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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흰 밀가루의 슬픈 역사

by 남동휘

오래전 여름 피서를 전라남도 광양에 있는 백운산 계곡으로 갔다. 그때 같이 갔던 사촌 동서와 있었던 라면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우리는 다들 잠든 시간에 술을 한 잔 더 하고 싶었다. 소주는 한 병 남았는데 안주가 없었다. 주인을 깨우기 싫은 우리는 민박집에서 조용히 컵라면 2개를 가져와 술안주로 삼아 맛있게 먹었다. 그 집은 작은 가게를 같이 하고 있었다. 다음날 말도 없이 컵라면을 가져갔다고 화를 내는 주인과 계산을 했다. 우리는 말싸움 대신 컵라면이 정말 맛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서 그곳을 나왔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가끔 동서와 하곤 한다. 당시 라면을 비롯한 우리들의 흰 밀가루 사랑은 대단했다. 물론 지금은 라면을 안 먹으니 그때 그 맛을 다시 느낄 수는 없다. 지금도 흰 밀가루의 소비량 중에 라면이 차지하는 비율은 엄청 날 것이다.

1970년 즈음에 분식장려 운동이라는 정부 정책이 있었다. 정부에서 모든 음식점에서 밥의 25% 이상 보리쌀이나 면류를 섞어 팔게 했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점심은 쌀을 원료로 하는 음식은 팔지 못하게 했다. 이와 함께 쌀밥만 먹는 집은 촌스럽고 빵을 먹는 것이 마치 세련된 국민인 듯 나라에서 세뇌를 시켰다. 아침에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가 부잣집의 아침밥인 듯 보였던 때였다.

나의 군대 생활 중에 매주 토요일은 분식의 날이었다. 점심에는 라면을 커다란 찜기로 삶아주었다. 국물은 따로 끓였다. 찜기에서 나온 라면에 국물을 부으면 불어서 손가락 굵기가 되었다. 퉁퉁 불어 터진 라면도 맛있어서 많이만 주면 좋아할 때였다. 그렇게 국가가 국민의 입맛을 통제하던 시절을 살다 보니 밀가루 음식이 밥을 대신해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며 살아왔다.

한국 전쟁 이후 우리나라는 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당시 미국은 넘쳐나는 밀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이때 미국 정부와 다국적 곡물 기업인 카길이 만들어 낸 법안 PL480(Public Law) 원조가 구세주 행세를 하며 등장했다. 1954년 통과된 이 법은 ‘평화를 위한 식량 법’이라 불리며 미국에 남아도는 농산물을 원조 형식으로 처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원조 물자로 들어온 밀은 철저하게 우리 국민의 식성을 개조하고 농업구조를 바꾸었다. 배고픈 우리 국민은 미국에 남아도는 흰 밀가루를 먹어치우고, 정부는 원조 밀가루를 판 수익금으로 미국 무기를 사들이는 데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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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원조 수입 밀에 입맛을 들이는 사이 우리 농촌의 밀밭이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우리 밀은 종자조차 구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1989년 가톨릭 농민회와 한 살림이라는 민간단체에서 우리 밀 씨를 뿌리면서 다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흰 밀가루를 볼 때 신토불이(身土不二), 즉 몸과 땅은 하나라는 말을 떠 올려야 한다. 풀어 설명하면 우리 땅에서 자란 음식이 바로 우리 몸이 되고 우리도 결국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 내가 먹는 것과 내 몸이 다르지 않다. 우리 땅에서 자란 농산물이 우리 체질에 가장 잘 맞는다는 말이다. 수입한 흰 밀가루는 우리 농산물이 아니다.

김미수는 ((생태 부엌))에서 우리 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 밀은 가을걷이가 끝난 후 씨를 뿌려 겨울이 지나 초여름에 수확하는 겨울 밀이다. 벼 수확이 끝난 겨울 논에서 자라는 푸른 밀이 공기를 정화하고 토양의 수분을 보존한다. 병충해가 없어 농약을 따로 칠 필요가 없는 환경친화적인 작물이다. 그러나 수입 밀은 재배되면서부터 농약과 비료를 무분별하게 살포할뿐더러 유통과 운송 과정에서 사용되는 방부제 등이 우리 건강에 위해를 가한다.

주식으로서가 아닌 어쩌다 먹는 밀가루 음식이라면 가능한 한 우리 밀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흰 밀가루보다 통곡 밀가루가 건강한 이유는 정제하는 과정을 통해 곡물의 영양성분이 덜 손실돼서다. 미국 터프츠대학교 뉴바이(Newby) 박사는 미국 임상영양학회지(2003년)에 발표한 연구보고서에서 흰 빵 등 정제된 식품을 많이 먹는 사람은 통밀빵 등 통곡 식품을 즐기는 사람에 비해 허리둘레가 훨씬 굵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것은 통곡물 식품들이 신진대사가 잘 일어나 에너지로 모두 소모하여 내장 지방으로 쌓이는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딸에게 하면 “아빠는 거의 50년 이상을 흰 밀가루로 만든 달콤한 빵 등을 먹지 않았어? 그런데 나는 이제 30대인 걸 아직도 아빠 따라가려면 20년은 더 먹어야 비슷해지겠다. 젊은이와 입맛이 달라서 아빠는 흰 밀가루 음식을 끊을 수가 있지만 나는 어렵다”라고 말한다. 나는 입맛은 늙고 젊음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건강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당뇨병 환자가 되었던 과정에 흰 밀가루도 한몫했다는 이야기를 해서인지 지금은 딸이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브루스터 닌Brewster Kneen의 『누가 우리의 밥상을 지배하는가』는 세계 곡물시장의 75%를 장악하고 있는 다국적 곡물 기업 카길의 활동을 파헤친 책이다.

이 책에 우리 식탁이 바뀐 의미심장한 대목이 있다. ‘식량 원조, 특히 밀 원조는 유아식과 흡사한 형태로 활용되었다. 처음에 한번 입맛을 들이면 카길의 상품을 평생 팔아먹을 시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식량은 말 그대로 사람들을 굶주려 죽는 것에서 구원하는 직접 원조의 형태로 침투했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형태는 남아도는 미국 식품을 위한 시장을 창출하는 도구로 이용된 것이다.

카길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 한국은 앞으로 주요 곡물과 식물성 기름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축의 사료까지 모두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 한국인들은 소규모 채소 경작이나 닭, 오리 농사 정도에 만족하게 한다 ‘ 였다. 결국 많은 부분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고 있는 ’ 식량안보‘에 관한 슬픈 현실이다.

브루스터 닌/『누가 우리의 밥상을 지배하는가』/안진환 역/시대의 창/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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