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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비밀 : 더 리더-책읽어주는 남자

by 설렘책방







열다섯 살 소년 마이클이 하굣길에 쓰러졌던 그날. 그를 도와준 사람은 전차 검표원으로 일하던 성숙한 여인, 한나였습니다.


그 날의 비가 눈으로 바뀐 것처럼, 두 사람의 삶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감사함에서 시작된 인연은 이내 은밀한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책을 읽어주는 소년과,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여인.

한나는 책을 통해 웃고 울고 감정이입을 하며 이야기의 세계에 푹 빠져듭니다.
마이클은 처음으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아 벅차오르고, 한나는 그의 순수함 앞에서 오래 굳어 있던 마음을 조금씩 풀어냅니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지요.

많은 나이 차이, 사회의 시선, 서로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

그 은밀함은 곧 고통이 되어 두 사람을 갈라놓습니다.


친구들이 준비한 생일파티도 마다하고 달려온 마이클에게 화를 내고는 마이클을 구석구석 씻겨 주는 그녀의 손길은 어떤 의식을 치루는 것 같았습니다.

사랑을 나누고 나서, 마이클을 친구들에게 돌아가라고 보내준 후...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세월이 흘러,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나치 전범 재판에서 피고인으로 선 한나의 이름을 듣게 됩니다.
한나는 과거,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내는 일에 관여했던 인물로 기소된 것이지요.

재판 도중, 마이클은 문득 한나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게 됩니다.
글을 모른다는 수치심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그녀는 자신이 보고서를 썼다는 허위 진술을 하며 죄를 뒤집어쓰는 쪽을 택합니다.


재판 결과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진실.

미래의 법조인으로서 법정에서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지만 그녀가 그토록 숨기고 싶어한다는 것을 공감하는 마이클은 혼란스러워합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멈춰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그렇게까지 지켜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오히려 수치심을 직면하고 받아들였더라면, 한나는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던 건 아닐까요?



이 영화는 다양한 층위의 ‘숨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글을 배우지 못한 부끄러움,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는 관계,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묻힌 양심의 죄책감.
그 모든 비밀은 사람들을 침묵 속에 가둡니다.


한나는 감옥에서 마이클이 보내온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며 처음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뒤늦게 자신을 마주하고, 짧은 편지를 써 마이클에게 전합니다.
하지만 마이클은 끝내 답장을 하지 못하지요. 결국 석방을 앞두고, 한나는 세상을 떠납니다.

남긴 유서에는 자신의 전 재산을 유대인 생존자에게 기부해 달라는 말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녀 나름의, 조용하고 늦은 사과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사랑하는 딸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했던 마이클은 딸과 함께 한나가 묻힌 공동묘지로 갑니다.

한나와 마이클이 가장 사랑했던 시절에 떠났던 자전거 여행.

한나의 영혼에 아름다움이 쏟아지던 그 교회 옆에 한나는 묻혀 있습니다.

그리고 마이클은 딸에게 담담히 들려줍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영화를 보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과연 바뀔 수 있을까?
사랑은 모든 것을 감쌀 수 있을까?
죄는 반드시 단죄되어야만 할까?


이 질문들에 대해 영화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습니다.

그 대신 복잡한 감정들과 책임, 인간의 본성 사이에서 우리 각자가 깊이 고민해 보게 하지요.

우리도 그런 비밀 하나쯤은 마음에 품고 살아가지 않으신가요?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어려운, 아주 작고 사적인 이야기들.
그 비밀을 숨긴 채 버티는 것도 삶의 방식일 수 있지만, 때로는 그것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용기가
우리를 더 단단하고 깊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
그 침묵의 시간을 지나, 우리는 비로소 진짜 나를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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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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