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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매너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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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un Leymet Jun 24. 2021

지질함[찌질함]

나는 대학생이었다. 반팔을 입었지만 덥지 않고, 날이 화창하게 기분 좋은 날이었다. 느지막한 오전, 마을 버스정류장에는 나밖에 없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늘 지루하기 짝이 없다. 파랗고 높은 하늘과 선선한 바람에 기분이 좋아서 웬일로 지루함이 떨쳐졌다. 멀리서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다가온다. 나와 조금 멀찌감치 떨어져 서서 그들도 버스를 기다린다. 한 남자는 별로 말이 없고, 비교적 단정해 보였다. 다른 한 남자는 키가 조금 작았고, 야구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질 못하고 우왕좌왕 거리며 끊임없이 건들거렸다. 쓸데없이 겁이 많은 나는 그 건들거림이 무서웠다. 나는 최소치를 가지고 최대치로 무서워하는 겁쟁이이다.


버스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건들거리던 남자가 친구에게 버스 카드를 잠깐만 줘보라면서 받더니 삐딱하게 카드를 쳐다보는 척을 한다. 그 순간 버스가 그들 코앞에 멈췄다. 건들거리던 남자는 친구에게 '에이 쪽팔려서...'라는 말의 말꼬리를 흐리면서 순식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동전을 친구의 손에 아무렇게나 쥐어주었다. 그리곤 바로 버스에 올라타버렸다. 친구는 잔말 없이 동전을 들고 뒤따라 버스에 올라탔고, 삐딱한 학생은 친구의 카드로 자신의 승차비를 냈다. 건들거리던 학생은 멀리서 버스가 다가올 때 이미 시간 계산을 했던 것 같다. 짜여진 각본처럼 매우 자연스럽게 친구와 자신의 버스 요금 모드를 바꿔치기했다. 무덤덤해 보이던 친구가 아무 말이 없이 담담해 보였던 것은, 항상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일까? 그들이 갑과 을의 관계였기 때문일까?


정류장에서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속으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치사하게 그들을 양아치로 단정 지어놓고 비밀스럽게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건들거리기만 하던 남자가 갑자기,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하잘것 것 없는 그깟 자존심으로 간신히 부여잡고 있는 어린 학생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다리를 건들거리면서 그는 자신의 자존심을 끊임없이 치켜세우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정류장에 서 있었고, 학생은 버스에 올라타서 친구보다 앞서 걸으며 남의 카드를 쥔 양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움직이기 시작한 버스의 뒷좌석 쪽으로 건들건들 걸어 들어가는 그와 아무 표정 없이 바르게 서서 뒤따라가는 친구를 나는 여전히 주시했다. 그는 친구의 카드를 어떤 식으로 다시 돌려줄까?


버스 카드가 막 통용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여전히 동전으로 지불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충전식 교통카드로 버스비를 내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던 시절이었다. 요금통에 채 닫기도 전부터 사방에 부딪히며 와장창 떨어져 내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는 자신의 동전과, 세상 요조숙녀처럼 얌전하고 세련된 소리를 내는 친구의 교통카드를 맞바꾼 그였다. 그 학생에게서 연민이 느껴졌다. 그는 그럴싸하게 각본을 짜고 연기를 해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친구의 카드를 손에 쥐었고, 순식간에 버스에 올라탔다. 교통카드가 없는 것이 말 그대로 쪽팔렸던 것일까? 교통카드를 찍는 모습을 그는 왜 타인에게 보여주어야 했을까? 그 카드가 뭐라고 그는 그렇게 자신의 바닥을 친구에게 보여줘야만 했을까? 무엇이 그를 그렇게 초라하게 만든 걸까? 건들거리는 자세는 자신의 초라함을 덮는 무기였던 것일까? 


작고 마른 몸에, 구부정한 어깨, 짙은색 운동복, 눌러쓴 모자 양쪽으로 삐져나온 덥수룩한 반곱슬 머리. 앳된 얼굴, 양 주머니에 꽂은 두 손, 건들거리는 다리. 한 곳에 가만 서있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그와 웃으며 얘기를 나누던, 자세에도 시선에도 흔들림이 없던 그의 친구. 순식간에 친구의 손에 카드를 넘기고 동전 깨지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면서 아무렇지 않게 올라탄 그 친구.






남편과 약속 장소를 향해 바쁘게 걷고 있었다. 비가 온 뒤 맑은 오전이었다. 햇살이 좋았다. 우리의 발걸음이 가볍다. 우리 앞으로 마르고 키가 큰 남자가 마주 걸어오고 있다. 청바지에 청자켓을 후줄근하게 입은 젊은 백인 노숙자이다. 오전부터 큰 사이즈 캔맥주를 손에 들고는, 간밤에 몸싸움이 있었던 건지 눈썹 쪽이 찢어져 피가 한 줄로 맺혀 굳어 있었고 눈과 미간 쪽 코 부분에 멍이 들어있다. 입술도 살짝 부어있다. 웨스턴 부츠 같은걸 신었던 것 같은데, 호리호리한 몸매에, 조금만 말끔했다면 차림새가 멋쟁이가 될 수 있었던 남자였다. 남자는 우리를 바라보며 걸어왔다. 나는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고 무서웠다. 남편에게 뒤돌아 가자고 하고 싶었지만, 그 남자는 이미 우리를 향해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용건을 말하려는 듯 걸어오고 있었다.


여느 걸인들이 하듯 그는 우리에게 한 푼을 요구했다. 남편은 나의 손을 꼭 쥐고, 속도는 조금 늦췄지만 계속해서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남편은 그에게 환한 웃음을 지으며 '봉쥬르'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도 환한 웃음으로 우리와 발을 맞춰 걸으며 인사를 했다. 남편은 그에게, 가지고 있는 현금이 없어서 줄 수가 없겠다며 정중히 거절했고, 얼굴에 난 상처가 아프겠다며 잘 치료해야겠다는 말을 다정하게 건넸다. 말투는 걱정하는 말투라기보다는 가벼운 농담을 기분 좋게 던지는 듯 유쾌하게 들렸다. 낭만의 거리 파리 시내 한 복판에서 한 푼을 요구하던 남자는 맥주 캔을 든 모델처럼 우리 옆을 걸으며 쏟아지는 햇볕만큼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그는 '다음에 또 봐요'라며 세련되게 인사를 하고 뒤돌아 갔다.


거리에 살며 어딘가에서 쥐어 터져 만신창이가 되어 아침부터 술이나 홀짝대는 남자. 몸과 마음이 길바닥에 내동댕이 쳐졌을 것 같은 이 초라한 남자를 남편은 하나의 인격으로 치켜세워줬다. 무서움에 온 몸이 경직되어있던 나의 몸이 햇살 먹은 그의 환한 미소와 함께 풀렸다. 두 남자는 햇살처럼 미소 짓고 있었고, 나는 파랗게 지[찌]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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