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려요.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인생에서.
누구에게나 '엄마'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 존재가 어떻게 다가오시나요? '가까운, 먼, 애증의, 그리운, 미안한, 감사한' 같은 수많은 수식어들이 아마 엄마와 함께 연상되실 겁니다. 오늘 만난 김수지 님은 두 아들의 엄마 입니다. '두 아들의 엄마' 이 세 단어만으로도 수지님을 만나기 전부터 많은 것들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약자'가 되었다는 수지님은 출산과 육아 후 겪은 가장 큰 변화로 가리워진 약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묵직한 말을 건넸습니다. 누구나 엄마를 갖고 있고, 엄마가 될 수 있음에도 엄마는 때론 약자가 되버립니다. 혹은 우리 모두 어느 한 부분의 약자임에도 인식하지 못하다가 '엄마'라는 라벨이, 배려받지 못하는 상황들을 더욱 뾰족하게 송곳처럼 뚫고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 아이를 사랑하는 게 맞을까?'라는 의문으로 출산 그리고 육아를 시작한 수지 님은 여전히 이 너른 세상과 아이라는 우주를 탐험 중입니다. 수지 님의 따뜻한 미소와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지 함께 이야기 들어주세요 :)
안녕하세요,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다섯 살, 세 살 두 남자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전업주부 김수지입니다.
반갑습니다. 주변인팬클럽 팬이시라고 들었어요., 저희 인터뷰 채널 왜 관심 가져주셨는지?
사람들이 살면서 특히나 우리 이전 세대에서는 한 가지 직장만 가지고, 좋은 직장 들어가서 배우자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이렇게 정형화된 길을 걷기를 바라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 정말 큰 결심을 하고 직장을 바꾼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 거라 진짜 의미 있다고 생각했고. 개인적으로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수지님도 굉장한 변화를 많이 겪으신 것 같아요. 10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 결혼과 출산까지 말이죠. ‘인생의 큰 변화를 맞이한’ 이야기들이 궁금해요.
대학원을 진학한 건 아버지의 권유였어요. 저도 괜찮다고 생각이 들어서 (진학하게 되었어요). 사실 복 받은 거죠. 대학원을 갈 수 있던 여건이 되었었던 거니까. 다행히 감사하게도 대학원에서 석사까지 하고 취업을 했어요. 제가 공부했던 게 외식경영이었는데, 학문에서는 한계를 느꼈어요, 필드(현장)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컸고 가서 직접 일하면서 배우는 게 더 맞겠다 생각했어요. (취업 준비 시절에) 학부생들이랑 같이 취업 스터디하고, 공개적으로 강사님에게 “넌 대학원생인데 여기 와있냐?” 그런 면박을 당하면서… (웃음) 스타벅스에서 일하게 된 것은, 그전에 알바를 했었어요. 저는 서비스업이 천직이거든요. 스트레스를 받을 뿐이지 진짜 잘해요. 사람의 눈빛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고객 니즈 맞추는 건 잘할 수 있어요. 사실 지친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러 오잖아요. 그럼 그 에너지가 저한테 다 오는 것 같아요. 이렇게 스타벅스에서 재밌게 일했던 경험이 있어서 대졸공채를 지원해서 매장관리직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어떤 부분이 재밌었어요?
저는 손님 만나는 게 좋아요. 일했던 매장들이 이태원, 한남동, 여의도, 삼청동같이 재밌는 동네였어요. 일을 하다가 그만두게 된 이유는 대외적으로는 가족이 아파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 직업이 미래에 별로 쓸모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로부터 얼마 뒤에 다른 프랜차이즈 외식매장들이 키오스크로 주문을 받기 시작했거든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아무리 스타벅스가 대면응대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그런 스타벅스도 사이렌 오더 시작하고 하면서 ‘이게 계속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의심이 들었던 것 같아요. 사실 일 자체는 힘든 일이거든요. 2교대에 주말 근무까지 해야 하다 보니 그만두게 되었어요. 다음에는 결혼을 하게 됐죠.
