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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광환 Jun 09. 2024

[단편소설] 사랑의 무게

당신은 내 아내가 될 거야.  그것은 청혼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통보였다.


1

성미란은 카사하라 토시오를 처음 만났을 때, 자기 인생에 뜻하지 않은 불청객이 도래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토록 그의 존재는 처음부터 강하게 다가왔다. 온몸으로 저항했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미란은 가난한 유학생 시절, 도쿄 우에노에 있는 슬롯머신 게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하던 몇 개월 만에 게임장을 방문한 젊은 사장을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미란은 그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만큼 그는 웬만해서 얼굴을 비치지 않았고, 그 이유를 미란이 알 턱이 없었다.

몰래 자기를 바라보는 성미란을 발견한 카사하라 토시오 사장이 의외로 다가와 말을 붙였다. 붉어진 얼굴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미란은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훤칠한 키에 표정 없이 눈빛을 발산하는 카사하라는 그만큼 처음부터 강렬했다. 파친코 체인의 사장이 일개 말단 종업원인 자기에게 관심을 보인 것에 영광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날 미란은 하루 종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후 미란이 일하는 게임장에 그는 날마다 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하품만 하던 뚱뚱이 점장이 금세 홀쭉해질 정도로 긴장해야 했다.


훤칠한 키에 표정 없이 눈빛을 발산하는 카사하라는 그만큼 처음부터 강렬했다.


카사하라는 그때부터 미란에게 은근히, 그러나 집요하게 접근했다. 그가 유명한 인물인 가와모토 도부토건 회장의 수하라는 것을 미란이 안 것은 나중이었다. 가와모토는 일본 관동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야쿠자 조직인 오타구미의 총오야붕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 밑에서 카사하라는 도쿄와 인근 도시의 호텔카지노와 파친코 업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정체를 알고 나자 미란은 그가 두려웠다. 비록 보수가 괜찮은 아르바이트 자리였지만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 자기를 향한 그의 강렬한 눈빛을 생각하면 두려움은 공포로 확대되었다. 게임장 직원 신상 카드에 주소를 써넣었던 기억이 들자 그녀는 사는 집까지 옮겨버렸다.

그런데 이사한 다음 날 아침, 미란의 새집으로 꽃이 배달되었다. 꽃 속에 꽂혀있는 카사하라의 카드를 발견한 미란은 소름이 돋았다. 생각다 못해 성미란은 학교를 휴학하고 도쿄 외곽의 센가와시에 있는 친구 집에 칩거했다. 그런지 겨우 닷새째 되는 날, 세탁물을 들고 동네 대중 빨래방에 갔을 때, 태연하게 거기 앉아있는 카사하라를 보고서야 성미란은 비로소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카사하라는 표정도 말 수도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성미란 앞에서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생각과 달리 그의 손도 따뜻했다.

처음 가본 그의 사무실이 100평이 넘는 초호화판 방이라는 것을 보고 성미란은 기겁했다. 게다가 그의 사무실은 요요기우에하라의 빌딩군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도쿄에서도 노른자위 땅으로 유명한 동네였다. 제국호텔, 도쿄 팰리스호텔 등의 유서 깊은 건물 너머 고색창연한 왕궁의 해자가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그 앞으로 요요기공원이 넓고 시원하게 트여있었다.

그가 미란에게 말했다.

“내 앞날에 대해 약속할 수는 없어. 하지만 당신 앞날에 대해서는 내가 분명히 약속할 수 있지.”

창밖의 요요기공원을 내려다보던 카사하라가 그대로 선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선언하듯 뱉어냈다.

“당신은 내 아내가 될 거야.”

그것은 청혼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통보였다. 기가 막혀 대꾸도 못하고 있는 미란에게 그가 덧붙였다.

“걱정할 건 없어. 가능한 대로 당신 행복을 위해 내 노력을 아끼지 않을 테니까. 당신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지.”

그게 끝이었다.     


당신은 내 아내가 될 거야. 그것은 청혼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통보였다.


2

얼마 안 가 카사하라의 말처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그랬어도 성미란은 그와의 결혼을 실감하지 못했다. 고급 주택지인 도쿄의 미나토구에 마련한 신혼집에 그가 얼굴을 나타내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성미란은 그의 두텁고도 긴 손길이 도처에 나타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번은 친구들을 초대해 조촐한 파티를 열겠다고 지나가는 말로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파티 당일 아침, 

라 리스트의 유명한 로고가 새겨진 앞치마 차림의 호텔 레스토랑 출장 뷔페 팀이 자기 집 그 넓은 정원을 점령해버렸다.

적막한 집을 떠나 학교에 복학할 결심을 굳혔을 때, 카사하라는 성미란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라는 의미에서 간편한 소형차를 사주었다. 집안 주차장에 서 있는 덩치 큰 승용차는 미란이 끌고 다니기에 불편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학교에 다니게 되자, 그녀의 소형차 앞뒤로 대형 승용차 대여섯 대가 어디선가 나타나 따라붙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도 다시 바람같이 나타난 검은 차들이 그녀의 차를 둘러싸 에스코트했다. 학교 강의실 밖 복도에도 덩치 큰 낯선 사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그들의 행동은 사근사근하지만, 표정들은 한결같이 무표정했다. 그런 사내들은 대학 구내 도처에서 포착되었다.

이내 학교에서는 온갖 소문이 퍼져나갔다. 중국의 숨겨진 황족이 이 학교에 다닌다는 말은 시작에 불과했다. 수수께끼의 학생이 홍콩의 대재벌 딸이라는 말도 돌았다. 심지어 미국의 성공한 아시아계 갑부의 딸이라는 소문도 퍼졌다. 나중엔 일본 정계 주요 인사의 내연녀라는 제법 그럴싸한 소문까지 들려왔다. 미란은 카사하라에게 당장 그들을 거두어가라고 간청했지만, 그의 태도는 분명했다.

“아끼는 보석을 함부로 거리에 내놓을 사람은 세상에 없어.”

결국 그녀는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이듬해 성미란이 마리를 출산하자 카사하라는 더욱 극진했다. 최고의 보모와 가정부는 물론이고, 성미란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각종 수발을 헌신적으로 들어줄 여비서들이 집으로 들어왔다. 성미란이 모두 돌려보내라고 애원해도 카사하라의 얼굴에 잠깐 웃음이 스치고 지날 뿐이었다.

그때부터 카사하라는 외부 행사에 성미란을 대동하기 시작했다. 조직에서 거나한 파티가 있거나 주요 행사가 있으면 꼭 아내를 불렀다. 카사하라는 그럴 때마다 미란에게 선택의 자유만은 허락지 않았다. 십여 년 그런 세월은 성미란을 지치게 했다.

조직의 거물들과 선상 파티를 하고 왔던 어느 날, 처음으로 카사하라 앞에 성미란이 폭발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미란은 거실의 골동품 도자기를 내 던지고는 쓰러져 오열했다. 카사하라가 평소 정성스레 닦을 정도로 아끼는 도자기였다. 

미란은 자기 앞에 선 채 지긋이 내려다보는 카사하라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날, 카사하라 입에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조용히 그녀를 안아 침대에 뉘면서 이마에 키스를 하고는 나가버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카사하라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마리를 데리고 한국으로 나가 살아도 좋다는 말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면서 마리와 행복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했다. 어떤 조건도 없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혼만은 안 돼.”


