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청춘이 있습니다.
이름은 츠네오.
마작 게임방에서 심야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을 다니는 학생입니다.
그에게는 사랑도 가벼운 오락과 같았습니다. 가끔 잠자리를 함께 하는 친구에게 썸녀 카나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지요.
그리고 또 한 청춘이 있습니다.
다리가 불편한 자신의 존재를 부끄러워하며 숨기기 급급한 할머니의 보호 아래 세상과 단절된 소녀.
벽장 속에 지내는 그녀가 세상을 배우는 방법은 할머니가 주워 온 책들입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한달 후, 일년 후>의 주인공 조제를 동경해 조제라고 불리길 원하지요.
활자로만 가득한 세상이 갑갑한 조제의 유일한 낙은 인적이 드문 시간, 할머니가 밀어주는 유모차를 타고 동네를 산책하는 것입니다. 집 밖의 세상이 두려워 식칼을 손에 꼭 쥐고 있지만, 하늘, 꽃, 풀... 그런 소소한 풍경을 보는 것이 좋았어요.
그런데 이 기묘한 산책이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유모차 안에 큰 돈이나 마약이 들어있을 거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게 되었지.
어느 날 괴한의 습격에 할머니는 유모차를 놓치게 되고 속수무책으로 언덕길을 달리는 유모차 속 조제를 츠네오가 구해주게 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할머니는 아침 식사를 대접하시고, 낯설고 불편했던 자리에서 츠네오의 마음을 열게 만든 건 조제의 뛰어난 요리 솜씨였습니다.
처음엔 우정인지 연민인지 알 수 없던 감정은, 점점 조제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으로 변해갑니다.
그는 조제를 숨기려 했던 할머니를 설득해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가까워진 두 사람은 서서히 사랑의 감정을 나누게 됩니다.
하지만 츠네오의 연인 카나에가 조제의 집을 찾아오고, 무심코 꺼낸 말들로 조제는 상처를 입습니다. 마음을 닫은 조제는 츠네오를 집에서 내쫓고, 결국 두 사람은 멀어집니다.
시간이 흘러 조제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 츠네오는 다시 그녀를 찾아갑니다. 힘든 삶을 견디고 있던 조제는 처음엔 그를 밀어내지만, 돌아서려는 츠네오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으며 두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시작합니다.
이후 1년 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결혼을 생각하게 된 츠네오는 조제를 부모님께 소개하기로 결심하고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현실의 벽 앞에서 점점 지쳐가고,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됩니다. 사랑이 식어서였는지, 지쳐서였는지. 츠네오는 끝내 조제에게서 도망쳐버립니다.
담담히 이별하고 돌아서던 츠네오는 결국 주저앉아 오열을 합니다.
자신의 비겁함, 나약함을 탓했을까요.
그렇더라도 츠네오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함께 하는 시간동안 두 사람은 충분히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닷 속에 살던 조제를 츠네오는 물 위로 끌어올렸습니다.
빛도 소리도 없던 그녀의 삶에서 물결 위로 반짝이는 빛을 선물했습니다.
벽장을 열고 나와 넓은 세상 속의 한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걸로 그의 역할은 충분히 다 해 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제도 츠네오에게 사랑의 무게를 알려 준 소중한 존재입니다.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만나야 할 때 만나고 헤어질 시기가 되어 자연스럽게 멀어집니다.
세상의 순리를 받아들여 이 순간을 사랑하며 살다보면 헤어짐의 아픔도 지나가고 더 단단하게 나아갈 수 있지않을까요.
과거의 인연이, 그 때의 우리가 그리워 쓸쓸한 날에 저는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봅니다.
그리고 그때의 나를, 그때의 사랑을, 천천히 쓰다듬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