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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un Leymet Mar 13. 2021

너희들의 여행가방

몇 살에 처음으로 여행가방을싸 봤나요?(Photo by M. L.)

    나는 마흔이 되어서도 친정에 가면 엄마가 여행 가방을 싸주신다. 프랑스로 돌아와서야 내가 무엇을 들고 왔는지 알게 된다. 김칫국물 흐를까 봐 위생봉지로 꽁꽁 싸맨 비닐 포장들 사이에서 정전기가 나서 붙어있는 엄마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발견하면 이상하게도 눈물이 핑 돈다. 나는 지금도 여행 가방을 싸려면 가방과 몇 시간 동안 씨름을 한다. 엄마가 싸주신 가방은 언제나 완벽했다.






    시어머니께서 아이들에게 여행가방을 하나씩 선물해 주셨다. 만으로 아직 세돌, 다섯 돌이 되지 않은 때였다. 아이들은 온갖 잡동사니를 넣었다 뺐다, 제 몸도 넣었다 뺐다 하면서 평소에 즐겨하는 상황 놀이에 빠져 한참을 재미있어했다. 다른 놀이로 옮겨간 틈에, 팽게 쳐져 있는 가방을 열어보았다. 가위로 오려 만든 종이가루와 돌멩이가 반이었다.


    아이들을 불러다 셋이 모여 앉았다.


    "여행 가방은 무엇하는 물건일까?"

    "여행 갈 때 들고 가는 가방이야."라고 제법 일리 있는 대답이 왔다.


아이들은 들고 갈 것들을 하나씩 종알대기 시작했다. 아직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챙길 물건들을 그림으로 그려보자고 했다. 아이들이 '양말'이라고 외치면 나는 '양말은 어떻게 그리면 좋을까?'하고 되물었다. 그러면 아이들이 허공에 대고 짧은 손가락으로 열심히 그려준다. 내가 자전거나 칫솔 같은걸 그리면 눈과 입이 휘둥그레져서 엄마는 어떻게 이렇게 잘 그리냐며 환호성을 친다. 장난감부터 주르륵 나열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이들은 필요할만한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고, 생각보다 금방 무얼 가져가야 할지 몰랐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잠이 들 때까지 무엇을 하고 그때마다 무엇이 필요한지 한번 상상해 보자."라고 내가 제안을 했다.


아침, 점심, 저녁 개념도 아직 확실치 않은 둘째를 위해서,

    "밥을 먹으면 이가 깨끗해지도록 무얼 해야 하지?"라는 식의 답이 뻔한 질문들을 나는 던졌고, 아이들은 신이 나서 퀴즈를 풀어나갔다.



아이들과 함께 작성한 여행가방 준비물 목록 그림 리스트. (Photo by Misun Leymet)



    완성된 그림 리스트를 복사해서 한 장씩 나눠 갖었다. 그림을 보면서 아이들은 각자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그 할머니에 그 손녀 아니랄까 봐 다섯 돌인 두가 싸놓은 가방은 야무지기 그지없었다. 세 돌짜리 덩이는 자기 옷장에서 양말과 팬티를 기똥차게 갖다 놓고는 누나를 한참 졸졸 따라다니다가 결국 수많은 인형 중에 두두 세 개를 고르는 데서 진전을 못하더니, 흥미를 잃어버린다. 숫자는 간신히 3까지 셀 줄 알고, 오늘 무슨 티셔츠를 입을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일주일치 티셔츠를 골라오라는 건 사실 너무나 큰 숙제였다. 덩이의 첫 경험이 버거웠던 기억으로 남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나는 덩이에게 연신 채찍 없는 당근을 주어가며 도와주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싸놓은 여행 가방. (Photo by Misun Leymet)


    

    종이 리스트에 그려진 텅 빈 그림에 아이들은 알록달록 색칠을 했다. 아이들은 가방을 다 싸고도 그림 종이를 들고 다녔다. 다음날 아침 짐가방을 차에 실으면서도 가방에 넣지 못한 자전거와 킥보드 같이 커다란 물건들을 종이를 보며 챙겼다. 종이는 항상 아이들을 따라다녔고, 휴게소에서도 두는 종이를 들고 내리고 싶어 했다. 할머니 댁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한 일도 리스트를 할머니께 보여주는 것이었다. 종이 리스트가 아이들이게 이렇게까지 의미 있는 물건이 될지 나는 예상치 못했었다.



여행 준비 완료. (Photo by Misun Leymet)



    여행 계획이 세워지면, 두는 항상 덩이를 데리고 가장 먼저 여행 가방 리스트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두가 그림이 아닌 글씨로 쓴 리스트를 만들어 왔다. 학교에 들어가 글씨를 배워서 읽고 쓰기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쓴 리스트에는 맞춤법에 맞지 않는 글씨들이 재미있게 적혀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두의 반은 스키장으로 1주일간 단체 여행을 떠났다*. 만으로 6살 때였다. 난생처음으로 아이와 떨어져 보는 것이었기에 신경 쓰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리 엄마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나도 아이에게 완벽한 가방을 싸주고 싶었다. 아이가 여행지에서 찾을 모든 물건이 가방 안에 모조리 들어있길 바라는 마음이 올라왔다. 이런 마음을 누르고 아이에게 가방을 싸 보라고는 했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나는 아이의 가방을 많이도 만지작거렸다. 스키장에서 볼이 트지 않도록 꼭 바르라고 넣어준 썬크림을 아이가 한 번도 바르지 않고 그대로 들고 왔을 때, 나는 기뻤다. 1주일 만에 만난 아이의 볼이 발갛게 터 있었는데, 내 말을 듣지 않은 그 모습이 너무나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두는 여행을 떠날 때 들고 갔던 여행 리스트를 보고 가방을 다시 쌌다고 했고, 마지막 날 눈밭에서 고글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다행히 인솔 선생님들이 주어 모아 온 잃어버린 물건 함에 아이의 고글이 들어 있었다.






    세상에는 '아이를 잘 키우는 방법'이 아주 많이 있다. 요즘처럼 정보가 홍수를 이루는 시대에서는 몰라서 잘 못 키웠다고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부모들은 정보에 노출되어 있다. 수많은 육아 방법 중에 나에게 가장 의미 있고 맥을 치듯 강렬하게 들렸던 말은 법륜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가장 좋은 교육은,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독립할 수 있는 인격체로 키우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동안 수없이 읽었던 모든 교육 서적을 총망라해서 요약한 듯한 한마디라고 여겨졌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두와 덩이가 아직은 앳된 얼굴을 하고 자신들이 이제 성인임을 말할 때, 나는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아이들이 내 집을 나가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후련하게 미련 없이 그들을 보내 줄 수 있을까? 아이들의 결심과 결정을 의심하지 않고 항상 응원해 줄 수 있을까? 눈 앞에 당장 보이지 않는 나의 아이들의 안부를 기다리며 노심초사하지 않고, 두 다리 뻗고 잠을 청할 수 있을까? 항상 의심스럽지만 매일마다 다짐한다. 우리 아이들은 잘할 수 있을 거야. 이런 이유로 나는 아직 어린 내 아이들이 여행 가방을 스스로 쌀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









* 프랑스의 학급 여행은 학년별로 움직이기보다, 반별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담임 선생님이 결정해서 여행 프로젝트를 짜고 허가가 나면 인솔 교사들을 직접 섭외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움직인다. 따라서 마음 맞는 선생님들끼리 같이 여행을 짜기도 하고, 일 년 동안 특별한 여행 계획을 세우지 않는 선생님도 있다. 따라서 두의 반이 스키장으로 떠나 것은 매우 규모가 큰 프로젝트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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