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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매너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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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un Leymet Apr 26. 2021

세련된 사람 II

일요일에 하는 생일파티의 옷차림.

일요일 오후 네시. 집에 늘어져라 있는 시간. 일주일 중 하루 종일 잠옷을 입고 뒹구는 것이 허용되는 시간.


A: 뭘 입고 가지? 티 입을까?

나: 평소대로 셔츠 입어. 썩 친한 사이도 아니고 처음인데 그래도 좀 갖추고 가야 하지 않겠어?

A: 일요일이라..


A는 평소 출근할 때 입는 그대로 입었다. 캐주얼한 무늬가 있는 반팔 셔츠에 캐주얼한 푸른 세미 정장 바지, 그리고 새것도 낡은 것도 아닌 하얀 운동화를 신었다. 나는 평소보다는 조금 차려입었다. 친하건 친하지 않건, 초대를 받아 다른 이의 집에 갈 때는 되도록 차려입고 간다. 오늘은 아이들이 주인공인 생일 파티를 위해 모이는 날이라서 덜 차려입었다. 그렇다고 평소처럼 레깅스와 운동화 차림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안나네 집으로 갔다. 안나네 집은 처음 가본다. 안나는 두의 친구이다. 안나와 두, 그리고 마리아는 같은 반 친한 친구이고 생일이 비슷해서 올해는 생일을 함께 치르기로 했다.


안나의 엄마 로라는 엔지니어이다. 마르고 키가 크다. 맨얼굴에 항상 청바지를 입고, 때가 묻은 하얀 빈티지 스니커즈 운동화를 신는다. 머리는 검은색이고 짧은 커트이다. 오른쪽을 거의 스포츠에 가깝게 치고 왼쪽 푸석한 머리칼은 턱까지 길고 곱슬거린다. 분명 꾸민 머리인데 꾸미지 않은 것처럼 부스스하다. 안나의 아빠 케빈도 로라와 옷차림이 비슷하다. 검은 턱수염이 구레나룻부터 가득하다. 항상 비니를 쓰고, 두 손을 양쪽 청바지 주머니에 찌르고 있길 좋아한다. 눈빛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동네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케빈은 교수이다. 이들은 평소랑 똑같은 캐주얼한 빈티지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마리아네 가족이 케이크 세 개를 들고 들어온다. 평소에는 얇은 푸른 패딩에 청바지, 운동화, 질끈 묶은 머리가 교복인 앙카가 꽃무늬가 가득한 오래된 보랏빛 원피스를 입었다. 금발 머리를 풀어헤치고 왔다. 앙카는 꽃을 보면 예쁘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꽃을 따다가 차와 시럽을 만들어 마시며 감탄하는 사람이다. 대학에서 비서일을 하지만, 꿈은 돈 걱정 없는 가정주부가 되어서 집안과 아이들을 예쁘게 가꾸는 것이다. 콘스탄틴은 건축 현장에서 일한다. 학교에 마리아를 데리러 올 때마다 페인트 자국이 묻은 작업복 바지를 입고 있다. 티셔츠는 늘 하얀색으로 갈아입고 온다. 오늘은 콘스탄틴이 장 깊숙한 곳에서 오랜만에 꺼냈을 것 같이 구식이 되어버린 하늘색 체크 와이셔츠의 깃을 반듯하게 다려 입었다. 그 위에는 낡았지만 깨끗한 니트를 입고 왔다. 베이지색 면바지가 반듯하다. 구레나룻부터 턱까지 덥수룩한 금발의 수염이 빗질을 해 놓은 것처럼 말끔하다.


아이들이 노는 동안 세 부부는 주방 바 근처에 제각각 기대 서거나 앉아서 얘기를 나눈다. 딱히 할 말이 많을 사이가 아니지만 끊임없이 뭐든 말한다. 대화 중에 공백을 만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예의를 갖춰 서로의 호감을 산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앙카가 있어서 다행이다.


아이들이 신이 나서 놀고 있다. 콘스탄틴이 거실에 있던 책을 한 권 고르더니 멀찌감치 떨어져서 안락의자에 앉는다. 책을 읽는다. 오래도록 읽는다. 이 소란과 어색함 속에서 과연 그는 책의 내용이 눈에 들어올까 싶다. 그는 우아하게 앉아서 낡은 양장본 책 보다 더 품격 있는 온화한 표정으로 글을 읽고 있다.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 읽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원래 저런 사람일까? 어색한 대화에서 탈출구를 찾고 있던 걸까? 아니면 체면을 차리고 싶었던 걸까?


우리가 사는 곳 근처에는 프랑스의 일류대학이 여럿 모여있다. 자칭 프랑스의 실리콘벨리라고 하는 단지가 근처에 있다. 그래서 연구원이나 학자, 교수들이 많이 모여서 산다. 아직 친해지기 전 앙카가 물었었다. A는 출근길이라서 회사 명찰을 차고 있었다.


앙카: 당신은 어느 연구소에 다니나요?

A: 연구소요? 난 엔지니어인데요.

