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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짜는 진 Sep 05. 2020

어쩌다 '베짜는' 백수가 되었나요?

한 곳에 머물러 살고 싶으나 역마살을 타고난 사람처럼

그렇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다시 -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도 나는 작업을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사실 '다시'라는 말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지만 어쨌든 - 작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작업만 할 수 있다면 문제 없다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할 줄 알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작업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작업에 있어서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 판단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다는 게 장점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작업을 시작한 후에 알았지만 스스로 판단하여 혼자서 결정하는 일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작업을 할 것인가, 어떠한 형태로 작업실을 운영할 것인가, 수익은 어떻게 낼 것인가 - 고민이 많았다.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하면서 수익을 내고 그 외의 시간에는 내 작업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가장 먼저 정해야 할 것은 기법이었다. 전공 수업에서 다뤘던 염색, 직조(=베짜기), 자수를 후보로 정했다.


일단 자수는 싫었다. 배우는 사람이 많은 만큼 가르치는 사람도 많은 것은 둘째치고, 자수라는 기법 자체가 내 취향에 맞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직조나 자수나 가만히 앉아서 꼼짝않고 실과 씨름하는 것이니 별 차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직조와는 달리 자수를 할 때면 나는 항상 그야말로 '좀이 쑤셔서 미쳐버릴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단청> 2009. 전통자수 (부분) - 매일 머리털을 쥐어 뜯으며 간신히 완성했었다.



그에 비해 염색은 좋기는 한데 이러저러한 설비가 필요했고, 기계를 들여놓기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했다. 아무리 처음 시작할 땐 투자가 필요하다지만 이거 괜찮을까? 싶었다.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한다 생각해봐도 여러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을 것 같고, 도전보다는 모험에 가까울 것 같았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드로잉에 자신이 없다는 점이었다. 염색은 결국 천에 염료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가. 염색 기법만 알고 드로잉에 자신이 없는 상태라면, 염색으로 작업을 하고 사람을 가르치기에 나는 '반쪽짜리' 인간이었다. 기법에서 영감을 얻어 작업을 하거나 무엇을 표현할 것인지를 정하고 그것에 맞는 기법을 찾아야하는데, 내게 염색은 둘 다 어려운 일이었으니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직조를 선택하게 되었다. 마침 새로운 취미로 '위빙weaving', 그러니까 직조가 조금씩 유행하기 시작했고, 내가 작업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뭔가'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 작업할래."


"그래"

다짜고짜 작업실을 열겠다는 나의 말에 부모님은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대답하셨다.

"뭐 할건데?"

"베틀 살거야. 직조할래."

"그래~ 잘 생각했어. 너 음력 칠월 칠석에 태어났잖아."


출처: 네이버 음력 양력 변환기


소설이라면 설정과다라고 생각했겠지만, 이것은 분명히 내 인생이고 현실이었다.



가끔 사람들에게 '내가 베틀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베틀에게 간택당한 느낌이 든다.'고 말하면 다들 웃거나 낭만적(?)이라고 했지만, 정작 나는 결코 웃을 수 없었다. 이것은 나에게, 마치 내가 '한 곳에 머무르며 안정되게 살고 싶으나 역마살을 끼고 태어나 떠돌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작업을 하지 않고도 잘 지낼 수 있었다면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작업을 안 했을텐데, 베를 짜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나 어쩔 수 없이 베틀 앞에 앉게 된 것 같았다. 세상 모든 일이 베짜기를 향해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 같았다.


설정과다인 소설 속 주인공이 되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나는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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