미란은 자기 앞에 선 채 지긋이 내려다보는 카사하라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간혹 카사하라에게 안부 전화가 걸려 오는 것을 제외하면 실제로 서울 생활은 자유 그 자체였다. 소일거리로 강남에 작은 칵테일 바를 열었어도 일본 쪽에서는 어떤 참견도 하지 않았다. 단지 마리만이 아빠가 보고 싶을 때면 도쿄엘 다녀왔는데, 그럴 때마다 미란의 주위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갑자기 시골 별장이 생긴 것도 그런 일 중 하나였다. 마리와 함께 산으로 둘러쳐진 충주호엘 갔을 때, 그 경관에 넋이 나간 성미란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이런 곳에 별장을 갖고 있으면 참 좋겠어. 말도 몇 마리 키우면서 승마를 즐길 수도 있고 말이야.”

마리는 엄마를 지극히 사랑했다. 엄마의 탄성을 잊지 않은 마리가 다음번 도쿄를 다녀온 지 며칠 되지 않은 날, 늙수그레한 못 보던 남자가 찾아왔다.

“제게 별장관리를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말들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훌륭한 말들이던데 성심껏 보살피겠습니다. 들으셨겠지만, 제가 평생 해온 일이 기수 학교에서 말을 보살피는 일이었거든요. 그 점에서는 누구보다 자신 있습니다. 언제라도 내려오셔서 푹 쉬다 가실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의아했던 성미란은 이내 사태를 눈치챘다. 그날, 박씨라는 그에게 아무튼 잘 부탁하겠노라는 말을 겨우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별장엔 유럽산 검은 암말 두 필과 토종인 제주도 조랑말 한 필이 한가롭게 볕을 쪼이고 있었다. 말들이 어찌나 유순한지 처음 보는 성미란과 마리를 보고도 얼굴을 비벼댔다. 

성미란은 유럽산 말들에게 각각 광명의 여신과 승리의 여신 이름인 디오네와 니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카사하라에게 매인 자신의 인생에서 완전히 벗어나고픈 열망을 담은 이름이었다. 마리가 귀여워하는 조랑말에겐 준(駿)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이후 마리는 말들에게 관심을 쏟아 틈만 나면 별장엘 내려가야 했다. 그런데 성미란의 바에 새로운 바텐더인 상규가 들어오고부터 마리의 관심이 그에게 옮아갔다.

미란은 그토록 재주가 뛰어난 상규가 조그만 자기 가게에 선뜻 와준 것이 고마웠다. 일본의 오차노미즈 칵테일 학교에 다닐 때부터 바텐더대회의 상을 거의 독식하다시피 했던 기록이 그의 파일 가득 들어있었다. 칵테일 학교를 졸업하던 해엔 싱가포르에서 열린 세계 바텐더대회에서도 우승한 사내였다.

앱솔루트 보드카에 레드 갈리아노와 베일리스를 섞고 팔락(약초)과 인도 향신료를 뿌려 현란한 셰이크 동작으로 만들어낸 ‘night of fire’라는 칵테일을 맛보면 손님들이 감탄을 연발할 정도였다. 그것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창조해낸 칵테일이었다. 

도쿄에서도 유수의 호텔 바에서 스카우트 손길을 내밀었으나, 그는 모든 미련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덕분에 그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들이 단골손님이 되어 미란의 바는 늘 손님들로 북적였다.

상규가 처음 성미란의 바에 왔을 때, 엄마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에 들렀던 마리는 즉시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의 멋진 셰이크 솜씨는 누구라도 갈채를 보낼 만했다. 더구나 그는 마술에도 능했다. 마개를 연 셰이커에서 갑자기 불을 뿜어 내거나 장미가 튀어나왔다. 어떤 땐 보석 같은 얼음알갱이가 쏟아지기도 했다. 호기심 많은 마리는 그 꿈같은 광경에 당장 넋을 빼앗겼다. 붙임성 있는 상규의 부드러움이 마리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았다.

미란은 바쁘고도 즐겁게 돌아가는 현재의 삶에 만족했다. 사랑하는 딸을 옆에 두고 일에 파묻혀 사는 것은 잔잔한 행복이었다. 이제 미란은 외롭지 않았다. 미란의 의식 속에 카사하라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갈 뿐이었다.     


그가 현란한 동작으로 만들어낸 ‘night of fire’라는 칵테일을 맛보면 손님들이 감탄을 연발할 정도였다.


3

안산 공원에 만발한 각종 꽃들을 쳐다보며 마리는 가는 곳마다 탄성을 질렀다. 마리의 감성은 특별하다는 것을 상규도 알고 있었다. 그가 멀쩡한 셰이커에서 꿈같은 마술을 쏟아낼 때 마리는 손을 가슴에 대고 어쩔 줄 모르며 감동하는 아이였다.

오후 해가 식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바다를 낀 공원 숲에 봄꽃들은 여전히 싱그러웠다. 꽃구경 나온 사람들은 아직도 공원에 제법 남아 있었다.

공원 정취에 마음을 빼앗긴 마리 뒤에서 상규는 멀리 보이는 곶 끄트머리의 붉은 등대를 쳐다보았다. 그 건너편엔 인천항이 희미하게 보였다. 멀리 보이는 등대는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활짝 웃어대는 수많은 꽃에 둘러싸인 마리는 아직 멀찍이 떨어진 등대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이제 그것이 꿈과 동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마리의 눈에 뜨이면 또 다른 호기심에 가슴이 벅차오를 것이다.

“이 꽃 이름이 뭔지 알아요?”

마리가 하늘거리는 보라색 꽃잎들을 가리키며 물었지만, 상규 눈은 아직도 등대에 머물러 있었다.

“어딜 쳐다보는 거예요, 상규 오빠?”

등대를 바라보며 골똘했던 생각에서 빠져나온 상규가 마리를 쳐다보니 이번엔 마리의 눈이 등대로 가 있었다. 마리가 일어나 손으로 이마에 차양을 만들고 한동안 등대를 바라보았다.

붉은 등대.

바다와 맞닿은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붉은색 등대는 동화 같은 풍경을 자아냈다. 순간 마리의 입가에 행복한 웃음이 피어났다. 무언가 모를 열망과 환희에 가득 찬 웃음이었다.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화장실 건물에서 몰려나와 마리 뒤로 지나갔다. 저마다 가방을 든 그들은 어떤 종교단체 청년들이거나 아니면 세일즈맨처럼 보였다. 마리가 그 젊은이들 사이로 상규에게 말했다.

“오빠, 저 등대에 가보고 싶어요. 우리 저기 갈래요?”

마치 거기서 눈을 떼면 당장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마리는 등대를 한참 쳐다보다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상규는 그사이 근처 매점으로 걸어가 담배를 샀다. 상규는 매서운 눈매에 전혀 인사성도 없는 매점 노인에게 물때 시간을 물었다. 노인은 벽에 붙은 달력을 흘끔 쳐다보더니 오후 6시 40분이 만조시간이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한 시간 후였다.     


4

요트가 심하게 흔들렸다. 일렁이는 파고에 70톤의 무게와 4,800마력 쌍발엔진도 소용없었다.

“후나바시는 얼마나 남았나?”

카사하라가 갑판에 대고 소리 지르자 그쪽에서 부하 하나가 큰 소리로 답해왔다.

“10분이면 도착합니다.”

요코하마를 출발해 도쿄만을 가로질러 크루즈요트로 오는 동안 카사하라는 땀에 흠뻑 젖었다. 그 앞에 피투성이 사내가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요트 바닥도 피로 흥건했다.

“네가 그 자리까지 올라오기 위해 애쓴 걸 안다. 이대로 죽기엔 네 인생이 아까울 텐데, 솔직하게 말할 생각은 정말 없는 건가?”

“말했잖소. 난 그쪽으로 아는 바가 없소. 알고 있다면 이 지경이 되도록 말을 안 했겠소?”

“내가 알아듣지 못할 말은 하지 말라고 했잖나. 너희 구로카와 조직의 요코하마 지부장이면 오야붕의 친위대장이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런 네놈이 조직의 자금줄도 모른다면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말인가?”