앙카: 아, 여기 학부모들이 죄다 교수며 학자들이길래, 명찰을 보고 당신도 연구소에 다니는 줄 알았어요.


루마니아에서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앙카는 비록 자신 부부들은 그렇지 못하지만, 아이 친구의 부모들의 직업이 '사'자 들어간 사람이 많은 것을 매우 뿌듯하게 생각한다. 오늘도 앙카는 안나의 집에서 생일파티를 하면서 그 뿌듯함에 취해 있다. 취한 앙카 때문일까? 콘스탄틴은 고상하게 앉아서 창가의 빛을 맞으며 우아하게 오래도록 책을 읽는다. 평소에 입던 작업복 바지의 페인트 자국을 지우고 있는 듯하다.




며칠 전, 앙카가 생일상을 좀 더 식사답게 차려보자고 했었다. 언제나 당당하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기주장을 펴는 앙카다. 루마니아에서는 프랑스처럼 생일상에 다과류만 놓지 않는다고 했다. 앙카는 케이크 세 개를 종류별로 직접 만들어서 구워왔다. 안나네는 이탈리아인답게 피자를 굽기로 했다. 나는 상차림이 조금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먹거리에 매우 신경을 쓰는 나인데, 친분이 쌓이지 않은 타인과 모이는 자리에선 얼만큼이 적정선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은 유난해야 할 것 같았다. 프레스기로 사과와 오렌지를 각각 내려서 생과일주스를 두병을 만들었다. 딸기와 청포도, 블루베리를 닦아서 예쁜 그릇에 각각 담아갔다. 너무 과하지 않지만 약간은 과해진 느낌이 들어서 오늘로서는 적당하게 느껴졌다. 앙카가 주문을 한 것도 아닌데, 앙카의 주문 내역서를 따져가며 만든 차림이다.


나: 케이크를 세 개나 구워왔어? 근사한데!

앙카: 응, 생일인 아이들이 세명이니까. 아침부터 마리아랑 같이 만들었어.

나: 응 나도 과일주스를 사 온 게 아니고 프레스기에 직접 내려온 거야. 과일은 친환경 마트에서 산거고.....

케빈: 음, 좋아. 과일을 준비할 생각을 한 것도 참 좋은 것 같아.

(생과일주스라는 말에 케빈이 향을 음미하며 주스를 한잔 따라 마신다.)

로라: 피자는, 케빈이 직접 효모를 넣고 반죽을 해서 만든 거야.


앙카의 취함 때문이었을까? 콘스탄틴은 느닷없이 책을 읽고, 우리는 평소와 같지 않게 우리가 차려온 음식의 가치를 올리고 있었다. 나는 친환경 마트에서 과일을 샀다고 말하면서, 이 값싼 설명에 볼이 화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말꼬리를 흐렸다. 피자 반죽을 직접 했다고 말하는 로라가 어울리지 않게 질세라 말을 서두르는 것을 보니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에, 앙카는 완벽하게 젖어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러 한 둘씩 초대받은 아이들의 부모들이 초인종을 누르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을 데려간다. 앙카가 한 명씩 떠나가려는 사람들을 집안으로 들였다. 먹다 남은 케이크가 많았다. 그들에게 한 접시씩 권한다. 앙카의 제스처가 다정하고 우아하다. 앙카는 분명 지금 이 상황의 여주인공이 되어 있다. 정원이 잘 가꿔진 이 멋진 이층 집은 앙카가 가꾼 집이고, 앙카의 남편은 대학교수이다. 부러워할만한 직업을 가진 아이의 친구 부모들이 내 아이의 생일 파티를 위해 오고 간다. 보라색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금발의 앙카가 황홀해 보인다.


앙카네보다 먼저 이 집을 떠나야겠다. 앙카가 더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서 파티를 열기 전에. 청바지를 입고 싱크대에 걸터앉아 있는 캐주얼한 로라와 케빈의 집에서 나가줘야 할 것 같다. 콘스탄틴이 책을 덮는다. 취해있는 앙카에게 마리아를 챙기라고 흔들어 깨운다.




페이스북 창시자 마크 주커버그는 항상 똑같은 스타일의 옷을 입는다. 정장이라면 똑같은 스타일이라도 그럴 수 있겠지만 주커버그는 회색 티셔츠를 고집한다. 세상 제일 평범해 보이는 스타일이다. 그의 모습이 촌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옷으로 대변되는 그의 태도가 세련되어 보인다.


고급 레스토랑에 70대 노인이 앉아있다. 정장에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하다. 하얀 머리칼이 정갈하다. 하얀 노인의 5센티 높이의 구두 굽, 진한 듯한 립스틱 색, 손가락에서 번쩍대는 다이아몬드. 모든 것이 과하지만, 세련미가 넘친다. 목소리가 낮다. 눈빛이 부드럽고 사려 깊다. 손짓이 절제되어 있고, 겹쳐놓은 다리가 우아하다. 미소를 머금은 입술로 다정하게 주문을 한다. 과한 치장이 촌스럽게 삐져나올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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