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리본>.2009 (1)
<하얀 리본>.2009 (1)<하얀 리본>.2009 (1)
하네케 감독은 시종일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질문을 던진다. 그의 많은 영화들이 그렇듯 <하얀 리본>에서도 관객은 제삼자의 눈으로 상황을 달리 볼 기회를 얻는다. 늦게 왔다는 이유로 끼니도 거른 채 클라라와 마르틴을 기다린 목사는 회초리를 든다. 훈육을 핑계로 자식들을 때리는 아빠. 카메라는 이때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아이들이 방에 들어가서 매를 맞을 때조차 방 밖에서 이 순간을 가만히 지켜본다. 아니, 듣는다. 아이들의 비명 소리를. 문은 이때 광경을 은폐하면서도 진실을 드러내는 이중적인 도구가 된다.
<하얀 리본>의 전체를 꿰뚫는 단어는 '은밀'이다. 원인 모를 범죄부터 숨 막힐 정도의 답답함을 주는 마을 분위기, 떼를 지어다니는 아이들부터 순수함과는 거리가 먼 어른들까지. <하얀 리본>은 미해결된 모순과 드러나지 않는 비밀들을 어떻게 풀어볼 생각이 없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다. 감독은 사건들마다 범인을 밝히려는 시도를 거의 찍지 않는다. <하얀 리본>은 장르성을 거부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점은 사건의 내막이 아닌 여러 사건의 발생을 가능케 한 은밀함이다.
소작농의 아들은 자신의 엄마가 남작 때문에 죽었지만 누구한테도 따지지 못한다. 남작에게 굽신거려야 입에 풀칠 가능한 소작농은 아들을 혼낸다. 영화 속 남작은 어떤 사람인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의 인성도 일처리 방식도 우린 모른다. 그의 정체는 불투명하다. 모르기는 소작농의 아들도 마찬가지다. 그는 남작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그(와 아빠)에게 당한 부조리는 어쨌든 뻐아프다.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던 그는 마을 잔칫날에 양배추밭을 테러한다.
(낙마했던) 의사의 막내 아들이 한밤 중 집 안을 배회한다. 잠에서 깼더니 누나(에바)가 보이지 않아 황급히 찾으러 나온 것이다. 그는 훌쩍이면서 모든 방 문을 열어본다. 마지막에 연 방에서 하얀 불빛이 나오면, 누나와 아빠(의사)가 함께 있다. 기어코 문을 연 동생은 영문도 모른 채 울먹인다. 덩달아 에바의 눈에서도 눈물이 그렁거린다.
누나 : 아빠가 귀걸이를 뚫어주셨어.
동생 : 아팠어?
누나 : 조금
동생 : 그래서 울었어?
누나 : 이제 안 울어.
아빠 : 아름다움엔 고통이 따르지.
동생은 에바가 당한 불의를 호소할 수 있는 마땅한 상대가 아니다. 울음을 참으면서 그녀는 자기 고통을 비유법으로 감춘다. 이렇게 또 하나의 진실이 하얀 불빛 아래서 소거된다.
이런 경우도 있다. 목사의 수준 높은 비유가 가득한 대사는 온통 그의 아들 마르틴의 자위 행위를 가리킨다. 그는 아들의 입에서 진실이 나오길 바라며 천천히 옥죄온다. 처음엔 그의 건강과 학교 생활을 걱정하더니, 점점 그의 치부를 들추는 쪽으로 서서히 문체를 바꿔간다. 아버지에게 굴복한 그는 눈물과 함께 자기 비밀을 흘린다. 마르틴의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된다. 마르틴은 그날 밤 하얀 리본이 손목에 묶인 채 잠이 든다.
마을 아이들은 비밀이 없다. 그만큼 진솔하다는 뜻이 아니라 홀로 간직할 법한 사생활조차 어른들의 감시 안에 있다는 것이다. 비밀을 가질 자격은 그것이 어른들과 긴밀하게 엮여있을 때다. 앞서 말한 의사와 에바, 마르틴과 목사처럼 그들의 고압적인 개입이 있어야 한다. 그건 더 이상 홀로 안고 있어서 즐거운 은밀한 비밀이 아니다. 아이들은 안전망이라 불리는 감옥 안에서 외관만큼은 순수함을 유지하며 억척같이 자란다. 비록 그 과정이 순탄치는 못하지만.
*다음 회에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