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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 : 수프와 이데올로기

by 설렘책방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따뜻한 한 그릇의 수프처럼, 세월을 지나 누군가의 삶에 스며든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감독 양영희가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제주 4.3 사건의 기억을 되짚어가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폭력 속에서도, 가족의 사랑과 음식의 온기가 어떻게 서로를 이어주는지 보여주는 영화지요.


이 영화에서 말하는 수프는 '삼계탕'이랍니다.





일본에서 살아온 재일 한국인 양영희 감독이 결혼 상대로 일본인 남자와 함께 오사카에 거주하는 어머니를 찾아갑니다.

절대 일본인 사위는 안된다던 어머니는 닭의 배가 터지도록 마늘을 채우고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삼계탕을 끓여냅니다. 수줍은 웃음도 끊이지를 않습니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개인의 기억이 역사가 되고, 과거의 아픔이 이해로 변화하는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와 닮아 있어요.

두 작품 모두 제주 4.3 사건을 경험한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교과서에도 몇 줄밖에 명시되지 않은, 그 역사의 목격자들이 고통과 기억을 품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랜 시간을 침묵하다 딸에게 그 날의 기억을 조심스레 꺼낼 때 "절대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는 모습도 같습니다.



"몰른다고 내보내야 하는 것을 알멍도 이상하게 대답을 하고 싶었죠. 꼭 내가 그 사름을 기다렸던 것추룩. 누게가 이걸 물어봐주기만 기다리멍 십오 년을 살았던 것추룩." (작별하지 않는다. p.230)


소설 속 또 다른 목격자처럼 사실 그녀들도 말하고 싶었습니다. 외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보았던 참상을, 내 가족의 억울한 죽음을, 남은 이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숨죽일 수 밖에 없었던 두려움을...

그래서 그녀들의 고백에 그 무게와 용기를 느낄 수 있었어요.

말하지 못한 것이 잊힌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것을 기억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치매로 기억이 흐려지는 어머니를 모시고 양영희 감독은 4.3 70주년 기념행사로 제주도를 찾아갑니다.

어머니는 세 살 된 여동생을 업고 도망치듯 일본으로 밀항 한 후 첫 방문이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4.3 사건의 현장을 둘러보고 글로 자료로 실상을 마주한 감독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제주도 출신이지만 열렬한 조총련 활동가였고 세 아들을 북한에 보내 평생 뒷바라지를 하는 부모님에 대한 반감이 컸던 감독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족과 이웃, 친지들을 그렇게도 혹독하게 죽이고 짓밟은 남한 정권을 믿을 수 없다던 부모님의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불신이 세 아들의 북송이라는 또 다른 비극을 낳았으니, 이 가족의 회한의 시간은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요?


과거의 가해자들은 사건을 덮으려고만 했지만 세상으로부터 고립시켰던 눈이 녹아 봄이 오듯 그날의 기억은 영화가 되고 소설이 되어 세상에 퍼져 나갑니다.





양영희는 제 식구들 이야기를 계속 우려먹고 우리는 계속 곱씹어야 합니다.


양영희 감독의 에세이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에 쓰인 박찬욱 감독의 추천사인데요.

단순히 고통을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마주하고,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며 연대하는 것이 과거를 반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저 역시 제 안에 쌓여온 기억과 감정들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 때문에 응당 그래야만 했지만 상처가 된 기억을 떠올려봅니다.

이해가 되지 않던 어른들의 태도에도, 사실은 이데올로기와 역사가 그들의 삶에 체화된게 아니었을까요?



어머니의 수프에는 시간이 들어 있어



음식은 단순한 한 끼가 아니라, 살아온 시간과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어머니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상처럼,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기억은 스며들어 있어요. 그리고 그 기억이 누군가에게 건네질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어떤 밥상을 준비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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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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