카사하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발이 사내의 사타구니로 날아들었다. 사내는 외마디 소리를 내 지르면서도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신음을 토해내는 사내는 끝까지 카사하라가 원하는 것을 내놓지 않았다.

카사하라가 가진 정보에 의하면 그는 북쪽 아오모리 산골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구로카와구미의 요직 중의 요직인 요코하마 지부장으로 성장하기까지 채 5년도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만큼 그는 오야붕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을 만한 능력을 갖춘 자였다. 이번 요코하마 뉴타운 건설 수주에 구로카와구미가 그를 전면에 내세울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런 그가 카사하라 앞에 신음하고 있으면서도 핵심 문제만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구로카와구미가 요코하마 외곽에 지어질 뉴타운 건설 수주에 뛰어들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올 때만 해도 카사하라는 코웃음을 쳤다. 도쿄 변두리에서 흥행업과 포르노 산업,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회사 등을 통해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그들이 뉴타운 건설에 뛰어들 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판단에서였다. 지난달 요코하마시에 빌딩을 사들여 ‘구로카와 건영’이라는 간판을 내 걸고 본격적인 로비를 펼친다는 소리를 듣고도 실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수주 선정발표를 보름 남겨놓은 어젯밤, 요코하마시의 건설토목부장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한산한 한밤중의 교외 도로에서 가로수를 들이받은 채 즉사했다고 했다. 

그는 카사하라가 그동안 공을 들여놓은 사람이었다. 요코하마시의 건설 입찰에 응하는 입장에서 그는 염라대왕이었던 것이다. 그의 의지만 담기면 이번 요코하마 뉴타운 공사 수주는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름없었다. 그런 인물이 교통사고로 이 중요한 시점에 우연히 죽었다는 것을 카사하라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듣자마자 카사하라는 그동안 별것 아니라고 치부했던 구로카와구미에게 직감적으로 눈이 돌아갔다. 그들이 그동안 안중에 없었던 것은 양쪽 지명도부터 비교 대상이 아니지만, 무엇보다 시 건설계획의 실제 입안자인 건설토목부장을 업고 있으면 입찰 과정은 형식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건설토목부장이 사라지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카사하라가 속해있는 오타구미의 총 오야붕이자 도부토건 회장인 가와모토가 건설 관계 중앙 정치인들과 밀착되어 있긴 하지만, 그들이 지방 도시 건설발주까지 참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카사하라가 알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것은 갑자기 돌출되어 치고 올라오는 구로카와구미의 세력 확장에 깔리는 자금력이었다. 카사하라가 알기에 그들은 자체적으로 그만한 자금을 조달할 능력이 없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자금줄을 대준다는 것이고, 그것만 알아내면 구로카와구미의 급소가 될 터였다. 문제는 지금 카사하라 앞에 있는 사내가 속 시원히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요코하마를 출발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다리 하나가 통째로 토치램프에 익혀졌으며 어깨뼈가 부서지고 거의 모든 갈비뼈가 부러졌어도 카사하라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다. 조직의 자금줄은 오야붕과 그 측근들만 알 뿐 자기는 모른다고 끝까지 뻗대는 것이었다.

피 튀긴 얼굴을 소매로 문지르고는 담배를 피워 물며 카사하라가 밖에 대고 소리쳤다.

“이 자식을 갑판으로 끌고 올라가라.”

명령에 따라 카사하라의 부하 몇이 그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동안 고통의 비명 소리가 요트 내부를 가득 채웠다. 

갑판 위엔 콘크리트로 채운 드럼통 하나가 서 있었다. 

카사하라의 명령으로 그의 다리 하나가 드럼통에 달린 끈에 묶였다. 이제 그것을 바다로 굴려 넣으면 그는 영원히 수장 될 것이다.

“이 자가 끝까지 죽음을 고집하니 어쩔 수 없구나. 그의 소원대로 바다에 처넣어라.”

카사하라가 짐짓 허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내 부하들 여럿이 달려들어 드럼통을 쓰러뜨리고는 갑판 끝으로 굴려 갔다.

하늘은 맑았다. 멀리 가물거리는 해안선을 따라 파도를 헤치며 달리는 요트를 시원한 바람이 감싸 안았다. 카사하라가 담배를 깊이 빨고는 갑판을 뚜벅뚜벅 걸어가 사내의 얼굴에 비벼대며 말했다. 

"네 오야붕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인정해주지. 시원한 바다에 수장 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거야. 그럼 잘 가거라."

카사하라가 돌아서려는데 사내가 얼굴을 들며 말했다.

“당신이 원하는 정보를 주면 정말로 살려줄 거요?”

카사하라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선글라스를 벗었다.

“좀 늦은 감은 있지만 고려해볼 수는 있겠지.”

그가 얼굴을 떨어뜨리고 말했다.

“아오자와구미의 노무라 오야붕이오... 조사해 보시오. 내 말이 틀리지 않을 거요.”

다시 안경을 낀 카사하라가 일어서 먼바다를 주시했다. 달려드는 바람이 그의 풀어진 저고리와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드럼통은 이제 갑판 끝까지 거의 옮겨졌다.

“내 말은 사실이오. 살려주시오!”

사내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카사하라는 미동도 없이 먼 바다에서 눈을 거두지 않았다.

“진작 말했으면 깨끗하게 죽을 수 있지 않았느냐. 넌 왜 이토록 어렵게 죽는 길을 택하느냔 말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몸이 주욱 미끄러져 갔다. 드럼통이 바다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울부짖으며 욕설을 내뱉었지만 소용없었다. 사내의 비명은 이내 바다로 사라졌다.

그 비명은 카사하라의 귀에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휘감고 있는 것은 사내의 입을 통해 나온 노무라라는 사람이었다.

노무라 오야붕이 이끌었던 아오자와구미는 카사하라가 속한 오타구미보다 먼저 관동에 터전을 잡은 조직이었다. 한때 오타구미도 노무라 휘하에서 간신이 명맥을 유지했었다. 

그러나 90년대 초, 조직폭력단을 회유하기 위해 만든 이른바 ‘폭력단 신법’이 발효되자, 당시 오타구미의 젊은 오야붕이었던 가와모토는 발 빠르게 조직을 개편하고 사업체를 양지로 끌어내 성공을 거두었다. 반면에 노무라는 폭력단 신법의 파괴력을 간과했다. 음지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수입을 포기하기에는 그 액수가 막대하기도 했지만, 그 사업들이 조직 기반과 연결되어 양지로의 변신 자체가 어렵기도 했다. 

결국 그들은 검찰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채 10년도 되지 않아 총오야붕인 노무라와 그 측근들이 검거되고, 그들의 조직은 지리멸렬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사업체 중 하나인 카지노와 파친코 체인이 카사하라의 수중에 들어오는 계기가 되어 오타구미의 조직은 더욱 비대해졌다. 

이후로도 노무라의 숨겨진 자금이 엄청나다는 소문은 무성했다. 게다가 최근 감옥을 출소한 이후 은둔생활을 하는 늙은 노무라가 권토중래를 꾀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물론 누구도 노무라의 재기에 현실적인 무게를 두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오래전 와해 된 조직도 조직이려니와, 핵심 부하들은 아직도 대부분 장기수로 수감생활을 하는 처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노무라의 거대한 망령이 카사하라 앞에 그 실체를 보인 것이다.     


진작 말했으면 깨끗하게 죽을 수 있지 않았느냐. 사내의 비명은 이내 바다로 사라졌다.


5

모처럼 집을 찾아온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던 미란의 전화가 울렸다. 필경 꿈같은 시간에 대한 자랑에 목마를 마리의 전화라고 생각하며 받았지만 발신자는 상규였다.

