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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두더지 할아버지와 쥐 이야기

 어느 해 겨울, 숲은 유난히 추웠다. 수북하게 눈까지 내려 쥐들이 사는 마을은 꼬리도 안 보일 정도로 눈에 푹 파묻혔다. 다행히 가을에 저장해 둔 곡식 덕분에 쥐들은 집안에서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차림의 두더지 할아버지가 쥐 마을에 나타났다. 등에 커다란 시계를 매달고 말이다. 무거운 시계 때문인지 허리를 반쯤 숙인 채로 두더지 할아버지는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두더지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했던 터라 배가 몹시 고팠다.

 “이런,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날리는군. 서둘러 머물 곳을 찾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겠어.”

 두더지 할아버지의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다. 눌러쓴 밀짚모자에 눈이 구름처럼 쌓여가자 할아버지의 발걸음은 무거워져만 갔다.

 “근데 이게 무슨 냄새지? 가만있자, 많이 맡아보던 음식인데……”

 때마침 두더지 할아버지의 콧구멍 속으로 익숙한 냄새가 들어왔다. 두더지 할아버지는 오랜 땅속 생활로 시력이 나빠졌지만, 반대로 냄새를 아주 잘 맡는 훌륭한 코를 갖고 있었다.

 “그렇군! 콩과 보리를 함께 볶고 있는 게 분명해. 고것 참 맛있겠는걸.”

 두더지 할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냄새를 쫓아갔다.     


 똑! 똑! 똑!

 모자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두더지 할아버지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인기척이 없자, 이번에는 힘주어 문을 두드렸다.

 쿵! 쿵! 쿵!

 집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잠시 후 쥐 한 마리가 화들짝 놀라 문을 열고 나왔다. 한눈에 보아도 뚱뚱한 쥐였다. 뚱뚱한 쥐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누구쇼? 왜 남의 집을 그렇게 함부로 두들기는 겁니까?”

 뚱뚱한 쥐의 화가 난 태도에 두더지 할아버지가 슬쩍 미안해졌다.

 “쥐야, 미안하구나! 너무 추워서 내가 실수를 했구나. 잠시라도 몸을 녹일 수 있을까 해서 말이야. 에취!”

 두더지 할아버지는 말이 끝나자마자 크게 재채기를 했다. 평소 욕심 많고 남을 돕기 싫어했던 뚱뚱한 쥐는 당장 할아버지를 내쫓으려 했다. 그러다 문득 불안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내가 저 두더지의 부탁을 거절하면, 문을 두드렸던 힘으로 내 집을 부숴 버릴지도 몰라. 그렇다고 집에 들어오게 하면 저 덩치 큰 두더지가 내 음식을 몽땅 먹어 치우고 말겠지. 흠, 어떻게 하면 좋을까?’

 뚱뚱한 쥐는 선뜻 대답을 못 한 채 고개만 갸웃갸웃했다. 두더지 할아버지는 뚱뚱한 쥐의 속셈을 금세 알아챘다. 그래서 배를 앞으로 쭉 내밀고 통통 두드리며 말했다.

 “쥐야, 나는 밥을 먹은 지 얼마 안 돼 배가 부르단다. 그러니 눈이 그칠 때까지 잠깐 쉬었다 가는 거로도 충분할 것 같구나.”

 그제야 안심이 된 뚱뚱한 쥐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부탁하니 어쩔 수 없군요. 대신 눈이 그치면 바로 떠나야 합니다. 알겠죠?”

 두더지 할아버지는 시계를 짊어지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쥐의 집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고 따뜻했다. 거실 중앙에는 네모란 돌을 쌓아 만든 난로가 빨갛게 달궈진 채 집안을 훈훈하게 했다. 돌 위에 놓인 동그란 팬에선 검은콩과 보리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볶아지고 있었다.

 배가 몹시 고팠던 두더지 할아버지는 돌 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꼴깍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뚱뚱한 쥐의 귀까지 들렸지만, 뚱뚱한 쥐는 애써 모른 척했다. 

 두더지 할아버지는 어깨에 메고 있던 커다란 시계를 내려놓았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시계가 바닥에 놓였다. 

 호기심이 생긴 뚱뚱한 쥐는 곁눈질로 시계를 살펴보았다. 보통 시계와는 다르게 시곗바늘이 엄청 많은 시계였다. 대충 바늘을 세어보아도 열 개는 넘어 보였다. 시계 판에는 1부터 12까지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 대신, 알 수 없는 기호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다양한 길이의 시곗바늘은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분주하게 시계 판을 돌고 있었다.     


