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매너 02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sun Leymet Apr 24. 2021

세련된 사람 I

줄 서기

티켓을 끊으려고 줄을 섰다. 앞사람과 1미터쯤 간격을 두었다. 1미터 간격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내 뒤엔 아무도 없었다. 줄에 끼어든 사람에게, 나도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줄을 섰으면 앞사람에 붙어있어야지 내가 너무 멀리 있었단다. 내 탓이란다. 내가 줄을 제대로 서지 않은 탓이란다. 그 사람은 줄에서 나갈 마음이 전혀 없다. 내 앞에 뒤통수를 정면으로 보이며 팔짱을 끼고 서있다. 나는 한발 물러난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줄을 섰다. 내 앞에도 사람이 많고, 내 뒤에도 사람이 많다. 앞사람에게 붙어서 서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남들처럼 붙어 섰다. 불편했다. 다리 하나를 앞으로 내민 덕에 한 50 센티미터의 간격이 마련되었다. 다른 이들의 간격에 비해 조금 먼 것 같다. 내가 줄을 잘못 섰다며 누군가가 또 내 앞에 서면 안 될 것 같다. 새치기 한 사람보다, 내 자리를 지키지 못한 나의 탓이 더 클 것 같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를 열심히 지키고 있다. 나만 내 자리를 지키지 못한 꼴이 될 것 같다.


타인과의 좁은 간격, 앞사람의 뒷덜미에 난 머리털이 보이는 은밀한 씬이 불편하고, 그런 씬을 감당해야 할 뒷사람의 시선이 살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다. 가방이 등 뒤로 가도록 고쳐 맸다. 나와 뒷사람 사이에 가방이 간격을 만들어주고 있다. 뒷사람이 움직일 때 그의 몸이 가방에 가끔씩 닿는다. 너무 가깝다. 옴짝달싹 할 수가 없다. 차렷 자세로 바로 섰다. 버스가 다가온다. 사람들이 자석처럼 서로 붙는다.


줄을 선다. 줄을 서면서도 상대의 사적인 공간을 침범하지 않을 수는 없는 걸까? 점선을 찍어놓은 것처럼, 도미노를 세워놓은 것처럼 서있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가 제각각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줄에 집착하지 않아도 네가 나보다 먼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사람이 사는 영화 티켓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다. 내가 무슨 영화를 골랐는지 뒷사람이 뻔히 알고 있다는 것이 불쾌하다. 나의 사적인 공간에 침범한 채로 서서, 나의 뒤에 서있는 타인은, 나의 목덜미로 그의 콧바람을 불어넣는다. 콧바람이 지나치게 프라이빗하다. 내가 그의 사적 공간을 침범한 것인지, 그가 나의 것에 무례하게 들어와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줄에 우리의 몸이 끼워 맞춰져 있다. 그의 콧바람을 느껴서 미안하다. 그의 사적인 바람을 내가 느낄 수밖에 없어서 미안하다. 마치 나의 침대로 그를 이끌어 들인 것 같아서, 그의 프라이빗을 지켜주지 못해서 I'am sorry 하다.


우체국에 소포를 붙이러 갔다. 이미 세명쯤 와 있다. 줄이라고 할 게 없다. 서로 소리 없는 눈인사를 한다. 눈인사를 하며 내 앞에 있던 세명쯤 되는 사람들의 얼굴이 눈 안에 잠시 들어왔다 나간다. 내 차례가 왔다. 여전히 줄이라고 할 게 없다. 그러나 모두가 내 차례라는 것을 안다. 아무도 나의 사적인 공간에 침범하지 않는다. 나도 그들의 프라이빗한 공간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내 뒤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눈인사로 서로의 순서를 알기에는 조금 벅찬 숫자다. 이쯤이면 줄을 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줄이 필요해졌다. 조용히 줄을 선다. 거리를 유지한다.

이전 01화 여유로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