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만만하게 봤던 종이벽에 끼어 버둥거리다 흑막들에게 비웃음을 샀던 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허약해 보이던 종이벽이 나보다 더 강할 줄이야. '아! 세상은 만만하지 않구나.' 난 세상의 쓴 맛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흑막들은 울지 않는 나를 보며 아주 기뻐했다. "오빠 드디어 아기가 철이 들었나 봐." 난 한참을 그렇게 있다 흑막들과 산책을 하게 되었다. 산책 중 야외의 눈부시고 따사로운 햇살을 느끼며 난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려! 이 아름다운 세상을 포기할 거야?' 난 좌절했던 나 자신을 다그쳤다.
지금 한가하게 산책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생각에 난 울음을 터트렸다. "응애 응애" 산책 중 처음 있는 일이라 흑막들은 허둥지둥 나를 유모차에서 꺼내 달래려 했으나 난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 울었다. 끝내 버티지 못했던 흑막들은 나를 데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난 들어오자마자 중독적인 음료를 쪽쪽 마시며, 왜 내가 실패했는지 곰곰히 생각해 봤지만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난 생각을 바꿔 실패의 원인을 찾기보단 흑막들의 관찰해서 성공할 수 있는 비법을 찾기로 했다.
내가 흑막들을 유심히 살펴본 결과 사람에게는 3가지의 기본적인 자세가 있다. '눕기', '앉기', '서기'.
'눕기'는 모든 사람이 처음으로 할 수 있는 자세이자 가장 편안해서 쉬기 위한 자세이기도 하다. 이 자세의 대표적인 사람은 남흑막이다. 남흑막은 평소에 어떻게든 누우려고 한다. 소파에 눕기도 하고 내 옆에 눕기도 하고 여흑막이 나를 볼 때면 어느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종종 남흑막이 나를 감시하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눕기를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여흑막에게 걸려 한소리를 들을 때도 있을 만큼 남흑막은 이 자세를 좋아했다. 내가 볼 땐 여흑막이 더 많이 움직이고 말도 많이 하는데도 불구하고 남흑막이 더 누워 쉬려고 하니 한심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러니 여흑막에게 맨날 혼나지.'
'앉기'는 눕기의 다음 단계로 자기의 일이나 손이 닿는 주변의 일을 볼 때 취하는 자세다. 흑막들이 가장 많이 하고 있는 자세이기도 하다. 특히, 여흑막이 이 자세를 많이 취하는데 나에게 음료를 주거나 내가 입는 옷을 정리할 때, 휴대폰이라 불리는 작은 상자를 볼 때도 앉아서 한다. 나도 최근 지속적인 딸랑이와 뒤집기를 바탕으로 드디어 이 자세를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대망의 '서기'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궁극의 자세로 어딘가 가거나 활발한 일을 할 때 취하는 자세다. 흑막들은 어디를 갈 때는 항상 '서기'를 해서 갔다. 예외적으로 남흑막이 누워있다 가까운 거리를 옆으로 딩굴딩굴 굴러가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그걸 보던 여흑막의 한심한 눈초리를 볼 때 정상적이진 않은 거 같았다. 난 드디어 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성공할 수 있는 비법을 찾았다. '종이벽을 나가려면 서기부터 해야 했던 거였어.'
난 거대한 깨달음을 얻었지만 이 '서기'라는 자세는 나에게 불가능한 자세였다. 이제 겨우 '앉기'를 성공했는데 '서기'라니. 흑막들은 당연하다는 듯 일어섰지만 두 개의 팔과 두 개의 다리로도 나의 몸을 지탱하기 어려운 나에게 두 다리로만 일어서는 건 종이벽의 턱보다 높은 벽이었다. 난 높디높은 벽에 잠시 포기를 생각했지만 탈출을 위해 좌절할 순 없었다. 그래서 난 '서기'를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누워 있는 나는 나를 지탱해 줄 종이벽 근처로 버둥거리며 다가간 후 이제는 손쉬운 뒤집기를 했다. 그리고 단련된 팔의 힘과 포동포동한 다리를 이용해 무거운 나의 머리를 들어 올려 힘겹게 앉았다. 힘겨웠던 '앉기'를 성공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 다짐하며 짧고 앙증맞은 팔을 뻗어 종이벽을 잡았다. 그리고는 힘껏 종이벽을 당기며 다리에 힘을 줬다.
역시 세상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난 순간 일어섰지만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난 힘도 다 빠지고 실망해서 축 쳐졌다. 하지만 그 모습을 목격한 흑막들은 달랐다. "오빠 아기가 혼자 일어서려고 해." 여흑막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남흑막에게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남흑막은 급히 나에게 와서 나를 지켜봤다. 하지만 나는 지쳐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결국 남흑막이 나에게 말했다. "한번 더 해보자." '난 이미 지쳤다고.'
흑막들은 내가 다시 한번 시도해 보길 바랐지만 난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성격이 급한 남흑막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나의 겨드랑이에 손을 불쑥 집어넣고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와 진짜 서 있어." 난 반쯤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 정확히 말하면 일어선 게 아니지만 흑막들은 그저 좋아했다. 나도 일어선 느낌과 나름 내 다리로 버티고 서있단 생각에 기분이 좋아 웃었다. '방긋 방긋'
비록 이번엔 흑막의 도움을 받아 '서기'를 했지만 언젠가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나 혼자 설 테다! '종이벽아 기다려. 언젠가 너를 넘어설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