“상규씨, 마리가 아주 신났지? 거기 지금 어디야?”

“안산근처 공원입니다.”

미란이 벽시계를 바라보니 오후8시 10분을 지나고 있었다.

“그럼 아직도 집에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네? 어두워졌는데 아직 공원에서 뭐하고 있어? 이제 마리 데리고 그만 집으로 들어와요, 상규씨.”

상규가 말을 끊고 잠시 있더니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저어, 마음을 좀 가다듬고 제 말을 들어주세요.”

“무슨?”

미란은 종일 쏘다닌 마리가 또 무슨 떼를 쓰고 있을지 생각하는 중에 상규가 그 생각들을 끊어 놓았다.

“마리가 실종됐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상규씨도 농담을 잘 하네?”

“정말입니다. 마리가 화장실 들어가는 걸 보고 잠깐 담배를 사러 매점엘 들렀다 와보니 그 사이 마리가 없어졌습니다.”

“어디 근처에 있겠지. 어두워서 서로 찾지 못할 수도 있을 테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지 그랬어?”

“아닙니다. 지금 경찰들이 와서 공원 내부뿐만 아니라 이 근처 거리까지 모두 샅샅이 뒤지고 있지만 찾질 못했습니다. 벌써 두 시간 쨉니다.”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는 미란에게 들려오는 상규의 음성이 더욱 낮아졌다.

“경찰들은 금품을 노린 유괴라고 단정합니다.”

전화기를 들었던 미란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놀란 친구들이 다가왔지만 미란은 기어이 실신하고 말았다.     


6

후나바시 항에 요트를 정박해놓고 카사하라 일행은 미리 기다리던 자동차로 인근 마쯔도를 향했다. 

에도 강이 내려다보이는 영주의 성채 같은 대저택으로 들어가면서 가와모토 회장에게 보고할 내용 때문에 카사하라는 불안했다. 

가와모토 회장은 이번 공사를 어떻게든 따내야 한다고 못 박으면서도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 중요한 사업을 카사하라에게 맡겼다. 

지금까지 건설업이 주종인 도부토건을 이끌어온 실질적인 인물은 부회장 록폰기였다. 그에 반해 호텔카지노와 파친코 등 도박업계 일을 해온 카사하라는 건설업계의 문외한이었다. 

그렇기에 가와모토 회장의 이번 결정은 도부토건과 오타구미의 미래를 건 예상치 못한 도박이라고 언론은 떠들어댔다. 조직 내부조차 부회장인 록폰기를 제치고 카사하라가 이번 사업의 책임자로 결정되자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후 건설 경험이 풍부한 부회장 록폰기는 카사하라의 도움 요청을 대놓고 무시했다. 카사하라가 이번 일을 성공리에 마치게 된다면 자신의 후임 회장 자리가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심장이 좋지 않아 수술까지 받은 노쇠한 가와모토의 건강은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가와모토 회장 이후엔 당연히 자기 세상이 될 것으로 기대하던 록폰기로서는 카사하라의 도약이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카사하라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장밋빛 미래의 청사진이 아니었다. 당장 중요한 역할을 해주어야 할 요코하마시 건설토목부장이 죽은 것이다.          


“교통사고로 죽었다?”

중대한 보고를 받으면서도 가와모토 회장은 빛나는 태양 아래 자신의 정원에서 골프 티샷 연습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가 막 때린 공이 멀리 에도 강의 갈대밭으로 날아가는 걸 보면서 오히려 얼굴이 환하게 펴질 정도였다. 다시 공이 놓이자 그가 드라이버 골프채를 조준하면서 말했다.

“카사하라군. 그자를 우리 사람으로 만들었으면 죽지 않게 했어야지.”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휘두른 육중한 헤드의 드라이버가 날아와 카사하라의 명치끝을 가격했다. 순간 숨이 딱 멎으며 등줄기에 식은땀이 났지만 카사하라는 입을 악물고 그 자리에 버텼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어떻게든 우리 사람을 다시 만들겠습니다.”

가와모토가 카사하라를 쳐다보았다.

“다시? 이제 며칠 남았다고 큰 소린가?”

“제게 맡겨 주십시오. 회장님.”

“내가 여러 사람이 반대하는데도 자네에게 이 일을 맡겼어.”

가와모토가 옆에 서 있는 부회장 록폰기를 흘끗 바라보고는 다시 말했다.

“자네가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회사로서도 큰 손실이지만, 먼저 내 위신이 떨어지네. 그럼 자넨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꼭 이루어내겠습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이 일이 실패하면 자넨 목을 내놓아야 하네.”

가와모토의 관심이 다시 골프 공으로 옮겨갔다. 몇 번을 신중하게 조준하고 때린 공이 멀리 날아갔지만 이번엔 에도 강이 아닌 철로 변을 향했다. 의도했던 곳에서 너무 벗어난 것이다. 가와모토가 인상을 쓰고 바라보다가 다시 놓인 골프공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저놈들 자금줄은 알아봤나?”

“네. 그들 뒤에 아오자와구미의 노무라 오야붕이 있었습니다.”

“노무라?”

그가 잠시 골프채를 허리에 받치고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혼잣말처럼 탄식했다.

“거참, 질긴 사람이군.”

그러더니 그가 골프채를 다시 공에 대고 조준하면서 말했다.

“그자 수하들은 아직도 대부분 감옥에 있지?”

“네. 그래서 스스로 조직을 재건하기 어렵게 되자 만만한 구로카와구미와 커넥션을 맺은 것 같습니다. 상부상조할 좋은 기회가, 윽!”

카사하라에게 또 다시 골프채가 날아왔다. 이번엔 어깨였다.

“그걸 알았다면 대책도 내놓아야 할 것 아닌가. 그자들이 붙들고 덩실덩실 춤추고 있는 걸 바라보고만 있을 셈인가?”

“죄송합니다. 좀 전에 알았기에 아직 대책을 마련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곧 만들어서 보고 올리겠습니다.”

가와모토가 이번엔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쪽에서 일을 지휘하는 자가 대체 누구지?”

부회장인 록폰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가와모토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신마치라는 친구입니다. 구로카와구미에서 좀 수완가로 알려졌다고는 하지만, 그깟 조직의 인물이라 봐야 뭐 별것 있겠습니까.”

“암, 그렇고말고. 그런 애송이들 따위로 일을 그르칠 수야 없지.”

가와모토가 다시 티샷을 때렸다. 쭉 뻗어 날아가는 공을 쳐다보며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스쳐 갔다.

“이번이 제일 잘 맞았군. 안 그런가, 카사하라군?”

카사하라를 쳐다보며 록폰기도 웃었다. 

차가운 미소였다.     


카사하라군, 그자를 우리 사람으로 만들었으면 죽지 않게 했어야지. 가와모토 회장은 중대한 보고를 들으면서도 자신의 정원에서 골프 티샷연습을 중단하지 않았다.


7

성미란이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팔에 꽂혀있는 링거주사 호스 너머로 이상규가 쳐다보고 있었다.

“상규씨, 우리 마리 아직 못 찾았어? 어떻게 된 거야...”

미란은 떨리는 음성에 눈물이 쏟아졌다. 일어나려는 것을 친구들이 말리자 미란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갑자기 소란스러운 병실로 간호사가 달려왔다.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내 딸이 없어졌어요. 그런데 어떻게 안정이 되겠어요? 상규씨, 아직 연락은 안 왔어? 아이를 유괴했으면 전화를 해서 돈을 요구해야 되잖아. 경찰은 뭐래?”

간호사가 할 수 없이 미란의 팔을 놓았다. 그러자 성미란이 링거 주사바늘을 빼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상규가 말했다.

