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평언저리 Aug 31. 2022

윗물을 모르는데 아랫물은 어찌 알까(2)

<하얀 리본>.2009 (2)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하얀 리본>은 사건의 현재진행 보다는 결과와 그 이후를 보여준다. 범인이 누구냐보단 범인이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에 초점을 둔다. 그렇지만 지금은 영화가 아닌 영화에 대한 글을 적고 있으니 한 번은 물어봄직하다. 범인은 누굴까.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필사적으로 범인의 신상을 숨긴 이유는 뭘까. 이유는 그대로다. 범인의 정체를 미공개하면서 점점 영화는 그 정체와 가까워진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순수함을 교육받는 아이들이 사는 마을에 그들이 저지른 범죄란 있을 수 없다. 어른들의 머릿속엔 그런 인식이 뿌리깊게 자리잡았다. 이때 관객은 마을 어른들괴 비슷한 생각을 한다. 혹시나 해서 아이들을 의심해봐도 하얀 리본의 수혜(?)를 받은 그들의 손이 누구를 해하는 상상은 그닥 선명하게 떠올려지지 않는다. <하얀 리본>은 관객의 시야가 마을 어른들의 시야와 같도록 편집해놨다. 시야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아이들의 행동과 심리를 세세하 볼 기회가 거의 없어 특정한 어떤 '시선'을 가지기가 불가능했다. 이건 마을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아이들이 탑재해야 할 순수함에 집착하지만 그 배후, 배후는커녕 아이들이 뭐하고 노는지도 안중에 없다. 영화 역시 떼지어 다니는 아이들과 거리를 두며 악(惡)으로부터 아이들을 서서히 떼어내기 시작한다. 어른들이 아이와 악의 거리를 멀리 털어뜨려 놓을수록, 철저히 멀어지는 양자(兩子)의 대상은 아이들과 악이 아닌 영화를 보는 우리와 영화 속 아이들이다.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루돌프


아이들이 순수함에서 한 발짝 멀어지는 순간은 영화 초반부터 나온다. 낙마를 한 의사의 막내아들 루돌프가 에바와 밥을 먹는다. 아빠가 다쳐서 이전 씬부터 울고 있었던 그는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그게 뭐야?...죽은 거" 누나는 동생의 걱정을 덜어주려 하지만 그럴수록 그와 그녀는 원하지 않은 곳으로 끌려간다. 멀리 여행 간 줄 알았던 엄마가 죽었다는 것을 알아챈 그는 홧김에 접시를 깨트린다.

  어떤 아이는 한밤중 산파가 자는 방에 몰래 들어가 그녀의 얼굴에 덮인 손수건을 들추려 한다. 이때 카메라는 아이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금칙을 어기는 데서 오는 은밀한 기쁨으로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향한 클로즈 업은 나오지 않는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분노이든 (마을 어른과) 관객은 <하얀 리본>의 카메라와 편집 방식을 통해 철저히 아이들과 거리를 둔다.    



아이들은 선인도 악인도 아닌 목격자 혹은 제삼자로 나온다. 그들을 면밀히 관찰하지 않은 우리의 시선으론 그렇다. 아이들을 향한 시야가 좁아지도록 편집된 영화를 끝까지 볼수록 그들을 향한 시선은 편협해진다. 아이들이 자기 손에 피묻힐 짓은 안 하리라고 단정한다. 

  이 단정을 잠시 깨놓은 인물은 나레이션으로도 등장하는 마을의 학교 교사다. 그는 아무리 봐도 장애아인 지기(Ziggy)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이해할 수 없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그를 외면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가 다치는 일이 벌어지자 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창문으로 지기를 엿본다. 아이들이 창문으로 무엇을 보는 장면은 영화에서 세 번 나온다. 낙마한 의사의 건강을 확인하려 그의 집 창문에 돌멩이를 던지는 아이. 한 소작농을 자살로 이르게 한 영지에서 일어난 화재와 창문을 통해 그것을 구경하는 아이들. 그리고 지기의 건강을 살피겠다며 창문을 통해 그의 방을 엿보는 아이들. 창문을 통해 사건 자체를 구경하거나 추후 당사자를 찾아가지만 그와의 직접적인 대면은 피한다. 아무튼 걱정이 돼 찾아왔다니 마을 사람들은 문제 삼지 않는다. 그들을 의심하기 어려운 건 관객도 마찬가지다. 교사의 추궁에도 꿋꿋이 부정하는 클라라와 마르틴의 얼굴은 무구하기까지 하다. 