 우두득! 우두득!

 콩과 보리가 뚱뚱한 쥐의 입에서 으깨질 때마다 고소한 냄새가 두더지 할아버지의 코를 찔렀다. 뚱뚱한 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음식을 먹기만 했다. 인정머리 없는 뚱뚱한 쥐의 행동에 슬며시 화가 난 두더지 할아버지는 뚱뚱한 쥐를 조금 혼내 주고 싶었다.

 “쥐야, 쭉 보아하니 너는 매일 텁텁한 곡식만 먹는 것 같구나. 마침 내게 맛있는 치즈가 있는데 좀 나눠줄까?”

 뚱뚱한 쥐는 식사를 멈추고 두더지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치즈요? 할아버지에게 정말 치즈가 있다고요? 어디에 있는데요?”

 두더지 할아버지는 바닥에 놓인 시계를 가리켰다.

 “이 시계 속에 있지. 사실 이 시계 속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있거든. 네가 시간을 조금만 팔면 이 안에 있는 치즈를 먹을 수 있단다.”

 순간 뚱뚱한 쥐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하하! 시간을 판다고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어떻게 시간을 판다는 거예요?”

 “쥐야, 이 시계는 보통 시계가 아니란다. 시간을 팔고 사는 신비한 재주가 있거든. 못 믿겠으면 한번 시간을 팔아보렴!”

 뚱뚱한 쥐는 바닥에 놓인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늘들이 쉴 새 없이 알 수 없는 기호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분명 평범한 시계는 아니었다. 뚱뚱한 쥐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저 시계 안에 진짜 치즈가 있을지도 몰라? 그깟 시간은 날마다 넘쳐나는 건데, 내가 조금 판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겠지. 어차피 시간은 또 생길 테니까. 만약 저 두더지가 나를 속인 거라면 그 핑계로 두더지를 당장 이 집에서 쫓아내면 되고.’

 뭔가 결심을 한 듯 뚱뚱한 쥐는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말했다.

 “좋습니다. 제가 시간을 팔아보죠. 만약 저 시계 안에 치즈가 없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뚱뚱한 쥐는 험악한 표정으로 두더지 할아버지를 쏘아보았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아라. 그래, 시간은 얼마나 팔 생각이냐?”

 할아버지의 질문에 뚱뚱한 쥐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대충 일주일 정도? 그 정도면 됐죠? 어서 치즈나 주세요!”

 뚱뚱한 쥐는 갈색 털이 촘촘하게 자란 손을 쭉 내밀었다.

 “오냐, 잠시만 기다려라!”

 두더지 할아버지는 시계 뚜껑을 열고 뒤적뒤적했다. 곧 할아버지는 세모 모양의 치즈 한 조각을 빼냈다. 고소한 치즈 냄새가 집안에 쫙 퍼졌다.

 “자, 여기 치즈 받아라!”

 뚱뚱한 쥐는 어리둥절해졌다.

 “진짜였어! 저 시계는 마법 시계였어!”

 치즈 냄새가 콧구멍을 가득 채우자, 뚱뚱한 쥐는 자기도 모르게 치즈를 한입 먹었다. 사르르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치즈는 지금까지 먹었던 그 무엇보다 맛있었다.

 “정말 맛있다! 이렇게 맛있는 치즈가 있다니!”

 뚱뚱한 쥐는 순식간에 치즈 한 조각을 먹어 치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차피 넘쳐나는 시간을 조금 더 판다고 무슨 문제라도 있겠어? 이렇게 맛있는 치즈를 먹을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뚱뚱한 쥐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치즈 또 주세요! 시간 또 팔게요!”

 이후 뚱뚱한 쥐는 쉬지 않고 시간과 치즈를 맞바꿨다. 두더지 할아버지는 그런 쥐가 차츰 걱정되었다.

 “쥐야, 시간은 소중한 거란다. 한번 사용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거든. 오늘은 그 정도만 파는 것이 좋겠구나.”

 두더지 할아버지의 충고에도 한번 치즈 맛을 본 뚱뚱한 쥐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오히려 화까지 내며 두더지 할아버지를 위협했다. 결국, 뚱뚱한 쥐는 이튿날 새벽까지 치즈를 먹기 위해 시간을 팔고야 말았다.