“경찰에서도 워낙 단서가 없는 편이라 난감한 것 같습니다. 기다려봤다가 범인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그런데 어떻게 다 큰 애가 사람 많은 공원에서 없어져?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자세히 말해 봐, 상규씨.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마리가 화장실엘 다녀온다고 하기에 저는 담배를 사러 잠깐 매점엘 갔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마리가 나오질 않아서 화장실에 들어가 찾아보니 없는 거예요. 그 때가 오후 여섯시 무렵이라 공원에 사람들은 많지 않았거든요. 마리가 키도 큰데다가 워낙 눈에 잘 띠는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멀리서도 잘 보일 텐데 사방을 찾아봐도 없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경찰에 연락한 건데, 결국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상규 말을 듣고는 미란이 다시 비틀거렸다. 간호사가 초조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의사까지 뛰어 들어왔다.

“지금 퇴원하시면 안 됩니다. 하룻밤이라도 계셔야 해요.”

그러나 미란은 팔을 내 저었다. 어서 나가자며 그녀는 상규의 팔을 잡아끌었다. 할 수 없이 친구들과 상규는 미란을 데리고 병원을 나왔다.

미란은 친구들과 함께 상규 차에 올라 마리가 실종 된 안산의 공원으로 가자고 했다. 어두운 지금 가봐야 소용없다며 상규가 말려도 미란은 고개를 흔들었다. 현장에 가서 마리의 행적을 유추해내려는 엄마의 간절한 부탁을 더 이상 말릴 수도 없었다.

“마리 아빠에게 알려야 하는 거 아니니?”

친구들이 미란의 눈치를 살피며 말하자 미란은 펄쩍 뛰었다.

“안 돼. 그 사람이 알면 일이 더 커질 거야.”

카사하라 부하들이 떼거지로 안산 바닥을 휘 젓는 상상만 해도 미란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들이 나타나면 납치범도 겁을 먹고 마리를 살해할 것 같은 끔찍한 생각부터 들었다. 범인들이 빨리 전화해서 돈이라도 요구해왔으면 하는 바람만 앞섰다.     


8

구로카와구미의 수완가라는 신마치는 카사하라와 개인적으로 깊은 인연이 있었다. 

신주쿠 호텔카지노를 비롯한 도쿄의 도박장 영업권을 둘러싸고 쓰러져가는 아오자와구미와 본격적이고도 마지막 전쟁을 벌이던 시절, 카사하라는 신마치와 손잡고 거대한 공동의 적을 무너뜨린 바 있었다. 

당시로서는 구로카와구미 세력이 별로 크지 않아 전쟁 승리의 전리품으로 신마치는 아오자와 조직이 운영했던 엔터테인먼트 회사와 포르노 회사를 장악한 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신마치는 구로카와 조직의 중량감 있는 중간보스로 부상할 수 있었다. 

바로 그가 지금 구로카와구미의 요코하마 뉴타운 건설 수주를 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일선에 있던 요코하마 지부장을 오늘 아침에 제거했어도 그의 칼날을 안심할 수 없었다. 

더구나 카사하라 자신을 밀어줄 요코하마시의 건설토목부장도 사라졌다. 그 일 역시 누가 봐도 신마치의 짓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카사하라의 뒤통수를 내려친 격이었다.

그가 내 목에 칼을 겨누고 있다?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카사하라는 믿기 어려웠다. 아무리 이권을 다투는 조직끼리의 암투지만, 지난날 자신에게 신세를 졌던 그가 칼을 겨눠오려면 예고라도 있어야지 않은가.

카사하라가 아는 한, 그는 신중한 성격을 가진 자였다. 자기보다 강한 상대에게, 더구나 신세가 컸던 상대에게 복수의 빌미를 안기는 일이 얼마나 치명적인 위험인지를 모르는 경박한 자가 아니었다.

후나바시에서 돌아온 카사하라가 요코하마 항에 요트를 대고, 기다리고 있던 헬기로 다가가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다카오산엔 나 혼자 가겠다. 너희들은 요코하마시 건설토목위원회 위원들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모으고 특히 그들의 허점을 모두 파헤쳐라. 그리고 다음 토목부장으로 유력한 인물을 세 명 선으로 압축해내도록. 내가 돌아왔을 때 모든 자료가 내 책상에 올라와 있어야 한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만, 사장님 혼자 거길 가시면 위험합니다. 애들 몇을 함께 데려가시는 것이....”

부하 한명이 카사하라에게 말했다. 하지만 카사하라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헬기에 올랐다.

“인원이 많더라도 적진에서의 위험은 같은 거다. 만약 자정까지 내가 돌아오지 않거든 조치를 취해라.”

헬기가 떠올라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날아갔다. 

요란한 엔진소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카사하라가 눈을 감았다. 

사실 그는 지금 최대의 격정에 사로잡혀있었다. 이번 건설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그나마 공들여 준비한 자신의 무기는 허무하게 사라지고, 반대로 상대에겐 고성능 무기가 주어졌다. 같은 조직 내에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대마저 애초에 없었다. 그렇기에 카사하라에겐 정면 돌파하는 길밖에 남은 카드가 없었다. 그것은 신마치와의 담판이었다. 부하들 우려대로 생명의 위협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신마치와 그의 조직은 이번 일을 성사시키려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번 기회에 야쿠자 세계의 전설을 다시 쓰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신마치가 카사하라를 어떻게 대할지 장담할 수는 없었다.

카사하라는 불현듯 밀려오는 외로움을 느꼈다. 낯선 감정이었다. 삶 가운데 이런 비릿한 감정이 떠오를 수 있다는 느낌이 새로웠다.

‘내 인생에 언제부터 이런 자기연민이 있었을까.’

카사하라는 소리 없이 웃었다. 현실적이지 않았다. 창밖 저 아래 들판과 숲, 그리고 길게 꼬리를 문 강줄기가 지나갔다. 그 사이로 마을 지붕들이 한가롭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이 따뜻하게 살아갈 것이다.

불현듯 아내 성미란이 의식 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가 봤던 어떤 여자보다도 정초한 사람. 첫눈에 자기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자. 어떤 저항과 앙탈도 요람처럼 부드러운 여자. 게다가 상처투성이 차가운 자기 영혼을 녹이고도 남을 마리를 낳아준 여자. 그의 눈앞에 생명과도 같은 마리의 미소가 어른거렸다. 그 너머에서 미란도 웃고 있었다. 새삼스레 두 모녀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책임이 엄습했다. 카사하라는 이를 질끈 깨물었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다. 

헬기의 시끄러운 진동 속에서 현재의 자신을 쳐다보는 카사하라 마음이 마침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광풍이 그의 주위를 둘러쌀 때마다 찾아오는 오랜 버릇이 돌아온 것이다.     


창밖 저 아래 들판과 숲, 그 사이로 한가롭게 내려앉은 지붕들, 카사하라는 불현듯 외로움이 밀려왔다.


9

“카사하라 선배, 적군 진영엘 이토록 단기필마로 오시다니, 이거 적장인 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신마치가 자신의 산장 드넓은 정원으로 영접을 나와 손을 내밀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신마치의 표정은 쾌활했다. 전혀 거칠 것 없던 예전과 변함없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어떻게든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카사하라가 택한 것은 정면 돌파에 대한 진정성이었다. 그렇기에 카사하라는 부하들의 염려를 무릅쓰고 홀로 신마치를 찾은 것이다. 