<하얀 리본>의 편집 방식은 이러한 곤란함을 효과적으로 끌어낸다. 아이들은 감히 이런 범죄에 가담할 수 없다는 순간적인 편견이 영화가 지나가는 동안 깊게 뿌리내린다. 순수함을 교육받는 장면의 있음과 폭력에 동조하는 장면의 없음. 이것은 마을 어른들의 시선(혹은 관심의 대상)과도 같다. 카프카의 말을 살짝 바꿔 '선은 아나 악은 모르는' 그들의 시선. 다시 바꿔서 '만들어진 선은 아나 존재하는 악은 모르는'그들의 시선이 관객한테도 투영된다. 

  한나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1913년 독일. 선을 교육하고 교육시킬 수 있다고 자부한 마을에서 어린 아이들은 과연, 하얀 리본의 은혜 속에 좋은 사람으로 성장할까.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 아이들이 부르는 교회 찬송가는 이후에도 아름답게 들릴 수 있을까. 



<플러스>

학교 교사와 유모 에바


학교 교사와 에바의 사랑. 두 인물의 사랑 이야기는 <하얀 리본>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나. 범죄와 서스펜스가 혼합된 숨 막히는 흑백 영화에서 로맨스가 차지할 부분은 많지 않아 보인다(영화를 처음 본 날에도 이 부분은 감독이 주는 일종의 쉬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보는 이의 목을 서서히 죄는 영화가 잠시나마 숨 돌릴 틈을 주는 시간. 영화를 다시 보면서는 그들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얀 리본>에선 그들처럼 청년층 인물의 수가 매우 적다. 부모로 대표되는 중년과 자식으로 대표되는 어린아이가 주요 사건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감독은 아예 그들만을 위한 씬(Scene)까지 몇 개 찍어 이들 역시도 중요한 인물임을 밝힌다.

  이들이 사랑을 나누는 동안 마을 곳곳에선 참혹한 사건이 잇달아 터진다. 피해 대상은 어린이처럼 쉽게 해를 가할 수 있는 물리적인 약자다. 교사와 에바가 만나는 여러 씬은 그들의 분노가 배설된 곳, 혹은 분노가 자기도 모르게 축적된 씬 사이에 있다. 자신의 엄마를 죽게 만든 남작에 분노해 양배추밭을 테러한 아들, 멀리 여행간 줄 알았던 엄마가 죽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막내, 갓 태어난 남동생을 열병에 걸리게 한 친형, 자위를 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혼나는 아이. 두 남녀의 사랑은 이들 가운데서 싹을 틔우고 있다.  

  앞서 말한 필자의 걱정은 이거다. 두 남녀가 틔운 사랑은 그들의 자식에게 어떤 식으로 전달될까. 결말을 보면 교사와 에바는 결혼을 허락받는다. 영화의 첫 장면은 누군가 줄을 매달아 말을 타던 의사를 떨어트린다. <하얀 리본>의 마지막은 (주로 영화 바깥에서) 의심을 받는 아이들이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씬이다. 교사와 에바는 그들의 찬송가를 듣는다. 이유 모를 낙마로 시작해 아이들의 찬송가로 끝나는 영화. 그들 세대에선 이 비극적인 영화가 끝날까. 애석하지만, <하얀 리본>의 배경은 1913년이다. 그로부터 1년 후 역사에 남을 전쟁이 시작된다. 


이전 02화 윗물을 모르는데 아랫물은 어찌 알까(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