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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언저리 Jul 18. 2022

갖지 못하면 부숴버리겠다는 그 의지

<의식>.1995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 돼 있습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저마다 감추고 있는 비밀은 꼭 한 명씩 알게 되거나 이미 알고 있다. 소피의 과거를 알고 있는 잔느, 멜린다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소피, 소피가 문맹이었음을 알게 된 멜린다, 조르주의 가정사를 알고 있는 잔느 등 <의식>에서는 비밀의 당사자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 간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자기 비밀도 없고 남의 비밀도 모르는 조르주의 아들 질의 비중이 적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 관계들에서는 저마다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는데 한 곳에선 냉전(잔느 – 조르주)이거나, 연민(멜린다 – 소피), 겁박(소피 – 멜린다), 혹은 하층계급 간의 연대(잔느, 소피)로 이어진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카트린이 소피를 가정부로 고용한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의 비밀을 몰랐기 때문이다. 가정집 방화 사건의 용의자였던 그녀의 과거를 그녀의 총에 맞아 죽을 때까지도 몰랐다. 비단 카트린 뿐 아니라 그녀와 함께 사는 가족 전체가 몰랐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이 가족은 고전음악을 즐겨들으며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기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고, 매일 텔레비전을 보지만 최근에 벌어진 사회문제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소피가 용의자였다는 사실을 알던 잔느는 그녀를 보며 실실 웃는다. 그 모습을 본 소피는 잔느가 누워있던 침대에 같이 누워 박장대소한다. 이 웃음은 부르주아의 무지에 대한 조소이자, 이를 통한 하층계급 간의 연대로 이어진다. 이 장면 이후 소피는 한층 뻔뻔한 태도로 집주인(조르주로 대표되는)을 능욕한다.


  영화 <의식>의 전 · 중반부가 전개될 수 있는 힘은 비밀(진실)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다. 잔느는 소피가 방화 용의자임을 알지만 카트린은 이를 모른다. 다른 예로 조르주는 잔느가 자기 가정사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지만 아들 질은 모른다(우체국에서 나온 조르주가 차에 탔을 때, 영화는 처음으로 자동차 뒷좌석에 카메라를 놓는다. 이는 누군가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조르주의 불안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소피는 멜린다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이 일을 잔느에게 말하려 했으나 상황은 급변한다. 자신이 문맹임을 멜린다에게 들킨 것이다. 한 사람의 비밀을 두 사람이 알고 있는 이전과 달리 이번엔 서로의 비밀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다. 샤브롤 감독은 여기서 파국의 불씨를 지핀다.

주인공 소피. 출처 네이버


  소피의 예상대로면 멜린다의 비밀은 원래 잔느와 함께 씹어댈 안줏거리였다. 하지만 상황이 역전될 위기에 놓인 소피는 그녀의 비밀을 인질삼아 협박한다. 사회적 위치를 생각해보면 그녀는 어떻게든 멜린다에게 빌어야 한다. 소피는 왜 협박을 했을까. 소피는 잔느와 함께 집주인의 물건을 만지고 그들의 무지를 비웃으며 쾌감을 느꼈다. 이후 조르주에게 두 번씩이나 하극상을 일으키며 릴리에브 가(家)에 우월감을 가진다. 그런데 멜린다가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소피 마음속의 위계는 다시 뒤바뀐다. 치부를 들킨 굴욕감보다도 그녀는 자신이 돌아가야 할 현실을 잠시 더 미루고 싶었던 건 아닐까. 협박을 통해 멜린다가 자신을 두려워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멜린다는 소피와 있었던 일을 부모님께 말하고 소피는 그날 해고된다.


  그렇다면 소피가 총을 쏜 이유는 부르주아에 대한 열등감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이유라면 먼저 총을 쐈을 인물은 잔느다. 조르주를 쏜 이후 그들이 차를 마시는 장면은 디졸브로 편집되어 의미심장하다. 분명 조르주를 쏜 이는 소피 한 명이지만 그녀와 함께 잔느 또한 결의에 찬 눈빛이다. 한 명은 부르주아를 향한 열등감을 해소하려 하고, 한 명은 자신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을 절멸시키려 한다. 같은 목표를 향한 두 가지 욕망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총기난사 후 잔느는 경찰에 신고한 뒤 허위 진술을 하라 부탁한다. 그녀는 전리품처럼 멜린다의 라디오를 챙기고 떠난다. 잔느는 전투에서 이긴 갑처럼 행동한다. 총기 난사가 끝난 후 창문을 통한 둘의 어긋난 인사가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한바탕 총질이 목표의 전부였던 잔느가 작별인사를 하지만, 거기에 어떤 반응도 하지 않는 소피의 뒷모습은 어쩐지 쓸쓸하기만 하다. 소피는 신고하지 않고 간단히 집을 청소한 뒤 겉옷만 입고 집을 나선다.


  영화 <의식>의 전 · 중반부가 무지를 향한 조소라면 후반부는 지(知)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녀는 집주인들의 영원한 무지를 바라며 총을 쐈다. 가족뿐만 아니라 그들이 소장한 책에도 총질을 했다. 소피에겐 부르주아보다도 앎에 대한 전적인 열등감이 있었다. 만약 문맹을 (안 좋은 방식으로) 알게 된 사람이 멜린다가 아닌 잔느였어도 그녀는 똑같이 보복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상대의 지(知)를 절멸시켰지만 거기서 평생 짊어져야 할 비밀을 만든다. <의식>은 소피의 방식을 지지하지 않으며 그녀를 대놓고 비난하지도 않는다. 단지 홀로 안고 가야 할 짐을 떠안은 소피의 걷는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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