산장 곳곳에 그의 부하들이 경비를 섰고, 그의 주위에도 사내들 여럿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카사하라는 신마치의 손을 끝내 잡지 않았다. 대신 다카오산 능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쿄 인근의 수려한 경치에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산이었다. 그러나 신마치의 산장은 다카오산자락 후미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 인적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 해도 그 빼어난 경치는 숨기지 못했다. 반면에 그의 정원은 보통의 일본식 정원처럼 관상수나 분재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연못도 없었다. 꽃밭만 무성할 뿐. 그 꽃들도 피를 뿌려놓은 듯 붉은 꽃 일색이었다. 오히려 그것은 다카오산 푸르른 경치와 어울려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오호라, 목을 졸라오는 이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다카오산을 감상하시겠다? 역시 카사하라 선배답습니다 그려. 하지만 지금 선배가 여기 경치에만 넋을 뺄 처지도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안으로 들어가서 피차에 밀린 이야기나 나누지요. 그러다가 서로 계산이 맞지 않으면 손목이나 하나 내놓던지. 아예 목을 내놓던지. 뭐, 그렇게 합시다. 어떻습니까.”

신마치가 부하들에게 눈짓을 하자 그들이 산장 현관 앞에 도열했다. 그 사이로 신마치가 한껏 오만하게 앞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카사하라가 들어가려는데 사내 하나가 제지했다. 카사하라가 그를 똑바로 노려보니 신마치가 뒤돌아보면서 말했다.

“별거 아닙니다, 선배. 이 산장엘 들어오는 외부인으로서의 절차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카사하라가 앞에 선 사내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양팔을 들어주었다. 사내가 어깨부터 발목까지 천천히 더듬어 비무장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들은 카사하라가 안으로 들어가자 현관문을 닫고 재빠르게 밖을 에워쌌다.


적군 진영엘 이토록 단기필마로 오시다니. 카사하라는 끝내 신마치의 손을 잡지 않았다.


카사하라는 신마치와 마주 앉으며 담배를 꺼내 피워 물었다. 신마치가 말했다.

“이렇게 마주 앉으니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그땐 우리 두 사람 참 좋은 세월이었지요. 안 그렇습니까, 선배? 우리 옛날 생각하면서 모처럼 술이나 한잔 할까요?”

“신마치, 알다시피 난 자네와 회포를 풀려고 온 게 아니야.”

“아, 이런. 아무리 우리 사이가 지금 전쟁 중이라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모처럼 만났는데 서로 노려볼 수만은 없잖습니까. 그저 내 집이려니 편하게 생각해주십시오. 뭐 어느 쪽이 죽을 때 죽더라도 그편이 낫질 않겠습니까.”

말해놓고 그가 껄껄 웃었다. 카사하라가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신마치, 요코하마시 건설토목부장을 죽이면 나를 이길 것 같은가?”

카사하라의 기대와는 달리 신마치에게 동요하는 빛은 없었다. 그의 표정이 여유로울 뿐이었다. 카사하라는 신마치의 얼굴을 향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고는 고급 양탄자가 깔린 바닥에 재를 털었다. 그러자 신마치의 부하가 탁자에 있던 재떨이를 카사하라 앞으로 밀어 놓았다. 신마치가 잠깐의 침묵을 깨고 말했다.

“선배와 나는 지금 경쟁을 하는 처지 아닙니까. 그런데 건설토목부장은 누가 봐도 우리 편은 아니었지요. 그자 때문에 우리는 본격적인 경쟁도 할 수 없는 입장이 된 겁니다.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라도 그자를 없애는 건 일의 수순 아닙니까?”

“그를 죽인 게 정말 자네란 말인가?”

“글쎄요...”

신마치가 소파에 몸을 기대면서 애매하게 웃었다. 그의 얼굴 주위에 아직도 카사하라가 내뿜은 담배 연기가 맴돌았다. 카사하라가 마지막으로 담배를 깊이 빨고는 꽁초를 바닥에 던져 구둣발로 비벼버렸다. 양탄자 타는 냄새가 역하게 올라왔다. 카사하라가 말했다.

“나는 자네들과 경쟁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네. 처음부터 이 일은 우리 사업이었으니까. 그런데 자네들 구로카와구미가 갑자기 훼방을 놓기 시작했어. 뜻밖에도 이 일을 자네가 지휘한다는 것을 알고 놀랐지.”

신마치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난 구로카와 사람입니다. 그런 내가 구로카와 사업하는 게 뭐 잘못된 겁니까?”

“구로카와 사업? 그게 어째서 구로카와 사업인가. 여기에 쏟아 붓는 돈이 자네들 돈이었던가? 노무라가 뒤에 있는 걸 알고 있네. 그는 지난날 자네와 나 공동의 적이었지. 게다가 그때 그들을 몰아내고 자네 사업을 주선해준 사람이 나 아니었나. 나는 말일세. 자네가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네. 그래서 실망이 큰 거야.”

신마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상대의 이야기를 수긍하겠다는 태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웃음이 맑아 보이기까지 했다.

“선배, 그때 일은 나도 고맙게 생각하지요. 그렇지만 지금은 현실적으로 각자의 사업을 해야 하는 처지가 아닙니까. 더구나 선배와 마찬가지로 나도 보스가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는 각자의 보스 명령을 따라야 할 형편이지 않느냐, 이런 말입니다. 거기에 개인적인 사정을 개입시킬 여지가 없다는 건 선배도 잘 아실 텐데요?”

신마치는 말을 하는 내내 웃음기를 거두지 않았다. 대화 속에서도 카사하라의 촉각은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어째서 자기변명에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 않을까. 신마치에겐 분명 무언가 있다는 생각이 카사하라를 붙들었다. 카사하라는 신마치를 더욱 옥죄었다.

“확실한 건, 우리가 자네들 자금줄을 알게 된 이상 자넨 날 이길 수 없다는 거야. 노무라의 검은돈이 사업자금으로서 치명적인 위험이 따른다는 건 자네도 알 걸세. 그가 자기 돈을 그동안 세탁할 형편이 아니었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국세청이나 검찰에서 그 돈에 관심을 갖게 되면 그 결과가 어떨까? 노무라 자금이 멋대로 휘젓고 다니게끔 내가 가만 놔둘 것 같은가?”

신마치가 탁자에 흩어진 담뱃재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침착한 태도였다. 그의 표정도 흔들리지 않았다. 신마치는 지금 세상 모든 번뇌에서 초탈한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오히려 조바심이 이는 쪽은 카사하라였다.

“신마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네. 내가 자네 부하를 오늘 아침 바다에 수장시켰지. 내가 알기로 자네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가 내 손에 넘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어. 그런데 뜻밖에도 자넨 개입을 하지 않더군?”

역시 신마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카사하라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는 부하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는 부하가 따라주는 양주 한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러고는 부하의 손에서 술병을 낚아챘다. 그는 자기 잔에 술을 붓고 또 다른 새 잔을 채워 카사하라 쪽으로 밀었다. 카사하라는 술잔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신 신마치의 행동을 주시할 뿐이었다.

“여전히 예리하시군요. 토시오 선배.”

그가 술잔을 다시 입에 털어놓고는 말했다.

“맞습니다. 요코하마 지부장 놈을 선배가 잡아갈 때 난 보고만 있었지요. 그 놈은 어차피 내 부하도 아닙니다. 우리 오야붕이 귀여워하던 애완견이었지요. 잔인한 놈입니다.”

“그래도 자네와 함께 사업을 끌어나가던 자가 아닌가. 자네도 사업을 성사하려면 그런 저돌적인 자가 필요할 텐데?”

“그렇긴 하지만 나는 우리 오야붕의 생각과 다른 거지요. 더구나 그자를 선배가 잡아가야 우리 자금줄을 알아내고 나를 찾아올 것이 아닙니까. 내가 먼저 찾아가기엔 선배는 이미 거물이 되어버려 문전박대를 당할 게 뻔하잖아요.”

순간 카사하라의 눈이 커졌다.

“무슨 말인가.”

