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III), 남1

이제 말해보시겠어요

by 박나비

- 이제 말해보시겠어요?


여자는 수화로 자신의 말을 전했다.


- 그러니까.. 그게.. 저기..


시내 한 커피숖에서 남자는 여자를 마주 보며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입은 정장도 답답했고,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마음도 답답했다.

모든 게 답답했던 남자는 연신 물만 들이켰다.

빈 물 컵을 만지작거리며 ‘그러니까’, ‘그게’만 연발하던 남자가 드디어 결심을 했다.


- 미영씨. 사랑합시다. 결혼합니다.


뭐가 잘 못 된 줄도 모르던 남자는 황당해하는 여자의 표정을 본 후에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리고 황급히 다시 말했다.


- 아니, 사랑합니다. 결혼합시다 미영씨.


황당함을 아득히 뛰어넘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이 남자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궁금해졌다.

여자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 아니, 아저씨. 저를 언제 봤다고 사랑을 하니 결혼을 하니 그러는 거죠? 그리고 수화는 또 어떻게 알아듣는 건가요?


- 아저씨라니!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신체건강한 대한민국의 팔팔한 총각으로서..


여자의 다급한 손짓이 남자의 말을 끊었다.


- 됐으니까, 왜 이러시는 건데요 대체 왜!


연신 수화를 날리면서도 여자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모처럼 쉬는 날이라 공장 기숙사에서 쉬고 있던 여자였다. 방문자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어찌나 놀랐던지.

혈혈단신 홀로 여기까지 올라와 갖은 고생 끝에 이제야 좀 안정된 생활을 하나 싶었는데, 갑자기 방문자라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기숙사 정문으로 달려 나간 여자는 다시 한번 놀랐다.

난생처음 보는 못생긴 남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촌스러운 정장을 입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정문 앞에서 할 얘기가 아니라는 남자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근처 커피숖으로 따라온 미영이었다.


- 시방 지금 허는 말이 곧이 들리시진 않겄지만, 저는 미영씨를 아주 잘 알고 있어요. 미영씨가 사고무친이신 것도, 근자에 여그 공장에 들어오셨지만서도 텃세 부리는 선배들 탓에 맘고생 징허게 하고계시단 것도요.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자의 손이 다급하게 허공에 수를 놓았다.


- 아니, 잠깐만. 당신 뭐야? 뭐 하는 사람이야? 내 뒷조사까지 한 이유가 뭐야?


여자는 무서웠다. 이 남자는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고 왜 이러는 걸까.


- 미영씨! 일단 좀 앉아봐요. 지금 다들 이 짝만 쳐다보고 있는데..나 맹세코 나쁜 사람 아니요! 지발 내 얘기 쪼까 들어보소.


남자의 호소에 여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여자는 주춤거리며 일단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다시 여자가 손짓했다.


- 뭔가 조금만 수상한 행동을 하면 바로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남자는 고개를 몇 번이나 크게 끄덕였다.

여자의 얼굴에서 의심스러운 표정은 풀리지 않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눌하던 남자의 말투가 점점 확신에 찬 말투로 변해갔고, 의심스러운 여자의 표정은 점점 경악으로 바뀌어갔다.


* * *

한동안 남자의 얘기를 들은 여자가 다시 손짓으로 남자의 말을 막았다.


- 잠시만요! 그러니까 지금 당신 얘기는..


여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처음엔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적당히 얘기를 들어주다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얘기가 계속될수록 여자는 혼란스러웠다.

남자의 얘기 중에는 자신도 까먹고 있던 자신의 비밀들도 있었다.

어디까지 이 남자의 이야기를 믿어야 할지, 아니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 맞는지 조차 여자는 의심스러웠다.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지도 않고 수화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너무 어지럽네요.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남자는 여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남자는 성냥으로 탑을 쌓기 시작했다.

일단, 이단, 삼단..

공들여 성냥탑을 쌓으며 남자는 생각했다.


그려 너무 심혔지. 나라도 이런 얘기는 못 믿을거여. 아니 믿지 못할 정도가 아니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갈빡을 갈겼겄지. 나오면 정식으로다 사과허고 돌아가야겄네. 뭔가 다른 수가 있겄지.


그때 주변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남자는 탑을 쌓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커피숖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가 들어간 화장실이었다.

여자가 들어간 화장실 문 틈으로 환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순간 남자는 자신이 보았던 빛이 떠올랐다.

자신을 이십 년 전 지금 이곳으로 보내준 그 빛이.

잠시 후 빛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여자가 들어간 화장실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커피숖의 여사장은 아예 화장실 앞에서 여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화장실의 문이 열리자 커피숖 여사장이 여자의 팔을 낚아챘다.


- 아가씨 방금 무슨 일이야?


여사장의 추구에 여자가 천천히 손짓을 했다.


- 무슨.. 일이라뇨?


- 뭐, 뭐야 아가씨 말 못 해?


여자의 수화에 여사장은 당황하며 되물었고,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도 듣기는 하나 보네. 방금 여기 화장실이 막 엄청 빛이 났었어.

저기 사람들 표정 좀 봐바. 다들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하고 난리가 났다고.


여자는 듣는 건 문제가 없는데도 커피숖 여사장은 또박또박 세 살 아이에게 말을 하듯 천천히 말을 해주었다.

여자는 수화를 모르는 사장에게 어떻게 답을 해줘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그때 여자의 앞으로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를 본 여자가 손짓으로 자신의 말을 전달했다.


- 뭔 말이냐고 그러네요. 암 일도 없었다고. 화장실 창문에서 저기 뭐시냐 해가 들어와서 그런 거 아니냐고 허네요.

남자의 통역 아닌 통역을 들은 커피숖 여사장이 다시 반문했다.


- 아니 그런 빛이 아니었데도 글쎄.


한번 더 여자의 손짓이 이어졌고 곧 바로 남자의 통역이 나왔다.


- 그러니께 그 뭐다냐 햇빛이 거울에 반사되불어서 그런거 아닌가 허요. 암튼 자기는 안에 있어서 뭔 일로 그라는지 당최 모르겠다고안허요.


여자는 남자의 통역이 끝나자마자 남자의 팔을 잡아 끌고 자리로 돌아갔다.

커피숖 사장은 미간을 잠시 찌푸리다 손님들에게 ‘아이 별일 아니래잖아’, ‘햇빛이 거울에 반사된 거래’라고 돌아다니며 일러주고는 카운터로 돌아갔다. 여자에게 끌려 얼떨결에 자리로 돌아온 남자는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런 남자를 가만히 지켜보던 여자가 손짓했다.


- 하죠.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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