결혼하고 얼마 만에 아이를 갖게 되셨어요?
2015년 3월에 결혼을 하고 2017년 4월에 아기를 낳았어요. 결혼하고 처음 1년 중에 반년 정도는 남편이 사우디에 있었어요. 결혼하고 사우디에 갔거든요.
비교적 아이를 빨리 낳으셨는데, 아쉽지는 않으세요?
그런 생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대학생활이 참 재밌었거든요. 동아리가 재미있었어서 워낙 잘 놀았고(성악 동아리의 부회장!), 노는 거에 아쉬움은 없었고요. 결혼을 저는 하고 싶었어요.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혼자 살았거든요. 중간중간 부모님 잠깐씩 만나기는 했지만, 뭔가… 안정감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결혼해서 안정감을 찾을 수 있지만, 싱글의 삶도 어느 정도 되면 혼자 지내는 게 편하고 안정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어요. 이 안정감이 결혼으로 인해서 깨지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들어요.
오, 그렇죠. 그건 깨지죠. (웃음) 내 자아의 안정감은 또 깨지게 되죠. 하하하. 정신적으로 준비되었을 때 결혼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해야겠다.’ 이걸로는 어림 반푼 어치도 안되고 ‘이제 준비됐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제가 결혼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있는데, 결혼 준비 중인 지인에게 “결혼하는 게 좋아요?”라고 물어봤어요. “결혼을 통해 뭔가 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말고, 네가 온전히 혼자서 잘 살 수 있을 때 그때 결혼을 해라.”라는 말을 들었거든요. 근데 그게 되게 가슴에 와닿았던 것 같아요. 계속 그 얘기가 맴돌면서, ‘아… 나는 준비가 됐을까?’ 하고 결혼 전에 의심을 했던 것 같아요. 애인을 만나면서 이 사람이 없이도 잘 살 수 있지만 같이 살면 조금 더 잘 살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첫째 출산 후 얼마 안 있다가 둘째도 출산하셨잖아요. 요즘은 아이 둘 있는 집도 흔치 않은데, 자녀계획의 이유가 있었나요?
저는 결혼 전에는 애기 네 명 낳는 게 꿈이었어요.
가족이 화목하셨나 봐요!
제가 외동이어서, 반드시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그게 내 맘대로 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돈이 있어야 하는구나. 시간이 있어야 하는구나. 아유~ 안 되겠다.' 하고 한 명을 낳았는데, 신랑은 ‘무조건 둘은 있어야 된다.’라고 엄청 강하게 설득했어요. 자기가 남동생이 있는데 사이가 너무 좋아서 그런 경험으로 자기는 꼭 형제는 있어야 한다고, 또 키우다 보니 나쁘진 않겠구나…
여성에게 출산이란 인생의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굉장히 중대한 일이잖아요. 수지님은 출산 전후의 세계가 얼마나 다른가요? 다른 선택지를 가질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스물여덟에 아기를 가져서 스물아홉에 낳았어요. 주변에 결혼하고 아이를 출산한 친구들이 가깝게 있지는 않아서 그런 경험담을 전혀 모른 상태에서 얼떨결에 스타트를 끊었죠. ‘그냥 낳으면 되는 거 아니야?’ 하고 생각했어요. 인터넷이 안 좋은 게, 거기엔 아기에 대한 예쁜 모습, 아기를 사랑해야 할 것만 같은 모습들만 있잖아요. 인터넷 세상은 너무 행복해 보이는 거예요. 임신 때는 입덧이 심해서 고생했지만, 아기가 나오면 예쁘겠지,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애기가 나왔는데 웬 원숭이가 나와있는 거예요. 진짜 “헐" 이랬다니까요. (웃음) 다른 사람들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는데 눈물이 안 나는 거예요. ‘나는 엄마 자질이 없나 보다.’ 이런 생각도 들고 아이가 전혀 예뻐 보이지가 않으니까… 산후조리하고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아이가 하나도 안 예뻐 보이는 거예요. 너무 우울했어요. 저는 산후우울증이 거의 100% 온다고 생각하거든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시기도 조금씩 다르긴 한데, 저는 처음에 확 와가지고. ‘와.. 이거 무를 수도 없고, 어떡하지?’ 이런 생각이 되게 많이 들었어요. 