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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양들의 대화

 스스락! 스스락! 그건 햇살이 부서지는 소리였어. 햇살이 풀잎에 부딪힐 때 나는 소리였지. 스스락! 스락! 스스락! 스락! 그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어. 우리도 모르게 입안 가득 침이 고이고 말았어. 그럼 그렇지! 누군가 참지 못하고 환호성을 질렀어.

 "야호! 토끼풀이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야?"

 그래, 토끼풀이야! 드디어 토끼풀 초원에 온 거였지. 대충 헤아려도 거의 반년 만에 찾아온 것 같았어. 우리는 저마다 땅에서 입을 떼지 않고 토끼풀을 우적우적 뜯어 먹었어. 토끼풀이 질겅질겅 씹힐 때마다 단 즙과 쓴 즙이 혓바닥을 황홀하게 만들었어. 우리는 쉬지 않고 토끼풀을 먹고 또 먹었어. 기어코 그 넓던 초록 토끼풀 초원이 황톳빛 맨땅으로 변할 때까지 먹고 나서야 땅에서 입이 떨어졌지.

 우리의 즐거운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았어. 우리는 최근에 가져야 할 행복을 한꺼번에 모두 얻은 것처럼 기뻤지. 그런데 말이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너무 화나지 않겠어? 아니, 그렇게 맛있는 토끼풀 초원을 어떻게 반년 만에 올 수 있는 거냐고?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누군가 참지 못하고 불만을 터뜨리고 만 거야.

 "글쎄, 어제는 내가 가시 달린 잎사귀를 먹은 거야. 온종일 혓바닥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고. 저 개들이 오늘처럼 토끼풀 초원으로 우리를 데리고 왔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야. 아이고, 아파라!"

 그 친구는 연신 혓바닥을 날름거렸어. 빨갛게 부어오른 혓바닥이 무척이나 안 돼 보였어. 그러자 다른 친구들도 한 마디씩 불평을 늘어놓는 거야. 그동안 개들에 대한 불만이 많이 쌓였던 거지.

 "맞아, 문제는 저 개들이야! 개들은 날마다 소들을 데리고는 맛있는 풀밭으로 간다는 거야. 대신 우리는 텁텁하고 맛없는 곳만 데려가는 거지. 우리가 저 개들한테 속고 있는 거야!"

 "어쩐지, 이제야 소들이 왜 우리보다 덩치가 큰지 알겠네."

 "소와 개가 한통속이었다니? 정말 화가 나 미치겠군!"

 한번 터져 나온 불만은 쉽게 멈추지 않았지.

 "계절마다 털이 잘려 추위에 고생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개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 있지?"

 "못된 개들! 저 개들과 함께 있는 한 우리는 계속 불행할 거야!"

 "맞아, 저 개들만 없다면 우린 더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농장으로 돌아오는 내내 우리는 씩씩거리며 흥분을 삭일 수가 없었어.   

   

 태양이 마지막 남은 조각을 태우고 있을 때쯤 우린 모두 농장으로 돌아왔어. 우리는 늘 하던 대로 울타리 안으로 나란히 들어갔지. 개들도 어둠 속으로 걸어갔고 말이야. 길게 드리워진 개들의 그림자는 끝까지 우리를 감시하는 것 같았어. 

 울타리 안은 고요했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지만, 아직도 밤공기는 쌀쌀했어. 우리는 그런 상황에 익숙했지.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데 모였어. 서로 몸이 닿도록 말이야. 그러면 제법 따뜻한 온기가 올라와 그럭저럭 추위를 버틸 수 있었거든.

 불빛! 타나 남은 태양 조각처럼 불빛이 어둠을 뚫고 우리의 시선을 끌어모았어. 개들이 사라진 어둠 안에서 나타난 불빛은 슬며시 우리의 시샘과 상상을 자극했지. ‘아마도 개들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수프를 먹고, 푹신한 건초 더미에 몸을 푹 파묻은 채로…… 다리를 쭉 뻗고 아침이 올 때까지…… 하지만 우리는 오늘도……’

 가뜩이나 토끼풀에 대한 진실을 알아버린 탓일까? 우리의 인내심이 자꾸만 절벽을 향해 걸어가는 것 같았어. 억울함이 폭발할 것 같았지. 우리는 왜 이렇게 당하고 사는 걸까? 누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걸까? 그렇군! 누군가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어. 바로 울타리였던 거야! 그동안 어딘가 늘 불편했고 갑갑했는데, 드디어 그 이유를 알게 되었지. 우리는 곧장 울타리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어. 

 "너희들, 내가 왜 뒤뚱뒤뚱 걷는지 알아? 모두 다 울타리 때문이야. 지난번 말뚝에서 삐져나온 가시에 엉덩이를 찔린 거라고!"

 "저런, 정말 위험했구나! 지금은 어때? 괜찮은 거야?"

 우리는 진심으로 그 친구를 걱정했어.

 "다행히 나는 많이 좋아졌어. 하지만 저 친구 얘기를 들으면 울타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게 될걸?"

 우리의 시선은 파도처럼 너울거리듯 한 친구에게 다다랐어. 그 친구는 슬픈 천사처럼 웅크리고 있었지. 누구도 입을 열어 재촉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눈빛은 그 친구의 입을 열기에 충분했지.

 "엄마를 잃어버렸어!"

 그 친구가 말했어.

 "며칠 전 엄마가 누군가에 이끌려 밖으로 끌려나갔거든. 나는 소리를 지르며 엄마를 불렀어. 엄마도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달려갔어. 엄마를 잃어버릴 수 없으니까. 그러다 저 울타리에 부딪혀 쓰러지고 말았지. 눈을 떴을 때, 울타리 안에는 나 혼자 남겨져 있었어."

