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정원>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제작한 극장 애니메이션으로
2013년 5월에 일본에서 개봉했습니다.
한국에서도 같은 해 8월에 개봉했었고 <너의 이름은>의 흥행으로 다시 화제가 되어 2017년에 재개봉하였습니다.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스즈메의 문단속> 등 연이은 히트작을 냈지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초기 작품들의 섬세함이 저는 좋아요.
벚꽃잎이 떨어지는 속도 <초속 5센티미터> 팬들도 많으시죠?
신카이 감독은 빛의 마술사, 색채의 마술사라고 불리우는 만큼 이 작품도 영상미가 뛰어납니다.
비가 내리는 배경, 빗방울이 바닥에 닿았다 튀어오르는 장면 등, 감탄을 자아낼만큼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이미 십년 전에 개봉 된 작품이라 줄거리와 작품 해설들은 많이 접하셨을거라 생각이 되니 저는 애니메이션의 제목 "언어의 정원"에 대해 얘기해 볼게요.
"언어의 정원"이라는 제목만 들었을 때 어떤 의미지? 갸우뚱 했고 얼핏 우리 전래 동화에 나오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라고 외치는 대나무숲도 떠올랐어요.^^
물론 이 애니메이션은 다른 감성입니다. 제목의 의미를 알고 이 작품을 본다면 빗물에 움직이는 나뭇잎들이 여러분 마음의 물결을 일으키리라 생각합니다.
원제는 <言の葉の庭 > 입니다.
일본어를 좀 아시는 분들은 왜 '말''언어'라는 단어 言葉(고토바)가 아니고 중간에 の(노)를 넣었지? 라고 생각하실텐데요.
言の葉(고토노하)라는 단어는 일본의 만엽집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만엽집은 일본의 최고 오래 된 시가집입니다.
629년부터 759년까지 130년간 지어진 일본 시가를 4516수나 모아놓았으니 정말 대단한 시가집이지요.
만엽집에 표기된 ‘말씀 언(言)’과 ‘잎 옆(葉)’자를 합쳐 ‘언어의 잎새’라는 말이 지금의 ‘언어(言葉)’로 정착이 되었다고 합니다.
옛날 일본사람들은 마음 속 생각이 자라 싹을 틔우고 잎사귀를 피우는 게 곧 언어라고 생각했대요.
만엽집은 마음 속 생각의 잎사귀를 따다 책의 갈피갈피 모아놓은 것입니다.
4516개나요. 너무 낭만적이죠.
비슷한 시기 신라에는 향가라는 시가가 있었는데 안타깝게 지금까지 원형이 남아있는 것은 14수밖에 되지 않습니다.
향가는 한자의 뜻과 소리를 가차한 향찰로 쓰여졌는데 만엽집도 한자의 발음을 가져와 만요가나로 표기돼 있다고 합니다.
봄 (春)은"波流 "(하루-물결의 흐름)이라고 쓰고, 제비꽃 (菫)는"須美礼"(스미레-온순하고 아름다운 인사) 라고 표기되었지요.
겨울내 꽁꽁 얼었던 물이 봄이 되어 졸졸 흐르는 모습이나 바닥에 핀 제비꽃을 보기 위해 몸을 낮추는 동작이 그려지시나요?
그런 정경이 만요가나에 녹아있다는 점에 착안한 신카이 감독이 언어의 회화성을 이 작품의 분위기로 잡았다고 합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일본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랑 애 자를 쓰는 愛(아이), 그리울 연 자를 쓰는 恋(코이)입니다.
恋는 남녀간의 사랑, 설레는 기분, 내 감정이 중심인 느낌이고 愛는 좀 더 큰 범위의 사랑,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것 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 남녀 간에 "愛してる(아이시떼루)"를 말할 수 있는 관계는 깊은 사이라고 할 수 있죠.
"연애(恋)는 근대가 되어 서양에서 수입된 개념이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일찍이 일본에는 연애는 없고, 단지 사랑 (恋)이 있을 뿐이었다."
신카이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히며 그 사랑에 대해 <언어의 정원>에서 다루었습니다.
사랑, 그 이전의 사랑이야기.
그렇게 탄생한 광고 문구인데 여기가 또 예술이에요.
영화판 광고에 쓰인 이 문구에 만요가나가 표기되어 있어요.
