마다 고칠 부분이 보인다는 겁니다.

예전에 제가 일상와인스토리의 어느 편에선가

본 내용을 쓰다가 퇴고에 관해서도 아주 살짝

쓴 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잠시 기지개도 켜고 목도 한 번 돌리고 계시면

후다닥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찾았습니다!



매 화, 글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몇 번을 다시 읽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고쳐본다. 그렇게 읽고 고치기를 반복하다 보면,

정말 공들여 썼던 문단이 통으로 빠질 때도 있고,

몇 번이고 고친 문장을 결국 원래의 문장으로

되돌려 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아무리 이 과정을 반복하더라도

완성된 글은 끝끝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쉽게 술술 글이 써지는 날이란 게 거의 없기도 하지만,

그렇게 술술 쓰이는 날이라고 해서 술술 써 내려간

글들은 그럼 마음에 드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날에 수정이 더 많다.

별 수 없다. 결국 항복이다.

이것보다 더 잘 쓸 수 있지만,

이번 편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자고 적당히 타협을 한다.

그리고 가장 쉬운 선택을 한 자책감을 희석시키고자

다음 편은 완벽하게 쓰리란 다짐을 항복 문서

저기 구석에 슬쩍 덧붙이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다음편도 항복을 외치며 또다시 타협을 할 거란 걸. - 일상와인스토리 시즌2 10화에서 발췌



사실 저는 퇴고보다 초고가 월등히 어렵습니다.

퇴고는 보이는 적과 싸우는 것이지만

초고는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느낌이거든요.

다만 퇴고는 정말 괴롭습니다.

고치고 싶은 부분이 더 남았음에도 어느 시점에서

스톱을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치고 고치다 보면

어느 순간 글을 다시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싶거든요.

그래서 저는 보통 맞춤법이나

어울리지 않는 문장 몇 개 정도를 고치면

눈을 질끈 감고 발행을 누르는 편입니다.

사실 브런치 같은 글쓰기 플랫폼은

이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워드나 한글 파일에 초고를 쓰게 되면

시간을 가지고 계속해서 퇴고를 하게 되는데

브런치 플랫폼에 바로 글을 쓰게 되면

우측 상단 위 발행 버튼의 유혹에 곧잘 넘어갑니다.


그만하자 여기서 끝내자

그만하자 더 아프기 전에.


물론 장단점이 있습니다.

워드나 한글을 이용하면

생각만큼 글을 자주 안 쓰게 됩니다.

쓴다 해도 발행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요.

좀 더 완벽하게 다듬고 싶거든요.


반면에 브런치에 바로 쓰게 되면

생각보다 자주 글을 쓰게 되고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발행을 하게 됩니다.

쓰고 고치고 발행하고를 하루 만에 끝내는 거죠.


저는 계속해서 쓰고 발행하는 편입니다.

고쳐서 되는 단계에 아직 못 이르렀거든요.

하지만 계속해서 쓰다 보면 저도 언젠가

저 INFJ 시인처럼 딱 한 글자만 고치면 완벽해지는

그런 글을 쓸 날이 오지 않을까요? :)


그래서 저는 오늘도 브런치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브런치 하셨나요?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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