 "못된 울타리! 어쩜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수 있는 거지?"

 울타리에 대한 우리의 미움은 점점 커져만 갔어.

 "울타리만 없다면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을 텐데."

 "맞아! 저 울타리만 없으면 우린 정말 행복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참을 수 없었어. 용기를 내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지.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어. 그동안 머릿속에서 맴돌았던 생각을 말할 때였거든.

 "우리 모두 여기를 떠나자!"

 일순간 조용한 정적이 흘렀어. 커다란 담요로 불씨를 끄듯, 모두의 생각과 모두의 말이 내 말 한마디에 꺼져버렸지.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없었어. 한껏 솟아난 용기는 쉽게 꺾이지 않았거든.

 "우리 모두 여기를 떠나자! 개들에게서 그리고 울타리에서 벗어나자! 저 친구의 엄마를 찾아주자! 매일 토끼풀 초원에서 식사하자! 우린 그동안 남들에게 도움만 주었어. 하지만 그 대가를 보라고? 우리에게 남는 건 뭐지? 이제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사는 거야!"

 친구들은 내 얘기에 집중했어. 나는 친구들의 눈빛에서 열망을 보았어. 자유를 향한 열망! 지금껏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장막을 내가 걷어낸 거야. 그날 우리는 중대한 결심을 했어. 완벽한 탈출 말이야. 먼 훗날 나는 위대한 영웅으로 기억되겠지.          

 

 "자유다! 자유!"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울타리를 탈출한 우리에게 환호성이 떠나지 않았어.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누렸던 거야. 우리의 엄마, 아빠, 그분들의 엄마와 아빠까지도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우리가 얻어낸 거야. 

 우리의 행진은 멋지고 당당했어. 아침 무렵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우리의 뜨거운 전진을 멈출 순 없었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어.

 "가자, 토끼풀 초원으로!"

 우리는 계속 걸었어. 신나는 리듬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지. 자박자박 발걸음, 덩실덩실 어깨춤, 싱글벙글 입꼬리에 희망의 노래가 연주되었어. 

 그런데 무슨 일일까? 분명 어제보다 훨씬 많이 걸은 것 같은데, 왜 토끼풀 초원이 보이지 않는 거지? 맛있는 햇살 소리가 벌써 우리의 귀에 들렸어야 했는데, 도대체 왜 윙윙 바람 소리만 들리는 걸까?

 정오의 태양이 이글거릴 때쯤 우리의 걸음이 멈췄어. 몇 개의 언덕을 넘으면서 부풀었던 희망은 그 크기가 바람에 날려갈 만큼 줄어있었지. 우리는 방향을 잃고 황량하고 메마른 땅에 갇혀버린 거야.

 어느덧 태양마저 모두 타버리고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왔어. 배고픔과 두려움에 포위된 우리에겐 한 가지 바람밖에 남지 않았어.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렇지만 어떻게 집에 돌아가야 할지 몰랐어. 그때 우리는 깨달은 거야. 개들 없이는 초원에도, 집에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개들이 있었다면 우리를 집으로 바로 안내했을 텐데……."

 "그래, 또 종일 굶지도 않았을 테고 말이야!"

 "괜히 집을 떠나서 이게 무슨 고생이람?"

 개들에 대한 그리움은 어느새 나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었어. 나를 향한 따가운 시선이 늘어만 갔지. 난 미안함과 책임감에 어쩔 줄 몰랐어. 무엇이든 탈출구를 찾아야만 했지.     


  우우우~ 우우우~

 그때 소름 끼치도록 오싹한 울음소리가 들렸어.

 "늑대야! 늑대가 나타난 것 같아!"

 "뭐? 늑대라고? 그럼 우리 어떻게 되는 거야?"

 "늑대가 나타났다면 꼼짝없이 모두 잡아먹히고 말 거야!"

 "안 돼! 나는 아직 엄마를 찾지 못했다고?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너나 할 것 없이 우리의 다리는 후들거렸고, 이빨 부딪치는 소리는 악마의 합창처럼 서로의 귀에 달그락거렸지. 곧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늑대들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어. 늑대들은 서서히 우리를 포위했지. 우리는 도망갈 시도조차 하지 못했어. 그때 우리의 머리에 뭐가 떠올랐는지 알아? 바로 울타리였어. 하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건 울타리가 아니라 포악한 늑대들이었지. 그들의 입에서는 썩은 냄새가 진동했어. 마치 지옥의 냄새처럼 우리를 기절시킬 것만 같았어.

 왈! 왈! 왈! 왈! 왈!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 맞아, 개들이 나타난 거야.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를 찾아 나선 거였지. 개들은 늑대보다 덩치는 작았지만, 용맹만큼은 절대 작지 않았어. 개들은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어. 개들의 맹렬한 공격에 늑대들은 꼬리를 내리고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어. 

 우리는 개들의 안내를 받으며 집을 향해 걸어갔어. 우리는 서로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지. 행복했던 거야. 그 웃음소리에 친구들에게 미안했던 내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졌어.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누구도 배고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 무사히 집에 돌아온 우리는 너도나도 울타리 안으로 뛰어 들어갔어.

 여전히 밤기운이 차가웠지만, 울타리 안은 어느 곳보다 포근하고 따뜻했어. 그날 우리는 그 어떤 밤보다 평화롭고 달콤한 잠을 잤지. 울타리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우리를 지켜 주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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