그렇게 그렇게 그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웃기 시작하고 말하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좀 나아지고 예뻐 보이더라고요. 아기랑 둘이 있으면 저는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요.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신랑이 어린이집에 보내자고 제안했어요. 어린이집이 보내기가 어려운데, 운이 좋게 대기가 빠져서 연락이 온 거예요. 그때 큰 애가 11개월이었는데 고민을 정말 많이 하다가 아침에만 한두 시간만이라도 보내자고 결정했어요. 나의 힘듦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이라서 보내게 되었고 너무 좋은 선생님 만나서 아기가 너무 잘 컸고 그제야 둘째 생각이 조금씩 났던 것 같아요. 근데 그전까지는 정말 결혼을 무르고 싶은 순간도 있었어요 (웃음)
사회생활을 하다 육아를 하게 된 주변인을 보면, 육아가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복직하고 싶어 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저는 오히려 다른 친구들한테 네가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해도 돌아가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퇴직하지 말라고 하는 게, 저는 그게 더 우울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 나는 이렇게 젖 먹이다가 내 인생 끝나려나 하는 생각이었어요. 이게 미래를 잘 모르니까, 이 시간이 지나면 뭔가 있을 거야.라는 걸 모르니까. 그냥 두려웠던 것 같아요. 오히려 둘째 낳고 더 괜찮았어요. 둘째 낳고 나서는 시간 빨리 간다. 시간이 좀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 마음이 들 정도로.
그럼에도 '엄마'가 되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도 조금은 달라지셨을 것 같아요.
저희가 이사하기 전에 도심에 살았었어요., 지하철 버스 타면 정말 아무도 양보를 안 해줘요. 아이를 안고 있고 짐을 들고 있어도, 양보해주는 경우가 정말 많이 없어요. 지하철은 임산부 자리가 있고 노약자 석이 있긴 하지만 눈치가 굉장히 많이 보이고.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경우에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면 노인분들이 절대 안 비켜줘요. 저는 그런 상황들을 보면서, ‘도대체 왜 이럴까?’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어요. 임신하면서 약자가 된 경험을 처음 해보는 것 같거든요. 대학생활, 직장생활, 20대 청년 이런 사람이었다가 갑자기 임신을 하면서 약자가 되었잖아요. 그러다 보니 약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겼어요.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왜 차가 안 멈추지?’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차가 멈춰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게 저도 유모차 끌고 다니면서 그제야 들었어요. 저도 그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죠. ‘노인들이 왜 양보해주지 않지?’ 신랑이랑 생각하다 보니, ‘아 도시 노인들이 굉장히 팍팍하게 사는구나.’ 너무 힘들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사회의 현상을 보면서 ‘다 이유가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지경이 넓어졌고, 교만하게 들릴 수 있지만 ‘아 저 사람도 사정이 있겠지, 그래 뭔가 문제가 있겠지. 저 사람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어.’ 그리고 또 다른 건 인내심. ‘참고 또 참아야 하느니라.’ 아이가 성장하는 만큼 부모가 성장한다고 하잖아요. 정말 맞는 이야기 같아요. 매 순간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려요.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인생에서.
과거에 비해 요즘은 아이들이 지내기에 여러모로 팍팍한 세상이 된 것 같아요. 이런 시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데 장벽이 무엇인가요?
