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이 된 저희 딸은 얼마전부터 남자 아이돌 그룹에 푸욱 빠져있습니다.
컴백날짜를 기다리고, 앨범을 사고, 포토카드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고, 뮤직비디오, 무대 영상을 시간 날 때마다 돌려보고, 멤버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요.
거실, 안방,부엌 등 늘 엄마가 보이는 곳에서만 놀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자기 방 안에 들어가 아이돌과 자신만의 시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엄마가 방문을 두드리면 귀찮아합니다.
가족이 세상의 전부였던 마음에서 타인으로 사랑이 확장되는 것이 그 아이의 성장과정이겠지요. 그 모습 또한 귀하고 이뻐서 엄마의 서운함은 한 쪽으로 밀어둡니다.
어느 날 우리 오빠가 범죄자가 되었다. 나는 실패한 덕후가 되었다.
수년 전 세간을 떠들썩 하게 했던 버닝썬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사건 당시 줄줄이 엮이어 터지던 범죄 사실들에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죄질에 비해 가벼운 형량때문에 분노했만 금세 또 잊고 저는 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지만 충격과 배신감으로 힘들었던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사건에 연루된 연예인의 팬들입니다.
그 중 정준영의 팬, 성공한 덕후이자 팬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던 한 소녀가 자신의 삶을 뒤흔든 이 사건을 겪고
동병상련의 아픔 속에 있는 혹은 지나간, 실패한 덕후들을 찾아나선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영화 <성덕>의 감독 오세연은 1999년 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입학 해 이 영화를 만들 당시에는 대학생 신분이었습니다.
중학생 때 처음 정준영의 팬이 되어 덕질을 시작했고 첫 기차, 처음 가본 서울, 처음 해본 외박, 처음 사본 앨범, 처음 좋아해본 사람 ,그리고 처음 방문하는 법원.
많은 처음을 선사해 준 정준영 덕분에 웃프지만 영화감독으로 화려하게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오빠 눈에 띄고 싶고, 오빠를 웃게 해주고 싶어서, 팬싸인회장에 한복을 입고 찾아간 중학생 오세연은 소원대로 오빠가 기억해주고 TV에도 출연 할만큼 성덕이 되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오빠말에 전교 1등도 하고 그의 생각, 그의 행동에 영향을 받으며 오빠 명성에 누가 되지 않는 팬이 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오빠는 범죄자, 그것도 성범죄자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사랑했던 오빠를 이제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상실감에 혼이 나가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있는데 더 충격인 것은 아직도 그를 지지하는 팬이 남아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어떻게?
추억이 너무 많아서?
무슨 짓을 했는지 까먹어서?
원래는 착한 사람이어서?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이니까?
그동안의 모습이 가짜일리 없어?
함께 쌓아온 서사가 있어서?
그런 의문에서 시작 되어 우선은 상처받고 뒤돌아 선 타 팬들은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카메라를 들고 만나러 갑니다. 그들은 멀리 있지 않았어요.
조연출을 부탁한 다연씨는 공교롭게도 승리의 팬이었네요.
둘이서 굿즈 장례식을 열던 날. 지금까지 아끼고 아끼던 물건들을 태우려고 하나하나 꺼내면서 당시의 기억, 소중한 추억들을 이야기 할 때의 표정이 정말 행복해 보입니다.
지금의 오빠는 밉지만 그 때의 그는 아직도 그립고, 그래서 더 혼란스럽습니다.
오빠를 좋아했던 내 과거를 더럽힌게 너무 화가 나고 앞으로 할 덕질에 대한 열정을 식게 한 것에 대해서도 화가 난다는 팬도 있었습니다.
술 없이는 구오빠에 대해 얘기할 수 었다는 친구는 이제 연예인 좋아할바에 치킨 하나 사먹는게 더 낫겠다고도 합니다.
그동안 오빠들이 보여 준 멋지고 나이스한 모습들은 다 가짜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환상이었을까요?
팬들에게 보여 준 모습이 모두 거짓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비도덕적인 모습도 분명 그들의 한 부분입니다.
몰랐다고 하지만, 혹은 알았지만 모른 척 하고 싶었던 팬들은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있었어요.
죄를 지은 건 오빠들인데, 좋아했다는 것만으로도 자책,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팬들이 모두 피해자이기만 할까요?
그들도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버닝썬 사건이 일어나기 3년 전, 정준영은 여자친구의 신체를 불법촬영 한 건으로 조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30분만에 무혐의라고 밝혀졌고 최초로 기사를 쓴 박효실 기자는 정준영 팬들의 적이 되었습니다.
온갖 악플과 협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박효실 기자는 당시 임신 중이었는데 스트레스로 유산을 했고 그 이후에도 유산의 아픔을 겪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결국 정준영의 죄는 사실이었던 것이지요.
당시 "박효실 나쁜 사람"이라고 일기장에 적었던 오세연 감독은 기자를 만나 사죄를 했습니다.
진실이 밝혀졌고 지금에서라도 미안하다는 글을 읽으며 치유되는 느낌이라고 얘기했지만 그동안의 마음 고생이 떠올랐는지 박효실 기자의 목소리는 떨렸습니다.
상처받은 이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요?
연예인들의 논란을 보며 자신의 최애도 무슨 일 터질까봐 불안하지만 일단 믿어보기로 하고 자신을 위해 그 마음을 좋게 보관한다는 한 덕후의 말이 건강하게 들렸어요.
배우 조민기의 팬이었던 오세연 감독의 어머니는 처음 그 배우의 범죄 사실을 알았을 때 부끄러웠고 자신의 죗값을 치르지 않고 세상을 등진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상처로 마음 아파하는 딸에게 이렇게 위로를 건넵니다.
인터뷰에 응해 준 한 덕후가 미운 구오빠에게 건네는 당부의 말에 인간으로서의 걱정과 애정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시는 덕질을 하지않겠다던 실패한 덕후들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많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니까요.
덕질은 그냥 행복한 것이니까요.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하고 응원하는 에너지가 있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삶도 사랑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좋아했던 대상이 무너지고 나면 처음에는 황망하겠지만 곧 새로운 사랑으로 자신의 세상을 채울 수 있는 힘이 있는거지요.
결국 이 영화는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 대해, 사랑을 하는 대상이 아닌 사랑을 하는 주체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어요.
치열했던 덕질의 희로애락을 따라가다 보니 <성덕>은 기획부터 완성까지 약 3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2021년 부산 독립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고 2022년 개봉 후 누군가를 좋아했던 경험이 있는 이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2024년 3월 승리와 최종훈에 이어 정준영도 출소를 했습니다.
그 연예인들이 이 영화를 보기를 바라는 건 말이 안되는 바람일까요?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신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낌없이 사랑하고 그 힘으로 자신의 삶도 행복하게 지켜나가는 팬들의 건강한 태도를 배웠으면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고 올바른 삶을 덕질하고 스스로가 알아주는 성덕이 되길 그들에게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인 우리 딸의 덕질 혹은 사랑도 기쁘게 자라기를 바라며 오늘 글 마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