 아침이 되어서야 눈이 멈췄고 사납던 겨울 날씨도 잠잠해졌다. 두더지 할아버지는 떠날 채비를 하려고 시계를 다시 어깨에 멨다. 한편, 뚱뚱한 쥐는 밤새 치즈를 먹어 불룩해진 배를 쭉 내밀고 쿨쿨 잠만 자고 있었다.     


 ‘꼬르륵! 꼬르륵!’

 두더지 할아버지의 배속에 난리가 났다. 며칠 동안 쫄쫄 굶었더니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뚱뚱한 쥐가 시간을 너무 많이 팔아서 시계가 예전보다 훨씬 무거워졌다. 두더지 할아버지는 끙끙거리며 눈이 수북하게 쌓인 길을 걸었다.

 “킁! 킁! 이건 무슨 냄새지? 그렇구나! 옥수수 수프 냄새야.”

 때마침 옥수수 요리 냄새를 맡은 두더지 할아버지는 곧장 그 집을 향해 갔다. 그 집의 주인은 한눈에 보아도 착한 쥐였다. 착한 쥐는 얼른 할아버지를 집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착한 쥐는 따듯한 차를 내주며 말했다.

 “할아버지, 이 차를 드시고 몸을 좀 녹이세요. 저의 집에는 옥수수밖에 드릴 게 없어요. 괜찮으시다면 같이 식사하시겠어요?”

 두더지 할아버지는 착한 쥐의 예의 바른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어제 만났던 뚱뚱한 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착한 쥐야, 고맙구나! 옥수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란다.”

 두더지 할아버지는 착한 쥐가 건네준 옥수수 수프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연거푸 세 접시를 먹고 나서야 할아버지가 말했다.

 “잘 먹었다! 이렇게 맛있는 옥수수 수프는 처음인걸. 답례로 네게 선물 하나를 주고 싶구나.”

 두더지 할아버지는 벽에 기대어 놓은 시계를 향해 걸어갔다. 시계 뚜껑을 열더니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쥐야, 이 주머니에는 시간이 들어있단다. 이 시간으로 앞으로 오랫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렴. 지금처럼 착한 일도 많이 하고.”

 착한 쥐는 시간을 선물한다는 것이 선뜻 믿기지 않았지만, 공손하게 주머니를 받았다. 두더지 할아버지는 다시 시계를 짊어지고 착한 쥐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눈이 수북하게 쌓인 숲을 향해 서서히 사라졌다.


 두더지 할아버지가 쥐 마을을 다녀가고 한 달이 더 지나고 나서야 기나긴 겨울이 끝났다. 따스한 봄볕이 쥐 마을을 비추기 시작하자, 겨울을 피해 남쪽으로 떠났던 새들도 돌아왔다. 쥐들은 하나둘 문을 열고 새봄을 맞이했다. 뚱뚱한 쥐와 착한 쥐도 문을 열고 나왔다. 

 착한 쥐는 길에서 우연히 뚱뚱한 쥐를 마주치고 그만 까무러치도록 놀라고 말았다.

 “너 혹시 뚱뚱한 쥐 아니니? 그런데 어떡하다가 이렇게 늙어버린 거야?”

 겨울을 보내는 동안 뚱뚱한 쥐는 할아버지로 변해 있었다. 허리는 땅에 닿을 만큼 구부러져 있었고 털은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그것마저 대부분 빠져버려 피부가 듬성듬성 보일 정도였다. 

 착한 쥐의 말에 뚱뚱한 쥐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거울 속엔 젊은 모습의 뚱뚱한 쥐는 온데간데없고, 꾸부정하게 늙어버린 할아버지 모습만 있었다. 뚱뚱한 쥐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치 뭔가에 크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그러다 두더지 할아버지에게 시간을 팔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런, 그 두더지 할아버지 얘기가 모두 사실이었어? 그럼, 내 시간을 몽땅 팔았던 거야? 그깟 치즈를 먹기 위해서 내 소중한 시간을…….”

 뚱뚱한 쥐는 땅을 치고 가슴을 두드리며 후회했지만, 아무리 울고 후회해도 한번 판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 지내던 뚱뚱한 쥐는 다음 겨울을 다시 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한편, 두더지 할아버지에게 시간 선물을 받은 착한 쥐는 어떻게 되었을까? 착한 쥐는 예쁜 색시와 결혼해 아기도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놀라운 사실은 손자들이 결혼할 때까지도 여전히 젊음을 유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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