첫째는 코로나가 없을 때, 둘째는 코로나가 있을 때 키웠잖아요. 그게 너무너무 커요. 일단 밖에 못 나가고 마스크를 써야만 하니까. 18개월 둘째가 마스크 쓰는 데 적응을 했거든요. 그게 얼마나 안타까운 지 몰라요. 밖에 나가지 못한다는 거.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는 거. 그게 제일 힘든 일인 것 같고. 특수한 이 상황을 제외하고 나서는 저는 미디어가 제일 통제하기 어려운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뾰족한 수가 없어요. 진짜 안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은 계속 들어요. 왜냐하면 아이가 그걸 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멍 때리듯이 그런 얼굴로 보고 있거든요. 다른 주변 소리도 못 듣고. 아이들이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없잖아요. 어른들도 넷플릭스 보다 밤새고, 유튜브 보면서 ‘어? 이게 또 떴어?’하면서 알고리즘에 넘어가는데. 아가들이 광고 넘기기도 할 줄 알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철칙이 ‘핸드폰은 쥐어주지 않겠다.’에요. 저희 집엔 티브이가 없는데 부모님 댁에 가면 아이들이 티브이를 실컷 보거든요. 영상에서 나오는 만화를 차로 이동할 때 오디오로 틀어줘요. 갈 때는 엄마 라디오 올 때는 너희들 것, 그게 정해져 있어요.
큰 아이를 공동육아 조합 유치원에 보내시잖아요, 어떤 곳인가요?
공동육아 조합은 부모들이 조합을 만들어서 출자금도 내고, 조합원으로서 어린이집 운영에 참여를 하면서 동시에 교육에 대해서는 원장 선생님에게 일임을 하는 곳이에요. 회계, 운영, 청소 이런 거를 부모들이 담당해요. 선생님들 월급을 부모들이 주는 거죠. 연말에 총회 열고 선생님들 임금 같은 것들로 회의하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아직 2년 차라 잘 모르지만(하하)
공동육아 조합 유치원을 선택하신 이유도 궁금해요.
사교육을 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자신은 없더라고요. “너는 안 해?”이런 질문들… 사교육 열풍이 심한 곳에서는 “어머니, 왜 아이를 방치하세요?”라고 얘기하기도 한대요. 그럼 이제 엄마들이 사교육에 달려든다고 하더라고요. 사교육을 시키고 싶지 않았고 그런 공동체를 찾아서 들어간 거죠. 공동육아 조합 유치원 울타리 안에 들어가면 다들 사교육을 시키지 않으니 나도 시키지 않겠지 하는 마음이었어요. 처음 알게 된 건, 남편의 회사 동료가 이미 공동육아로 아이를 키워서 초등학교를 보냈더라고요. 저희도 알아보고 마침 근처에 공동육아 어린이집이 있어서 보내기로 결정했죠.
유치원에 만족하시나요?
아이는 너무 만족해해요. 공동육아의 교육적 특징은 일단 외부활동이 많아요. 아이들이 놀이를 주도하게끔 하는 시스템이에요. 아이들이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내고 선생님은 보조해주는 식으로, 전반적 프로그램이 교사의 재량에 많이 맡기고 있어요. 그리고 수평 어를 써요. 선생님이랑 아이들이랑 엄마 아빠랑 다 별명을 부르거나 이름을 불러요. 수평어라는게 반말인데, 처음에 방문했을 때 어떤 아이 옆에 앉아있었는데 저보고 “이름이 뭐야?” 라고 묻는 거예요. 너무 충격적이잖아요. 내가 수평어를 쓴다는 걸 알긴 했지만 네 살 아이가 너 이름이 뭐야?라고 묻는 건. (당황해서) “ 어? 나? 나… 수지..!” 그러니까 막 옆에서 선생님들이 엄청 웃더라고요. 하하. 사실 아이는 별명을 물어본 거였는데… 또 인지교육을 안 시켜서 좋아요.
첫째 낳으시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신 후 문화유산해설사가 되셨잖아요. 그 스토리도 궁금해요.
