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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의 화장실

출근을 넘어서

by 박나비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본다.


어디선가 한 번쯤 보게 되는 말인데,

출처는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이다.

전체 문구는 아래와 같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갑자기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오늘 아침 화장실에서 한 맹세 때문이다.



나는 매일 아침 핸드폰 알람을 듣고 잠을 깨면

정해진 루틴대로 움직이는데,

정확히 이 순서대로다.


1) 침대옆에 널브러져 있는 슬리퍼를 신고

2) 방문을 소리 나지 않게 열고 닫은 다음

3) 주방 구석에 있는 정수기로 걸어가

4) 정수 250ml를 마신다음

5) 화장실로 가서 볼일을 해결하고

6) 샤워부스에서 샤워를 한 다음

7) 머리를 말리고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만지고

8) 교복 같은 출근복을 챙겨 입고

9) 모든 불을 소등한 뒤

10) 집을 나선다


어느 한 부분의 생략이나, 순서의 바뀜도 없이 매일 아침을 이 루틴대로 움직인 지 어언 5개월. 나는 하루도 문제없이 출근을 잘해왔다. 하지만 오늘은 문제가 생길 뻔했다.


저 5번 루틴은 대체적으로 넘버 2다.

다른 표현으론 큰 거, 작은 거에서 큰 것을 의미한다.

이게 시간이 여유로울 땐 오히려 짧고 상쾌하게 끝을 내는 반면, 시간이 촉박하다 혹은 한정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 뭔가 질질 끌려다니는 느낌이다. 다 나온 것 같은데 하고 비데의 세정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아랫배가 다시 묵직한 것 같고, 찌릿찌릿 신호가 오는 것도 같다. 그래 아직 3분은 더 할애할 수 있으니 조금만 더 앉아있어 보자 하고 편하게 엉덩이를 변기에 밀착시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진다. 3분이면 카레를 조리할 후도 있는 충분히 긴 시간이라 할 수도 있지만 아침 출근 준비 시간에 3분은 정말 3초처럼 흘러간다. 그렇게 3초 같은 3분이 지나고 다시 거사를 종료하려 하면 눈치도 없이 아랫배가 다시 꾸르륵꾸르륵거린다. 하아.. 정말이지 이젠 시간이 없다. 단호하게 세정 버튼을 누르려는데 이젠 아랫배가 요동을 친다.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다. 샤워를 3분 안에 끝내고 머리는 안 말리면 된다. 자 다시 한번 가보자. 그래 신뢰가 중요하지. 한 번 더 믿어볼 테니 어서 너의 잠재력을 보여줘!

….

이 사기꾼색기.


이렇게 나는 오늘 아침 5번 이후의 모든 루틴을 생략할뻔했고, 가까스로 모든 루틴을 플래시처럼 마치고 나와서는 아슬아슬하게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지각이다.


상쾌한 아침, 화장실 변기에 앉아 정말 마지막으로, 최종의 최종의 최종으로 비데의 세정버튼을 누르며 나는 맹세를 했다. 앞으로 아무리 급해도 5번은 7번 뒤에 할 것임을. 그렇게 나의 모닝루틴은 5개월여 만에 처음으로 순서가 바뀌었다.


아침에 변기와 싸움을 벌이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변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변기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변기 또한 우리에게 온갖 신호를 보내게 될 것이다.
버터플라이팍, ‘출근을 넘어서’中


오늘도 나와 당신의 하루를 응원합니다.

그럼 이만, 삼만, 사만..



*이미지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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