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흐르고, 향기가 퍼지는 시간
아침과 밤,
하루 두 번.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여름엔 시원해서 좋고,
겨울엔 따뜻해서 좋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건식화장실 안쪽, 유리로 된 샤워부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에 머무는 곳입니다.
샤워를 시작하기 전 몇 가지 선행 절차가 있습니다.
먼저 수온 밸브를 아래위로 잘 조절해서
계절에 딱 맞는 적절한 온도로 맞춥니다.
이다음이 중요한데,
물이 나오는 곳이 호스 샤워기로 되어 있는지,
천정의 해바라기 샤워기로 되어 있는지
반드시 확인을 해야 합니다.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호스 샤워기를 쓰고,
해바라기 샤워기는 저 혼자 사용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물을 틀었다간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물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물의 온도도 적당하게 맞췄고,
물이 나오는 방향도 잘 확인했으면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합니다.
물을 틀자마자 재빨리 뒤쪽으로 몸을 옮깁니다.
아무리 물의 온도를 잘 맞추었어도
해바라기 샤워기에서 나오는 첫 물은
차갑기 그지없습니다.
가끔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혹은 다른 생각을 너무 깊이 하느라
물을 틀고 가만히 있을 때가 있는데
이럴 땐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자마자
속으로 비명을 지르곤 합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차갑고도 냉정한 물줄기를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저는 바디샴푸를 쓰지 않습니다.
머리는 샴푸로 감지만,
샤워는 비누로만 합니다.
얼굴과 몸을 모두 비누로만 씻다 보니
비누가 여간 빨리 닳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비누는 마지막에 약간 형태가 남아 있더라도
빨리 새 걸로 갈게 됩니다.
왠지 과학적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비누가 망고 씨 모양으로 납작해지면
아무리 박박 문질러도 거품이 잘 안나더라고요.
새 비누를 가지러 갈 때마다 고민을 합니다.
비누를 모아놓은 칸을 보면
원형의 일반 비누들과 달리 저 한켠에
갖가지 모양들의 수제 비누들이 쌓여있거든요.
검정과 하양, 건반 모양의 피아노 비누도 있고
빨강과 노랑, 활짝 핀 꽃 비누들도 있습니다.
귀여운 곰돌이 비누도 있고,
한입 베어 물면 달달함이 온몸으로 퍼질 것 같은
디저트 비누들도 있습니다.
선물로 받은 이 비누들은 너무 예뻐서 뜯지도 않고
그저 쌓아만 두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거 한 번 써볼까?’ 했다가도
결국엔 일반 비누로 손이 갑니다.
'에이, 쓰기 아깝다'가 가장 큰 이유고,
'이런 비누는 잘 안 씻겨질 거 같아'가 두 번째 이유입니다.
새 비누가 필요해 비누칸을 열었습니다.
쌓아만 놓았던 수제 비누들을 한 번씩 뒤적이고는
역시나 일반 비누를 선택하려는데
뒤집힌 수제 비누 바닥에서 유통기한이 보입니다.
‘비누가 유통기한이 있어?’가 제일 먼저 든 생각이고,
‘오늘이 며칠이지.. 많이 지났네!’가 두 번째 든 생각입니다.
이러다 이 예쁜 비누들은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다 내다 버리게 생겼습니다.
결국 피아노 비누와 꽃 비누 포장을 뜯어
샤워부스로 데려갑니다.
먼저 샴푸로 머리부터 감은 후
두 개의 비누를 놓고 고민을 합니다.
양손에 피아노와 꽃을 든 벌거숭이 남자가
생각에 잠깁니다.
결국, 꽃을 내려두고 피아노를 집어 몸 구석구석을
칠합니다.
빠지는 곳이 없도록 빈틈없이 거품을 채웁니다.
어라? 이게 무슨 일입니까?
팔을 문지를 땐 숭어가 뛰어놀고,
다리를 문지를 땐 계절이 바뀝니다.
오, 피아노비누!
역시 일반 비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번엔 피아노 비누를 내려놓고 꽃 비누를 집습니다.
양 손바닥 사이에 빨간 꽃 한 송이를 품고 조심스레 문지릅니다.
세상에!
샤워부스 안이 온통 장미꽃 향으로 가득합니다.
오, 꽃 비누!
역시 일반 비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샤워를 마치고 콧노래를 흥얼대며 거실로 나옵니다.
피아노로 샤워를 하고,
꽃으로 세수를 했더니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좋습니다.
다음엔 뭘 써보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부지런히 피아노와 꽃을 써야겠습니다.
*사진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