신마치가 비어있는 자기 잔에 천천히 술을 부었다. 그의 얼굴에서 기어이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따라놓은 술잔을 외면한 채 소파 깊숙이 몸을 묻고 천정에 눈을 돌렸다. 그러고는 말했다.

“선배, 솔직히 말하리다. 건설토목부장을 죽인 건 우리 쪽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누구란 말인가?”

“그쪽 사람입니다. 그가 먼저 우리 쪽에 손을 내밀었지요.”

신마치가 속을 보이기 시작했다. 카사하라가 애를 태우며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생각해보십시오. 오타구미의 도부토건에서 선배의 도약을 막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그렇다면.....록폰기 부회장? 그자가 건설토목부장을 죽였단 말인가? 그리고 그자가 정말 자네에게 손을 내밀었단 말이야? 요코하마 뉴타운을 자네에게 넘기고 함께 나를 몰락시키자고?”

“그 사람은 나 같은 사람을 조무래기 취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나를 상대나 해준답디까? 정확히 말해 그 사람은 우리 오야붕에게 손을 내민 거지요. 오야붕이 그 손을 잡자 커넥션의 견고함을 보여주려는 차원에서 건설토목부장을 자기가 해치워 준 거예요.”

“그래서 자네들은 필요한 자금을 노무라에게 구걸한 건가?”

“천만에요. 록폰기가 모든 걸 가져왔어요. 사실 그가 노무라 자금을 먼저 제의한 겁니다. 내가 노무라 자금을 주선해줄 테니 나와 손잡자, 그렇게 된 거지요. 그래야 우리한테 선배를 무너트릴 힘이 주어질 테니까.”

“그런데 자네는 자네 오야붕과 생각이 다르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도 선배처럼 노무라 자금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록폰기가 비열하도록 용의주도한 인간이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에요. 그런 그가 선배를 몰락시키기 위한 명분이라 해도, 우리 오야붕을 진심으로 도울 리는 만무한 것 아닙니까. 잘 못 키웠다간 자기를 찌를 비수가 될지도 모를 사람이잖아요. 록폰기는 노무라의 시한폭탄 같은 자금을 통해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고 생각한 거지요. 기막힌 술수 아닙니까? 그 음흉한 손을 우리 오야붕은 덮어놓고 잡은 겁니다.”

“그걸 아는 자네는 왜 말리지 않았지?”

“말렸지요. 하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위험을 죄다 피하면서 어떻게 조직을 정상에 올려놓느냐고 오히려 핀잔을 주더군요. 언제까지 오타구미의 설거지만 할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그는 노무라 자금을 통해 록폰기를 역이용할 궁리에 빠져있습니다. 내 참, 씨도 안 먹힐.....게다가 그는 록폰기와의 커넥션을 지속적으로 반대하는 나를 경계했습니다. 요코하마 건설프로젝트를 나한테 맡긴 게 불안해진 거지요. 그래서 선배가 죽인 그자를 내 앞의 사업 전면에 내세웠던 겁니다.”

카사하라가 술잔을 들어 신마치를 향해 건배하고는 마셨다. 하지만 매섭게 노려보는 눈길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더라도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면 나를 도와주는 꼴이 되지 않나. 적어도 자네한테 이로울 일은 없을 텐데?”

“어차피 난 우리 오야붕과 맞장구를 칠 수 없습니다. 그 결과가 뻔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내 처지가 당장 심산유곡에 빠져버린 거 아닙니까. 난 지금 선배를 돕거나 살려주기 위해 아량을 베풀 처지가 아니에요. 내가 살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거지요.”

“자네가 살기 위해서 나를 살리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록폰기는 어차피 오타구미의 수장이 될 그릇은 아니잖아요. 나 같은 피라미가 보기에도 그럴진대, 가와모토 대 오야붕 생각은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이야말로 사람 보는 안목이 깊다는 건 선배가 잘 알겁니다. 어차피 선배는 이번 일을 성공리에 마무리하면 오타구미의 다음 오야붕 감으로 입지가 확실하다는 건 우리도 알아요. 다시 말해 그런 선배에게 베팅하려고 결정한 거지요. 기왕 그렇게 결정한 이상, 선배를 돕기로 한 겁니다. 아무렴 선배가 그런 나를 죽이겠습니까? 옛정이 그리 얇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 길이 나와 저놈들이 살길이라고 판단한 거지요.”

그가 자신의 부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고는 비어있는 카사하라 잔을 채워주었다. 

카사하라는 믿기지 않았다. 그가 속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거침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기대했던 이상으로 그는 뱃속을 뒤집어 보였다. 그래도 카사하라는 신마치를 쥐어짰다. 무언가 더 있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자네가 나를 돕겠다니 고맙긴 하네. 그런데 말이야. 록폰기의 꿍꿍이를 비롯해 자네가 말한 모든 내용에 지금 증거가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런 마당에 무턱대고 내가 자네 말을 믿을 것 같은가?”

신마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창가로 다가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 동요는 없지만 마음 속 끓어오르는 번민까지 막을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그가 등을 보인 채 말했다.

“록폰기는 정말이지 용의주도한 자입니다. 그는 한참 전부터 선배를 제거하기 위해 준비한 것 같더군요. 그중 하나가 선배 가족 곁에 사람을 심어놓은 거죠. 선배 부인이 한국에서 칵테일 바를 경영하는 걸 알고 유능한 바텐더를 고용해서 파견했던 겁니다.”

카사하라가 놀랐다.

미란이 한국에서 소일거리로 칵테일 바를 운영한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더구나 마리가 전화 통화 때마다 새로 들어온 바텐더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은 기억이 났다. 미란과 마리 두 모녀는 그 바텐더와 가족처럼 지낸다는 인상을 받았다. 오히려 카사하라는 뜻하지 않은 청년이 두 모녀 곁을 지켜주어 흡족한 생각마저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바텐더가 록폰기의 하수인이었다?’

전율이 일었다.

자신의 가족에 대해 소상히 꿰고 있는 신마치의 이야기를 불신할 수는 없었다. 그가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고는 카사하라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런 사실을 나도 엊그제 오야붕에게 불려 가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록폰기가 이번에 새로운 일을 꾸몄더군요. 그것은 선배의 목줄을 완전히 틀어쥐기 위한 회심의 카드였던 것 같습니다.”

카사하라가 벌떡 일어나 신마치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말해라! 신마치! 내 가족에게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이냐. 만약 내 가족 털 끝 하나라도 손상을 입었다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갑작스런 일에 신마치의 부하들이 부산해졌다. 그러나 신마치가 한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하고 천천히 카사하라의 손을 풀었다.

“선배, 앉으십시오. 내 이야기를 마저 들어야지요.”

카사하라가 그를 노려보면서 자리에 앉자 신마치가 말했다.

“록폰기가 선배 딸을 납치해서 우리 오야붕에게 보낸 겁니다. 그런데 오야붕도 선배 딸의 처리만은 찜찜했던 모양입니다. 선배가 무서웠겠지요. 그런 면에서 선배는 유명하잖습니까. 오야붕은 나한테 선배 딸의 처리를 맡기더군요. 만약을 위한 총알받이로 눈엣가시였던 나를 택한 거지요.”

“그럼, 내 딸 마리를 자네가 데리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된 거지요.”

“그 아이를 당장 데려오게. 어디 있나!”

“여긴 없습니다. 더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놨지요. 그렇지 않아도 선배가 오기 전에 연락을 해두었습니다. 지금 부하들이 마리 양을 이곳으로 데려오고 있는 중입니다. 거의 도착할 시간이군요.”