남편이 어느 날 창경궁을 갔다 오면서 문화유산해설사를 모집한다는 플래카드를 본 거예요, 그걸 보더니 자기는 꿈이 나중에 문화유산해설사하면서 한복 입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설명해주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주말 반이었는데 주말이니까 같이 해보자 해서 과정을 시작했는데, 신랑은 시험을 못 치고 저만 시험을 치고 끝냈어요. 그 이후로 저는 전문가 과정을 했어요. 어쩌다가.. 전문가 과정을 이수한 사람을 대상으로 영어 해설사 과정이 있었는데, 프리랜서처럼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길이었어요. ‘큰 아이 어린이집 보내면서 한 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서 어떤 일을 했냐면, 청소년 해설사를 양성하는 과정 중에 영어해설을 하는 해설사 친구들이 있었어요. 저는 주로 경복궁에서 활동했는데, 경복궁에 찾아온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가서 “내 해설 들어볼래?” 물어보면서 그거에 응하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시간여 정도 투어를 돌고 오는 프로그램이에요. 그걸 하면 이 청소년 해설사 친구들은 봉사활동 시간도 받는데 수요가 많아져서 선생님을 많이 구하게 된 거죠. 청소년 해설사를 케어하면서 가르치는 영어 해설사 선생님 인 셈이죠. 감사하게 일을 하다가 둘째를 출산하면서 스탑 하고, 저한테 “선생님 언제든 돌아올 수 있으니까 연락 주세요.”라고 했는데 코로나가 터졌잖아요.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까. 일단 관광객이 없고, 줌으로 진행하고 이러니까.. 힘들어 보였어요. 아직 저는 돌아가지는 못하고 있죠.
문화유산해설사로 일하실 때는 어떠셨어요?
재밌었어요. 문화재 공부하는 것도 재밌고, 외국인들 대상으로 하는 거 되게 재밌어요. 외국인들이 궁금해하는 포인트들이 다르거든요. 되게 뜬금없는 거 물어보기도 하고, 보는 시각이 좀 다른 것 같아요. 그리고 진짜 케이팝의 영향이 엄청나서 다 BTS..(ㅋㅋㅋㅋ) ‘두 유 노 비티에스 ㅋㅋㅋ?’ 애들 가르치는 게 신경 쓸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재미있어하고 의미 있는 일이기도 했죠.
아까 외식업계에서 일했을 때는 ‘이게 의미가 있나?’하는 생각이 있으셨다고 했는데, 방금 문화해설사 일은 ‘의미가 있었다.’라고 하셨어요. 어떤 포인트에서 의미를 찾으신 건가요?
그때 나름의 의미가 있었어요. 손님들 만나고 했던 일에서 그 손님들이 나랑 만나는 이 짧은 시간에 기분이 좋아졌으면 하는 목표가 있었거든요. 계속 (손님과) 같이 가는 맥락인 것 같아요. 지금도 저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나 봐요. 아닌가? 싶었는데 사람들에게 상처 받고 하는 시간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시간을 거치면서는 ‘나는 사람 만나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 타입은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를 낳고 들었던 생각을 보니 사람을 못 만나서 그런 거 같거든요. 조리원에서 있는 2주가 잘 먹지도 못하고 사람도 못 만나는 시간들인데, 그 시간이 진짜 우울하거든요.
아이들이 좀 더 크면 또 다른 일에 도전해보고 싶으세요?
저는 직업여성이고 싶어요. 고민을 하다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볼까?'처럼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봤어요. 내가 다시 9-6, 남들이 말하는 좋은 직장 아니면 전문직이 되기에는 나이도 좀 있고 쉽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 인터뷰 부제가 어떻게 달렸으면 좋겠나요?
음.. 행복한 우주 먼지. <유퀴즈>가 제가 제일 사랑하는 프로그램이거든요. 일주일에 그거 하나 보는 게 인생의 낙인데, 거기에 천체사진 찍으시는 분이 나와서 그런 표현을 쓰셨어요. 행복한 우주 먼지라는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할 수 있는 일하고, 시작할 수 있는 일 해보자, 내가 뭐 대단한 거라고. 먼지인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혹시 10년 후에는 어떤 모습이 될 것 같나요?
10년 후예요…? 생각 안 해봤어요 그런 건. 제가 아이 낳고 생각한 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거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계획대로 된 거 하나도 없어요 여태까지. 그리고 상황도 시시각각 바뀌고, 그랬기 때문에 10년 후는 너무 먼 것 같아요.
마지막 한마디?
오늘 재밌었어요. 나를 좀 돌아보는 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