고독과 슬픔(弧悲)이라고 쓰고 사랑(恋)이라고 읽는거죠. (둘 다 발음은 '코이'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사랑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이 기쁘고 설레기만 하면 참 좋으련만 오히려 사람을 고독하게 만들고 슬프게 만들기도 하지요.
1300년 전에도 사랑은 그런거였어요.
한국에서 처음 개봉했을 때 “愛よりも昔、弧悲のものがたり”
이 문구를 “사랑, 그 이전의 사랑”이라고 번역을 했을 때 좀 아쉽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愛와 弧悲의 차이가 전혀 드러나지 않아서요.
번역자도 많은 고민을 했었나봐요.
재개봉 당시 포스터에는 “사랑 보다 더 오래된, 고독과 슬픔에 관한 이야기” 라고 수정되어있지만 일본어에서 오는 강렬한 정서에는 조금 못미치는 느낌입니다.
영화보는데 크게 지장이 없어요.
다만 언어의 맛을 즐기는 한 사람으로써 조금 아쉬울 뿐이지요.
만요가나는 아니지만 일본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단어가 있는데요.
바로 片思い(카타오모이) 입니다. 조각 편 자와 생각 사를 쓴 한자의 조합으로 유추되는 말이 있을까요?
이 片思い는 짝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처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를 떠올려보면 정말 하루 종일 그 사람 생각이 나잖아요. 저만 그런가요?
그 사람이 내 마음을 모르지만 일방적으로 한쪽에서만 생각하는 그 마음이 이렇게 잎새를 피웠네요.
그 사랑이 짝을 이뤄 서로 좋아하는 것을 両思い(료-오모이)라고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것이지요.
저도 가끔 일본어 통,번역을 할 때가 있는데 1대1로 대응하는 단어를 찾을 수 없을 때 난감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본어 중에 “木漏れ日(코모레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이라는 뜻인데요.
하늘을 가린 나뭇잎과 나뭇잎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 그 환함이 느껴지시나요?
코모레비, 딱 4음절의 명사로 표현할 수 있는 이 정경을 우리는 설명해야 합니다.
그게 좀 속상하다고 하니 우리말 능력시험을 준비하던 지인분이 아름다운 우리말을 알려주셨어요.
볕뉘 – 작은 틈을 통하여 잠시 비치는 햇볕.
그늘진 곳에 미치는 조그마한 햇볕의 기운.
코모레비와 조금 달라요.
저의 상상으로는 코모레비는 위를 올려다봤을 때 눈에 들어오는 빛의 느낌이고
볕뉘는 벽이나 바닥에 빛이 누운 느낌, 빛이 묻어난 느낌이 강하네요.
따뜻한 온기까지 그려지는데 단 2음절로 끝냈으니 볕뉘의 승리인가요? ^^
언어의 정원에는 유키노와 다카오의 마음이 싹을 틔어 만든 잎사귀들로 정원을 이루었습니다.
유키노는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길 바라며 만엽집에 실린 시를 빌어 잎사귀 하나를 피웠습니다.
다카오 역시 답가로 그의 마음을 표현하였지요.
다른 가지에 잎사귀들이 풍성해졌습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그 곳을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마음들, 전하지 못한 마음, 들켜버린 마음, 용기를 내어 전한 마음, 기쁜 마음, 외롭고 슬픈 마음 속 생각이 잎사귀가 되어
이 장마를 견디면 푸르게 푸르게 짙어진 정원이 되겠지요.
겨울이 되어 잎사귀가 시들어 떨어져도 다음 봄이 오면 이 정원에는 또 다른 언어가 들려올거라 상상이 됩니다.
저는 이 애니메이션을 본 후
恋 、 弧悲 、愛、 片思い、 両思い、 木漏れ日 , 볕뉘 라는 언어의 잎새를 따며 정원을 거닐었습니다.
언어에서 느껴지는 제 마음을 들여다봤어요.
사랑에 빠졌던 순간, 외로웠던 기억, 설레는 일, 나뭇잎을 흔들리게 하는 바람에 대한 경외감, 따스한 안심 등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언어에 숨어 있는 심상 찾기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저를 또 알아갑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잎새를 하나하나 모아 보는건 어떨까요?
잎새가 푸르게 돋아난 정원을 꾸미고 들여다보고 가꾸는 삶이 자신에게 큰 힘이 될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