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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생활 단상

이사 단상

짐 속에서 건진 추억과 다짐

by Bridge K

이사와 관련된 속설이 제법 있다. 이사 갈 때 쌀이나 돈을 먼저 집에 들인다. 이사를 많이 하면 부자 된다더라. 비 올 때 이사하면 부자 된다더라 등등.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유사한 속설들이 많다. 실제 근거와 관계없이 구전으로 전해졌을 수도 있지만 이사 한 번이 주는 무게감이 얼마나 크길래 이런저런 이야기가 만들어졌는지 한편으로 이해는 된다. 집터 등 풍수와 관련된 이야기이든, 새 출발을 응원하는 이야기이든 결국 이사로 인해 받을 스트레스를 미리 경감시키기 위한 사람들의 마음 쓰임이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로 전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 가족도 짧은 기간 적지 않은 이사를 다녔다. 세입자 신분으로 계약이 만료되어 옮기기도 해 봤고 우리 집을 장만해서 입주차 이사도 했었다. 그리고 꽤 오래 살았던 그 정든 집을 떠나면서도 이사를 했다. 지금은 또 고향 같은 도시를 떠나는 시점에 있다.


이사는 단순히 짐을 옮기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 함께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서 켜켜이 쌓인 이야기가 한꺼번에 상자 속으로 들어가고 옮겨지는 총체적인 과정이다.
겉으로 보기엔 ‘버리고, 싸고, 옮기고’의 단순한 반복 같지만, 막상 손에 쥔 물건 하나하나가 나를 몇 년 전, 혹은 더 오래전으로 데려가곤 한다.
유행이 지난 낡은 컵을 들면 그 시절의 주방 풍경이 떠오르고, 낡은 수첩과 오래된 탁상 달력을 펼치면 잊고 있던 그 시절 추억과 고민들이 되살아난다.

올여름, 우리 가족의 이사 준비도 그렇게 시작됐다. 휴가를 틈타 집 구석구석을 뒤지며 정리하다 보니, 잠들어 있던 나의 과거가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 과정은 마치 오래전 클라우드 속 저장된 사진첩을 무심코 펼쳤다가, 하루 종일 추억 여행을 떠나버리는 기분과도 같았다.




명함집 속 인연과 그 시간의 도시

먼저 오래된 명함집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 직장에서의 명함을 시작으로, 잠시 머물렀던 공기업, 그리고 외국계 회사에서 해양 프로젝트 관리자로 일하던 때 등 내 젊은 날의 사회생활 뭇 인연들의 명함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직장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더라도 거제에 머무르고 있었던 시절도 마찬가지다.

명함 한 장 한 장은 작은 종이 조각이었지만, 그 안에는 내 젊은 날의 추억과 도전, 그리고 그 시절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친한 친구나 동료들의 명함을 수집하기도 했고 그 시절 업무 상 만나고 인사했던 분들의 명함도 명함집에서 찾을 수 있었다. 대부분 스마트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통해 어렵지 않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지만 명함은 또 다른 기억과 장소를 떠오르게 하는 마법의 주문서 같았다.


거제라는 도시가 내게 유난히 각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단순한 근무지가 아니라 인생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아침마다 보던 검푸른 바다와 거대한 선박의 실루엣,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지던 온갖 경적 소리, 퇴근길에 스며들던 소주 한 잔의 추억과 저녁노을의 조화…
명함집을 손에 쥐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 모든 장면, 장면이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처음에 겉표지만 보고 잠시 버릴까 고민했지만, 결국 조심스레 다시 수납함에 넣었다.
그건 단순한 명함집이 아니라 나의 청춘의 역사가 담긴 한 권의 ‘이정표’였으니까.


방황의 흔적이 담긴 물건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방황하던 시절의 흔적이었다.
바로 누렇게 색이 변한 공인중개사 수험서와 두꺼운 명리학 교재들이다.
공인중개사 책을 보니 부동산 붐에 편승해 재테크로 달콤한 제2의 인생을 꿈꾸던 한 때가 생각났다. 나름의 결의를 다지고 비싼 강의비까지 지불했지만, 책을 사기 전까지의 열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 봐도 새책이나 마찬가지였다. 퇴근 후 책상 앞에 앉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몇 달 뒤 아내에게 웃음 섞인 잔소리를 들었다.

“앞으로 제대로 안 할 거면 애초에 시작하지 맙시다.”
그 말속에는 농담과 진심이 반씩 섞여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무언가 새로운 걸 배우고 싶다는 욕심과, 현실에 충실하자는 마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결국 그 책은 분리수거함으로 옮겨졌다.


명리학 교재는 조금 달랐다.
그 시절 나는 나름의 인생 방향과 의미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서울행 버스표를 끊게 했던 강의가 있었다. 거제와 서울을 주말마다 오가며 공부했던 그 시절, 강의실에는 명리를 공부하는 다양한 사연의 사람들이 가득했고, 서로의 사주를 풀어주며 웃고,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밥벌이 수단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서 위안과 교훈, 그리고 욕심을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였겠지만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 그 시절의 고민과 또 한 편으로는 지금 잘 지내고 있다는 안도감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딸아이의 성장 앨범

정리하다 보니 팬트리 한쪽에 딸아이의 어린 시절 사진과 어린이집, 미술학원 작품들이 쌓여 있었다.
고사리손으로 그린 가족 그림, 종이로 접은 꽃다발, 졸업앨범, 그리고 친구들과의 사진들.
벌써 초등학교 5학년이 된 딸을 보며, 그 시절이 얼마나 빠르게 흘렀는지 실감했다.
이건 단 한 장도 버릴 수 없는, 우리 가족의 보물이었다.
사진과 그림을 들여다보니 이사 준비의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순간만큼은 상자 속이 아니라, 시간 속을 여행하고 있었다.


웃음과 정리, 그리고 이사의 역설

또 다른 상자에서 나온 건 가족과 함께한 보드게임들이었다.
비 오는 날 주말 저녁, 명절 연휴 한가운데서 웃고 떠들며 보냈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아내는 딸과 상의해 더 이상 쓰지 않는 것들은 중고로 판매하기로 했다.
한편, 어디에 쓰는지도 모를 케이블과 부속품들이 한 무더기 나왔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사는 번거롭지만, 오래 묵혀둔 물건을 정리하게 만드는 좋은 핑계라는 것을.
정리의 끝에는 ‘남기는 것’과 ‘놓아주는 것’의 경계가 명확해진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조금 더 잘 알게 된다.




새 집, 새 이야기

이사를 하며 버린 건 더 이상 사용하지 않거나 보관이 힘든 물건이었지만, 남긴 건 고스란히 우리 가족의 추억들이었다.

상자 속에서 발견한 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그 시절의 나와 우리 가족의 이야기였다.
이제 곧 새로운 집에서 또 다른 물건들이 쌓이고, 그 속에 새로운 이야기가 깃들 것이다. 아마 몇 년 후 또다시 이사를 하게 된다면, 오늘 남긴 것들 중 일부를 그때는 내려놓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역시 또 하나의 시간 여행이 될 것이다.
그때도 오늘처럼 웃으며, ‘이사 단상’의 다음 장을 써 내려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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