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을 향하여. ‘최선(善)의 삶’ 프로젝트
내가 '최선(善)의 삶' 프로젝트를 꿈꾸게 된 계기가 있다. 바로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의 '체헐리즘'이라는 기사를 본 뒤부터였다. 그가 쓰는 체헐리즘 기획 기사는, 늘 다음과 같은 [편집자주]로 시작된다.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 봤습니다. 장애인들 심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안 보였던,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뭐든 직접 해보니 다르더군요. 그래서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하나로 합쳐 봤습니다. 사서 고생한단 마음으로 현장 곳곳을 몸소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알리겠습니다.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기획 의도에 따라 남형도 기자는 시각 장애인, 폐지 줍는 노인, 노숙자가 되었다. 그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그늘진 곳을 찾아 그들의 삶을 체험하고 그에 대한 소회를 기사로 썼다. 나는 깊이 공감하기도, 많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서 주어진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부터 하기로 했다. 이제는 회사에서 만나는 동료들을 위해, 그리고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의 범위를 조금씩 늘리고 싶다.
'최선(先)'이 아닌 '최선(善)'의 삶을 꿈꿔 본다. 요즘 같은 세상에 착한 게 무슨 소용이냐고, 착해 봐야 손해만 본다고, 남들한테 이용만 당할 거냐고 말할 수 있다. 한동안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책임감 있게 주어진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면서 지내는 게 옳다고 배웠는데, 사회에서는 그런 내 모습이 늘 좋은 결과로 돌아오지 않았다. 세상은 선한 나의 마음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하며 겪은 일들은 내게 또 다른 깨달음을 주었다. 일은 결국 인생의 길고 긴 시간 동안 함께 해야 하는 '동반자' 같은 존재다. 한고비씩 넘다 보니 어느새 10년을 같은 일터에서 보냈다. 그동안 묵묵히 걸어온 발자국은 하나의 길을 만들었고, 그 길 위에 내가 순간순간마다 느꼈던 회한과 슬픔, 그리고 기쁨과 열정의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한순간에 포기해버리면 안 된다. 만약 그 당시 내가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렸다면 나는 어땠을까. 그 과정을 거치며 많이 단단해졌다. 유리멘탈이었던 나도 험난한 세월을 잘 극복해왔으니 지금 힘든 상황에 놓인 그대 꼭 힘을 내라고, 바로 모든 걸 포기하지 말라고 응원하고 싶다.
삶의 모든 것이 헷갈려 뒤죽박죽일 때, 나는 '선(善)은 악(惡)을 이긴다'는 진리를 믿기로 했다. 사실 조직 생활에서의 선과 악은 결국 사내 정치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윗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어떤 때는 선으로, 어떤 때는 악으로 취급받기도 했다. 내가 따르던 선배들이 승진하는 모습과 징계받는 모습을 번갈아 지켜보면서, 도대체 무엇이 옳은 것인지 참 오래도록 고민했다. 어떻게 일하고 행동할 것인지, 방황의 시간도 찾아왔다.
그래서 나는 '일하는 공간에서의 선함'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내렸다. 내가 생각하는 '선(善)'이란, 바로 '내가 우선이 되는 선함'을 의미한다. 이는 무조건적인 선함과는 다르다. 무슨 말이든 수용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만이 아니라 가까운 주변 사람들도 힘들게 한다. 일하는 공간에서 이런 선함은 오히려 이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우선이 되는 선함'이란, 나를 지키는 선함을 말한다. 나를 최우선으로 두고 무리하지 않는, 그리고 나의 존엄함을 지킬 수 있는 범위에서 나누는 선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선함을 나누어 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 진정으로 공감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과 교류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내가 할 일이 아니면 마땅히 거절해야 하고, '내가 희생하고 말지' 하는 마음은 오만한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나는 나의 선함을 나눌 수 있는 범위에서 기꺼이 내가 아는 것을 알려주고, 서로의 에너지와 온기를 나누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내가 우선이 되는 선함'에는 때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개념도 포함된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다. 내가 있는 부서로 새로 발령 나 부임해 온 상사가 인사를 받지 않았다.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의 무시로 인한 위축감과 압박감은 상당했다. 몇몇 팀원들의 인사도 받지 않았는데, 당시 우리는 영문을 몰라 참 많이 당황했다.
그런데 쭉 지켜보니 그는 자신과 친한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친근하게 대했다.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이해해라'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그건 상사로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다. 나는 더 이상 노력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내 자리에서 책임감 있게 할 일을 했다. 그 정도가 내가 당시 상사에게 할 수 있었던, 일하는 공간에서 발휘할 수 있는 최선의 선함이었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니, 구체적인 목표 의식 없이 행했던 일들이 결국 '우리가 일하는 공간이 선함으로 가득 차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과 이어졌다. 조직 생활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많지 않지만, 분명히 좀 더 나은 방식으로 개선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아직 회사에서 내가 할 일이 더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다 언젠가 '이제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을 때, 내가 꿈꾸는 또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