신마치가 시계에서 눈을 떼고 카사하라를 바라보았다. 카사하라가 술병을 들어 자기 잔으로 가져갔다. 그의 손이 작게 떨리는 것이 신마치의 눈에도 보였다. 그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신마치가 술병을 받아 그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우리 오야붕이 뒤처리를 내게 맡긴 것은 선배와 따님의 행운입니다. 이제 선배도 내 진정을 인정하게 될 겁니다. 선배가 곧 따님을 맞이하게 되면 내가 말한 모든 내용의 충분한 증거가 될 테니까요.”

목이 탔다. 심한 갈증이 밀려오는 카사하라가 술을 들이켜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네 오야붕은 기뻐하지 않을 텐데?”

“그렇겠지요. 어차피 나를 선배의 총알받이로 사용하려던 사람입니다. 나 역시 그와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게 된 거지요. 선배가 록폰기와 전쟁을 치러야 하듯, 나 역시 마찬가지가 된 겁니다. 선배가 오야붕의 친위대장을 죽여주어서 일이 좀 수월하게 되긴 했지만.”

딸의 납치를 카사하라가 미리 알았더라면 그는 모든 일을 제치고 딸의 행방을 찾을 것은 뻔했다. 그리고 납치한 자들을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그가 요코하마 건설프로젝트에 매달릴 수 없다는 계산까지 록폰기는 도출해냈다. 구로카와구미와의 커넥션 외에도 카사하라를 쓰러트리기 위해 세운 록폰기의 계획은 주도면밀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카사하라의 보답을 받을 차례였다. 카사하라가 결연하지만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신마치, 차후 일은 나한테 맡겨라. 내가 모두 처리하겠다.”

그러고는 카사하라가 신마치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갑자기 산장 정원이 시끄러워졌다. 자동차들이 들어오는 소리였다. 신마치가 일어서며 말했다.

“이제야 오는군. 선배, 나가서 따님을 맞으시지요. 지난 며칠 마리 양이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차후 일은 내게 맡겨라. 카사하라가 결연하지만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10

디오네에 탄 성미란이 준을 타고 있는 마리와 나란히 걸었다. 충주호를 낀 산길 옆으로 녹음이 푸르렀다. 호수의 물결도 조용했다. 한참을 말 달려 온 두 모녀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다.

“엄마. 얘가 덩치는 작아도 힘이 참 좋아요. 디오네한테 지지 않으려고 달리는 것 좀 봐요. 그렇게 달렸어도 지쳐 보이지도 않잖아요.”

“준이 말이니? 어련하겠니. 네 아빠가 고른 말인데.”

마리의 조랑말인 준도 대견했지만, 성미란은 1년 전의 악몽을 벗고 현실로 돌아와 준 마리가 더 대견했다. 마리는 납치당했던 그 일을 빠르게 잊고 정신적인 성숙을 이루어냈다. 세상 사람들에겐 그 수 만큼이나 다양한 신념과 성격이 존재하지만, 그 속에서 바른 삶의 척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마리는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 만큼 오히려 마리의 밝은 성격은 더욱 또렷해졌다. 

상규가 체포되던 날 미란이 마리에게 말했다.

“세상은 다양하지만, 옳은 가치는 변할 수 없어. 마리야, 네가 상규에게 실망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사람까지도 실망의 대상에 넣으면 안 되는 거란다. 오히려 상규같이 검은 의도로 자기 내면을 숨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해. 세상은 여전히 순수한 영혼들에 의해 이끌려가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실 미란은 그동안 내면을 숨길 수 있는 그 많지 않은 사람 중에 카사하라도 포함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1년 전, 그동안 보지 못했던 카사하라의 표정을 처음 보면서 그도 다른 대부분 아빠처럼 가족을 향한 애끓는 마음을 가진 평범한 남자라는 것을 처음 느꼈다. 그가 마리를 데리고 왔을 때 미란에게 말했다.

“미안하오. 가족을 지키지 못한 가장은 부끄러운 사람이오. 정말 부끄럽소. 하지만 앞으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과 마리를 지키겠소. 더 이상 부끄러운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오. 정말 미안하오, 여보.”

그때 세상을 바라보는 성미란의 눈에도 새로운 지혜가 깃들었는지 모른다. 냉혈동물로만 알았던 카사하라가 비로소 따뜻한 체온을 가진 사람으로 보인 것이다.

성미란을 태우고 걸어가던 디오네가 갑자기 앞을 향해 울었다. 숲에 가려진 모퉁이 길 저쪽에서 또 한 마리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마리가 소리쳤다.

“어머, 이건 니케 울음소리에요. 니케가 저 앞에 있나 봐요.”

“니케가? 그런데 니케가 왜 거기 있는 거지? 집에서 혼자 여기까지 왔다는 말이니?”

마리가 준을 몰아 달려갔다. 숲길 모퉁이까지 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마리가 그곳에 도착해서 준을 멈추고는 외쳤다.

“얏호!”

마리가 뒤돌아서 미란에게 소리쳤다.

“엄마! 여기 누가 왔는지 보세요.”

미란이 디오네를 몰아 마리 옆으로 달려가니 그 앞에 니케에 올라탄 카사하라가 웃고 있었다.

“박씨에게 당신과 마리가 이쪽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왔소.”

일본 굴지의 건설회사인 도부토건 회장이자, 일본 관동 최대 조직인 오타구미의 총 오야붕인 카사하라가 말에 올라타 있는 차림은 우스꽝스러웠다. 승마복도 아니고 헐렁한 면바지에 셔츠를 걸친 채 땀을 흘리고 있었다. 평소처럼 오일도 바르지 않은 머리가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주위에 일행도 없이 그는 혼자였다.

“말을 잘 타지도 않던 사람이 안전장구도 없이 그렇게 말을 타면 어떻게 해요. 그러다가 떨어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성미란의 핀잔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이 니케가 나를 반가워하지 뭐요. 여기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었소.”          


이 니케가 나를 안전하게 데려다주었소.


그 날 저녁, 카사하라는 성미란을 데리고 별장 주위 하얗게 켜진 등불 길을 산책했다. 성미란이 마리와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할 때 카사하라는 잠자코 듣고 있었지만, 아내의 손을 잡거나 어깨에 팔을 두르지 않았다. 그는 함께 나란히 걸으면서 미란의 이야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미란의 이야기가 끝나자 카사하라가 말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소.”

카사하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성미란이 걸음을 멈추고 그와 마주 섰다. 하지만 카사하라는 아내를 마주 보지 않았다. 그가 어두운 허공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난 결심했소. 아직도 당신이 원한다면 이혼해주기로 말이오. 물론 그런다 해도 당신은 끝까지 보호할 거요. 마리 엄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당신의 행복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오.”

말을 마치고 카사하라가 미란을 바라보았다. 등불에 비친 미란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카사하라가 자기도 모르게 미란의 볼을 어루만졌다. 카사하라는 알고 있었다. 아내는 지금까지 자신을 사랑했던 적이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카사하라는 미란을 볼 때마다 공허함을 느꼈다. 그렇다고 미란을 사랑하는 자기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카사하라는 미란의 행복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렸다. 그것을 자기가 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미란의 볼을 어루만지는 카사하라의 손에 따뜻한 물기가 느껴졌다. 미란의 눈물이었다. 미란이 자기 볼에 있는 카사하라 손을 잡았다. 미란이 말했다.

“저는 당신 아내에요. 제가 마리 엄마라는 사실이 변할 수 없듯이 그 사실도 변할 수 없어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미란이 그윽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젖은 눈동자 속에서 카사하라는 처음으로 깊은 사랑의 무게를 보았다. 

카사하라가 미란을 끌어안았다. 그녀 향기가 카사하라의 코로 밀려들어왔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아내의 향기였다. 이제 그 향기를 느낄 때마다 공허하지 않으리라. 그동안 자신에겐 없는 줄 알았던 눈물이 흘러내리자 카사하라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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